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5 마녀의 예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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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방에서 축객령을 받고 쫓겨난 여자들은 한곳에 모여들었다.
이곳은 라피스가 본부실로 이용하는 임시 거처였다. 던전 건축과 관련하여 서류뭉치가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자들은 마치 전투에서 도망쳐온 패잔병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라우라가 한탄조로 말했다.
“상대가 바르바토스 각하여서야 승산이 없다. 어느 요소도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우리와 달리 바르바토스 각하는 최고위 마왕이니 입장상에서 불리하고, 더군다나 주군께선 별 도리가 없는 아동성애자이니 몸매에서도 뒤진다……!”
라우라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내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풍성해지는 것인가. 실로 원통하다! 주군과 만난 그날처럼 영원토록 어린애 체형으로 남으면 좋을 텐데!”
“…….”
그 얘기, 바르바토스 전하가 들으면 당신을 죽이려고 들 걸요. 제레미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 꼭 어린애 취향이라고 말씀드리기에는 곤란한데요. 보세요, 저도 있고.”
“아니. 확실하다. 제레미 경, 저 아해를 보아라.”
라우라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데이지가 조용히 앉아 철학책을 읽고 있었다. 『인간 자유의 본질과 그것에 연관된 대상들에 대한 철학적 탐구들』라는 글자가 멋들어진 필기체로 표지에 새겨져 있었다. 데이지는 벌써 고대제국어로 철학책을 독파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척 봐도 바르바토스 각하만큼이나, 아니 각하보다 더 어린애스럽지 않은가!”
“……어린애스럽다기보다는 그냥 어린애 그 자체인걸요.”
“주군께는 특정한 취향이 있음에 분명하다!”
라우라는 사람 말을 듣지 않았다.
“정말이지, 갑자기 양녀라면서 저 아해를 데려왔을 때는 까무라칠 뻔했다. 아아. 소녀는 분명히 주군의 밤상대를 해줄 사람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열한 살은 아니지 않은가, 열한 살은! 지나치게 좁다!”
“으응. 단탈리안 전하께서도, 딱히 밤상대를 시키려고 데이지 양을 거둔 것은……형식상이나마 양녀라구요, 저 아이?”
“아무 상관없다. 주군이라면 부녀 관계라서 더더욱 흥분된다고 날뛸 것이다.”
라우라가 단언했다.
제레미는 이곳에 와서 단탈리안의 이미지가 얼마나 바닥을 찍고 있는지 나날이 체감하고 있었다. 신하들한테서 이렇게 변태 취급받는 마왕도 몇 명 없으리라.
“……아뇨. 오히려 잘된 것일지 모릅니다.”
라피스가 중얼거렸다.
“바르바토스 전하께서 중심을 잡아주신다면 함부로 단탈리안 님에게 접근하는 여성도 적어지겠지요. 무분별하게 첩실을 늘리는 걸 막는 데에는 바르바토스 전하만한 방패막이가 없습니다.”
“과연.”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전략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겠군. 흠. 다른 요소는 몰라도 지(地)의 차원에서는 우리가 유리하다. 바르바토스 각하와 다르게 우리는 항상 주군 곁에 있을 수 있으니.”
“예.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라피스와 라우라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 논의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제레미가 생각했다.
‘얘네들도 조금 이상해요.’
세상에 어느 하급 마족이 마왕을 가리켜서 한낱 방패막이라고 부르는가?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인간 소녀는 심지어 동족의 두개골을 수집하는 취미까지 갖고 있었다. 데이지가 얼마나 이상한지는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지금 이 분들, 바르바토스 전하를 상대로 진지하게 사랑 싸움을 벌일 생각인가요? 정말? 진심으로?’
상대는 서열 제8위의 마왕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편, 이 아수라장에서도 데이지는 조용하게 철학책을 넘겼다.
문득 제레미가 깨달았다.
‘설마, 혹시, 지금 여기서 가장 상식적인 사람이 저인가요?’
그녀는 믿기지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사람을 암살하고 암흑가에서 피를 묻혀온 제가……가장 상식적이라고……?’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단탈리안 마왕군, 통칭 단탈리안 파밀리아(Dantalian familia)에는 제정신이 아닌 인재들만 모여 있었다. 라피스도 라우라도 처음 봤을 때만 정상적으로 비추었을 따름이지 속을 파고들어보니 그들의 군주만큼이나 무시무시했다.
