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26화 (226/510)
  • 00226 마녀의 예언  =========================================================================

    “와아. 이렇게 손을 잡으니까 참 좋다아.”

    가미긴은 왼손에는 포도주잔을 들었고, 오른손으로는 내 손을 꾹꾹 만졌다. 내가 대답했다.

    “저 같은 것이 만지기에는 비단처럼 고운 손길이군요.”

    “시트리. 단탈리안이랑 말할 게 있어서 그런데 잠깐만 괜찮을까~?”

    가미긴이 앙증맞게 애교를 떨며 시트리한테 말했다. 서열 제4위가 서열 제12위에게 건네는 말투치고 매우 정중했다. 시트리는 내 곁에서 떨어지는 것이 불만스러운지 햄스터처럼 뺨을 부풀렸지만, 산악파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갔다.

    가미긴이 내게 말했다.

    “저번에 브루노에서 그렇게 추파를 던졌는데도 모른 척하고! 나, 여자로서 자신감이 사라질 뻔했어.”

    “저에게는 무척 무서운 아가씨가 마드모아젤로 있어서 말입니다.”

    “내가 바르바토스보다 못하다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내가 말했다.

    “세상에는 운명이 있어 누구를 먼저 만나고 누구를 나중에 만났는가, 그 단순한 사실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어버리고는 하지요. 가미긴 님. 당신처럼 아름다운 분을 먼저 만나지 못해서 저 역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헤헤.”

    내가 공손하게 신사적으로 대응하자, 가미긴이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사실 가미긴은 나에게 다가오기 전부터 시종일관 방긋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만약 아무런 이유도 없이 웃고 다니기만 하는 자가 있으면 둘 중 하나였다. 아주 착한 사람이거나――.

    “그래서, 뭘 원해?”

    아주 위험한 사람이거나.

    그리고 만약에 그 사람이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고 모든 마왕을 통틀어 서열 제4위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어느 쪽이 정답일지 크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가미긴이 홀로 학살한 인간의 숫자만 수만을 헤아리겠지.

    내가 입가에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무엇을 원한다니. 물론 가미긴 님. 저는 언제나 당신의 호의를 바랍니다.”

    “응? 시치미 떼려구? 후후, 그럴 필요 없어.”

    가미긴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단탈리안이 바르바토스의 심복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나도 잘 아는걸. 예전에, 파이몬 물 먹이려고 네가 편지를 보낸 거 기억해? 사실 그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왜 바르바토스가 아니라 단탈리안이 편지를 보낸 건지 아리까리했거든~.”

    일찍이 파이몬은 엘리자베트 총통과 연합하여 바르바토스를 섬멸하려 했다. 나는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 고위 마왕들에게 개인적으로 서신을 보내었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가미긴은 지적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바르바토스 본인이 편지를 보내는 편이 훨씬 더 신뢰가 갈 텐데 말이야. 하지만 안 그랬어. 어쩌면,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 네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지도? 후후.”

    “음. 곤란하군요.”

    내가 멋쩍게 웃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정말로 파이몬이 그렇게 움직일지 안 움직일지, 완벽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만약에 예상이 틀릴 경우, 제가 잘못을 뒤집어쓰기 위해서 일부러…….”

    “걸렸구나.”

    그 순간, 가미긴의 실눈이 커졌다.

    가미긴은 걸렸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나한테 성큼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걸렸어, 걸려버렸어~.”

    새빨간 눈동자가 참을 수 없이 즐겁다는 듯 불길하게 빛났다.

    “단탈리안. 나는 바르바토스가 '네 계획'을 전혀 모를 수도 있다고 말했어. 우리 마왕군의 군단장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파이몬을 물 먹이는 계획……역시 바르바토스가 아니라 단탈리안, 네가 완전히 혼자서 짜낸 대본이었구나~?”

    “…….”

    “결국 지금 우리가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가지고 다투는 원인도 단탈리안이 제공한 거네. 아, 걱정하지 마. 지금 내가 방음(防音)마법을 쳐뒀으니까 주변에는 안 들려!”

    빌어먹을.

    내가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아직이었다. 아직 변명할 거리가 남아 있었다. 내가 차분하게 입을 열려고 한 때였다. 가미긴이 왼손에 들고 있던 포도주잔을 슬쩍 놓았다. 포도주잔은 낙하하여 쨍그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동안 가미긴은 내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단탈리안. 표정이 '멈춰' 있다구?”

    가미긴이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가엽게도. 자기 스스로 배역을 만들어서 몰입하는 사람은 말이지,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그만 배역에서 벗어나지를 못해. 마치 왕의 배역을 맡은 삼류배우가 갑작스럽게 무대에 난입해온 관객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왕처럼 행동하듯이 말이야~.”

    가미긴이 유리파편을 슬쩍 짓밟았다. 유리가 깨어지는 소리가 불쾌하게 울렸다.

    “유리잔이 깨졌는데도 놀라기는커녕 얼굴이 계속 미소를 짓고 있잖아. 표정이 멈췄어. 그러면 안 돼, 단탈리안. 그러면 안 돼~. 그 정도 연기로는 세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속아넘길지 몰라도, 나 같은 '일류배우'한테는 간파당하고 만다구.”

    “…….”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다.

    “에이, 그렇다고 또 너무 정색한다아. 가벼운 여흥이야. 같이 즐겨야지.”

    “저를 떠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동질감을 느꼈어.”

    가미긴이 말했다.

    “마냥 웃고만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빌어먹지? 그런 세상에서 웃으면서 살 수 있으려면, 내가 세상 다 합친 것보다 더 빌어먹은 사람이 되어버리면 되는 거야. 그래서 난 항상 웃고 다녀. 단탈리안도 똑같을 거라고 믿어.”

    “……당신과 내가 같은 부류라고?”

    가슴 속에서 불쾌한 감정이 들끓었다.

    “바르바토스나 파이몬 같은 아이들. 정말로 짜증나지~?”

    가미긴이 활짝 웃었다.

    “쟤네들은 세상에 정의라는 게 있다고 믿으니까 말이야. 두 사람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실 서로 쏙 빼닮았어. 마계의 염원이라느니 평화라느니 너무 거창해서 같이 못 놀아주겠어. 정말, 몇 번이나 죽이고 또 죽이고 싶었는데 간신히 참았다니까아.”

    “당신이 틀렸습니다. 저는 바르바토스를 좋아해요.”

    “글쎄에. 그냥 동경하는 게 아니고?”

    가미긴이 장난스럽게 내 이마에 꿀밤을 날렸다.

    “나는 서열 제4위야. 이천팔백 년 전에는 서열 제70위였지. 제4위, 여기까지가 내 최선이었어. 아무리 사람들을 속이고 능욕해도 서열 제3위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못하겠더라구. 거기부터는 진짜 괴물들만 살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내가 바로 너의 최선이야아.”

    까마득한 과거, 가미긴은 나보다 더 나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때 세계에는 마족이면서도 마왕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최고위 몬스터들이 날뒤었으며, 마왕군은 대륙에 신경 쓰기 이전에 용족과의 대전에 죽어나갔다.

    가미긴은 서열 제70위로 시작하여 마침내 서열 제4위에 올랐노라고 내게 밝히고 있었다. 그녀 역시 생존하기 위해 갖가지 발버둥을 쳤겠지. 그리고 나처럼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했다…….

    표리부동(表裏不同).

    예상대로 가미긴은 살갗으로 웃고 다니지만 속에 뱀을 키우는 인물이었다.

    “선배이자 동류로서 예언해줄게. 나 가미긴, 마녀 중의 마녀로서 말하느니, 사랑과 동경을 착각해버리는 자에게 크나큰 불행이 있을 거야! 멋쟁이 단탈리안. 이제 연기는 그만하고 나와 조금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누자.”

    “건설적인 이야기라니요?”

    “아까 물었잖아. 뭘 원하냐고.”

    가미긴이 말했다.

    “설마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가레스와 나에게 덤빈 건 아닐 거잖아. 나는 잘 모르겠지만 너한테만 보이는 이득이 있겠지. 그러니까 솔직하게 물어봤을 뿐이야. 뭘 원해~?”

    아아, 그런가.

    과연 가미긴은 나와 닮았다. 그녀는 철저하게 이득과 손해를 생각하며 움직였다. 이상, 이념, 의리와 같은 낱말은 가미긴에게 한낱 쇳소리보다 못한 잡음에 불과하겠지. 생존이야말로 유일무이한 가치였으며,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러므로 나는 단언했다.