“바르바토스 전하께선 은근히 마조라고 들었다. 그 성향을 이용해서…….”
“예. 라우라, 언제 기회를 노려서 세 명이서 성교하시길. 그때 라우라가 가장 우위를 점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공식적으로야 바르바토스 전하께서 정실이나, 실제 궁전 안에서는…….”
뭔가 엄청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제레미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턱이 점점 더 벌어졌다.
“자, 잠시만요. 잠시만요. 라피스 님. 라우라 님. 설마 바르바토스 전하를 '노예' 역할로……그리고 라우라 님이 주인 역할을 맡겠다는, 그런 이야기인가요?”
“전술적으로, 상대방이 약한 지점을 공격하는 것은 기본 중 기본이다.”
라우라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 각하께서는 지금이야 주군과 사귀지만 본래 동성애자이시다. 부끄럽지만, 소녀는 미색으로 따지면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신한다. 이 육체를 이용하겠다.”
“네에……?”
라우라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소녀는, 바르바토스 각하의 애인이 되어 그분을 소녀의 노예로 만들겠다!”
“…….”
“바르바토스 각하의 첩인 주군은 그럼 소녀의 첩의 첩이 된다. 입장상 소녀가 유리해지는 것이다!”
이 년은 미쳤다.
제레미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마에 땀을 흘렸다. 그러니까 인간 소녀는, 단탈리안의 정실이 되기 위하여 바르바토스를 SM 플레이 파트너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머리구조가 어떤 식으로 되어 있길래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인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제레미로서도 전혀 알 수 없었다.
“훌륭한 방법입니다.”
또 다른 미치광이가 라우라를 옹호하고 있었다.
“라우라 양은 정책에 서투르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전술적인 면에서는 과연 칭찬할 수밖에 없군요.”
“걱정하지 마라. 라피스 언니는 소녀의 영원한 언니이다. 소녀가 바르바토스 각하를 점령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뒤엎어지진 않는다.”
제레미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단탈리안 파밀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흉악한 귀문(鬼門)이었다. 이곳에는 주군이고 신하고 가릴 것 없이 머리 한구석의 무언가가 망가진 사람만이 살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바깥에서 보기에는 극히 정상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마왕 단탈리안은 제8차 월맹군을 성공으로 이끈 장본인.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마왕군의 전멸을 막은 유망주. 라피스 라줄리는 쿤쿠스카 상회에서 성공일로를 달리는 차기 거상.
남들이 보면 훌륭하기 그지없는 인재진이라고 생각하겠지. 실상은 완벽하게 달랐다. 이들은 그저 평범한 척할 뿐인 도깨비들이었다!
‘나, 나가고 싶어요. 전력으로 도망치고 싶어요. 이분들이랑 평생 연관되고 싶지 않아요.’
암살자로서 살아온 그녀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들과 엮이면 좋을 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심장에 노예각인이 새겨져 있는 이상, 의뢰주의 명령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복종해야만 했다…….
『이곳에 들어와버린 자, 희망일랑 죄다 버려야 할지어니.』
던전 입구에 새겨진 말이 옳았다. 여기엔 꿈도 희망도 아무것도 없다…….
이날.
군주인 단탈리안은 자신의 연애자유를 사수하기 위해 여마왕들을 모조리 따먹겠다고 공언했으며, 그의 신하들은 정실 자리를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만으로 마왕 바르바토스를 함락시키겠노라고 모의했다.
그것이 단탈리안 패밀리의 퀄리티였다.
* * *
니블헤임 시장관저에 마왕들이 모여들었다. 벌써 여기에 오는 것도 세 번째였다.
처음에는 청문회에서 파이몬한테 추궁당했다. 그때 나는 아무 지위도 없는 최하급 마왕이었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월맹군 원정이 결의되었다. 그때, 나는 평원파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세 번째 방문……나는 평원파의 최고 핵심이자 월맹군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 참모 지위를 갖고 있다.
세월이 무상하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돌이켜보면 정신없이 달려온 3년 아니었던가?
“단탈리안 전하, 어서오십시오. 히히.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회에 잠겨 궁전 정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노파가 나를 맞이했다. 얼굴이 낯익었다. 몇 년 전에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마중나온 바로 그 마녀였다.