    “가미긴. 저는 당신과 다릅니다.”

    그녀가 눈을 깜빡거렸다.

    “아직도 발뺌하려는 거야? 차암. 그럴 필요없대두.”

    “아니요, 진심입니다. 당신과 제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결정적이어서 도저히 우리 둘을 동류라고 부르지 못하게 강요하는 차이였다.

    “가미긴, 당신은 강자입니다. 높은 위치에 올라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덜떨어지는 부류라고 내려다보지요.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은 당신에게 있어서 그저 헛소리를 일삼는 멍청이에 불과합니다. 생존이야말로 진리. 나머지는 거짓이며 환상……당신은 그리 확신하고 있겠지요. 올바른 시각입니다.”

    “응.”

    가미긴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그게 뭐?”

    “당신은 환상이야말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당신이 나였더라면 나처럼 허술한 부분이 없었겠지. 결코 노예상인 잭 올란드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미래에 용사가 될지도 모를 데이지와 루크를 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가치들. 마계의 염원. 평화. 그런 것들을 향해서 부질없이 날개짓하는 행위야말로 아름답습니다. 부질없기에 역겨운 것이 아닙니다. 부질없으니까 도리어 감동적인 것입니다.”

    “……뭐?”

    “저런. 가미긴 님, 제 취향을 이해해주지 못하시는군요.”

    내가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바르바토스가 바라는 대로 마인들의 이상사회가 이루어졌다고 합시다. 그래봤자 억천 년의 시간이 흐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가미긴 님,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왕이라고 하여 영원불멸할 수는 없습니다.”

    흥이 겨웠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단지 조금 음흉한 아가씨라고 생각했던 가미긴도 훌륭하게 멋진 위인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도 좋아했다.

    “근본적으로 세상은 콜로세움이나 똑같다는 얘기입니다. 검투사들은 오늘 살아남기를 바라며 한 순간 한 순간 온몸을 내맡겨, 상대의 가죽을 꿰뚫고, 핏물을 흘리고, 승리의 포효를 터트리지요. 그래봤자 내일, 아니면 내일모레, 아니면 삼 년 후, 어느 날 패배자가 되어 싸늘하게 죽어버릴 텐데!”

    “…….”

    “아무런 쓸모가 없음에도 바퀴벌레처럼 발악하는 그 부질없는 몸짓이야말로 마왕된 자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가미긴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방음마법을 쳐두었다니 마음껏 소리쳤다. 아아, 어쩌면 내 취향을 이해해줄지 모를 동지를 만난 것이었다.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이상을 이루지 못하고 죽겠지요. 파이몬도 똑같습니다. 그토록 고귀한 이념을 품은 자들이……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꿈에도 꾸지 못할 의지력을 품고, 수백 년, 수천 년 동안이나 앞으로 나아가던 사람들이……결국은 좌절한다! 결국은 최후를 맞이한다! 아무런 보람도 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것은 정말이지――.

    “정말로 기대되지 않습니까!”

    죽여주게 황홀한 일이다.

    가미긴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미소가 멈춰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몸을 더 바싹 붙였다.

    “과연 어떤 유언을 남길까요. 얼마나 아름답게 죽을까요. 아아, 상상만 해도 멋집니다. 가미긴 님. 그렇지 않습니까? 바르바토스가 최후에 어떤 유언을 남길지, 파이몬이 마지막에 어떤 삶을 보여주고 떠나갈지, 기대되고 또 기대되어 밤잠을 설칠 정도 아닌가요! 오. 인간들 중에도 간혹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드물게도 '멋진 의지'를 가진 존재이지요.”

    파비안이 떠올랐다. 최근에 접한 사람 중에는 파비안이 가장 멋졌다. 나는 마음속의 신전에서 영원토록 그를 기릴 것이었다. 마치 불꽃놀이처럼 그에 대한 기억은 해마다 거듭하여 내게 감동을 주겠지.

    “그런 의지들이 피어나고 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마왕의 의무라고 저는, 저 단탈리안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작품 후기 ============================

    가미긴: 후후, 이 구역의 미친 년은 나…….

    단탈리안: 꺄하하하, 꺄르르르륽, 까ㅓㅁ이ㅓㅏㅁ랴!

    가미긴: ……죄송합니다. 저 나가봐도 괜찮을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