“훔바바 아닌가? 오랜만이로군.”
“호호? 소인이 전하께 미천한 이름을 말씀드렸는지요?”
노파가 쥐처럼 끽끽거리며 말했다. 예전에는 신경에 거슬리다고 생각했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편안했다. 마녀의 능력치를 훔쳐보면서 ‘얘 한 마리만 쳐들어와도 싸그리 멸망해버리겠다’ 하고 절망했었다. 이제는 달랐다. 나에게는 죽음의 기사들이 있었다.
내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마왕이라면 신민의 이름 정도야 저절로 알게 되는 법이지.”
“과연 단탈리안 전하, 끼끼. 마계에 위명을 떨치시는 분답군요. 자아. 궁전으로 모시겠습니다.”
노파가 앞장섰다.
이것 역시 옛날과 달라졌다. 예전에는 노파가 아니라 그녀의 사역마가 안내했다. 새삼스럽게 내가 출세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이 지위까지 오르는 데 정말로 많이 고생했다.
정말로.
한두 마디로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서열 제71위! 이면의 마왕, 단탈리안 전하 납시요오오!”
문지기가 큰 목소리로 무도회장에 고했다. 경비병들은 지극하게 예의바른 태도로 나에게 허리를 숙였고, 그 한가운데를 내가 검은색 망토를 펄럭이면서 걸어갔다. 나는 부츠에서 망토까지 전부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검은 죽음(黑死)의 마왕. 혹자는 나를 향해 수군거렸다. 아직도 흑사병과 나를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이가 많았다. 검은색이 흑사병을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떳떳하게 검은색 옷을 차려입고 나왔다.
이제 나에게 감히 흑사병 따위로 추궁을 걸어올 마왕은 없었으니까.
마왕들은 멀찍이서 나를 지켜보았다. 누구도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과연, 주위를 둘러보니 평원파 마왕들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대다수가 산악파였다. 그들 입장에서 마왕 단탈리안은 자신들의 두목을 수장시킨 악몽에 불과했다. 인사를 나누고 싶지 않겠지.
산악파가 마왕군을 좌지우지하던 시절은 끝났다. 대륙의 정세는 확연하게 평원파가 휘어잡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역전을 만들어낸 전범자라는 소리였다. 무언가 우스웠다.
산악파 마왕들과 나 사이에서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그런 침묵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끼어드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오랜만이야, 단탈리안!”
“……예, 오랜만입니다. 시트리.”
마왕군에서 유일하게 심성이 더럽혀지지 않은 자, 서열 제12위의 시트리였다.
시트리는 나를 보자마자 팔짱을 껴왔다. 주변에서 경악성이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파이몬이 몰락한 지금, 현재 산악파를 이끄는 장본인은 시트리였다. 그런 마왕이 산악파의 원수한테 친밀하게 다가간 것이었다.
“그동안 뭐하면서 지냈어? 한참이나 연락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잖아!”
“하하. 제가 명줄 하나는 끝내주게 깁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안 그래도 단탈리안 싫어하는 인간들 많으니까 조심해야지.”
시트리가 뺨을 부풀리면서 노려보았다. 이쪽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쓴웃음이 나왔다. 나 참, 이 아가씨는. 지금 자기가 한 행위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거대한 파장을 몰고올지 아는 것일까. 아마 전혀 모르겠지. 그렇기에 시트리였다.
반면, 세상에는 위장에 구렁이를 이백 마리쯤 키우는 양반도 있었다.
“헤헤. 안녕, 단탈리안? 오랜만이야.”
서열 제4위의 마왕 가미긴.
바르바토스와 영토 분쟁을 겪고 있으며, 오늘 내가 평원파의 대표로서 협상해야 할 상대기이고 했다.
풍성한 금발을 자랑하며 가미긴이 팔자걸음으로 다가왔다. 가미긴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얼핏 보면 시트리처럼 순수해보였다. 물론 그녀의 속내가 얼마나 냉혹한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가미긴 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응. 바르바토스 덕분에 지루할 날이 없었어!”
가미긴이 활짝 웃었다.
“오늘은 잘 부탁해, 단탈리안. 나 너무 몰아세우면 삐질 거야아?”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우리가 서로 악수하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