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24화 (224/510)
  • 00224 마녀의 예언  =========================================================================

    한참 동안 바르바토스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이미 할 말은 다 던졌고, 설득도 끝났다. 여기서 더 보채본들 과유불급이었다. 바르바토스가 감정을 정리하기를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딴 마음이 있는 거 아니지?”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에 파이몬을 먹지 않았겠냐. 서큐버스 여왕의 유혹을 견뎌낸 거야. 이것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을걸.”

    사실 뒷수습이 두려워서 피한 것이지만. 무슨 상관이랴.

    “……진짜로 내가 제일이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딱히 평원파에 충성하는 건 아니야, 바르바토스. 제파르 대장을 존경하고 벨레드 형님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평원파의 이념에 몸을 불사를 생각은 없어.”

    내가 바르바토스의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달리 말해, 당파적인 이익과 상관없이 나는 너의 친구야. 평원파의 수장도 아니다. 고위 서열의 마왕도 아니다. 단지 바르바토스, 너 자체를 친우라고 여기고 있어.”

    “만에 하나…….”

    바르바토스가 찌릿 노려보았다.

    “파이몬한테 넘어가면 너 죽는다.”

    “저에게는 당신이 제일이라니까 자꾸 그러네요, 여왕 전하.”

    내가 웃으면서 바르바토스에게 키스했다. 입술에 키스한 게 아니었다. 옥좌에 앉은 바르바토스의 발등에 정중하게 입을 맞추었다. 처음부터 입술에 다가갔으면 지금 바르바토스의 심정상 거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까 최대한 저자세로. 정성스럽게, 마치 하인이 주인을 애무하듯이 소녀의 육체를 어루만졌다. 정강이에, 무릎에, 허벅지에……바르바토스의 발가벗은 배와 가슴을 거쳐서, 목덜미에 키스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노크하듯이 입술을 입술로 갖다댔다.

    “흐응……응.”

    간단히 성문이 열렸다.

    우리 둘 사이에는 과격하고 격렬한 섹스가 이루어지곤 했다. 행위가 격렬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단지 몸을 겹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채찍질과 같은 고문, 주인과 노예가 되어 역할에 몰입하는 등,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볼 때 '도를 넘은' 성교에 집착했다.

    그 때문일까. 가끔씩 평범하게 연인이 연인을 대하듯이 다가가면 바르바토스는 오히려 좋아했다. 사람이 자극적인 콜라만 마시고 살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넌 진짜 개새끼야.”

    키스가 끝나고, 바르바토스가 물기 어린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목소리에서 각진 모서리가 사라져 있었다. 내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개 같은 새끼한테 박혀서 개처럼 헐떡이고 싶지 않아?”

    “…….”

    그것은 바르바토스가 맨 처음에 나를 유혹할 때 써먹은 대사였다. 당사자인 그녀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반쯤 벌렸다.

    그녀가 뭐라 불평을 쏟아내려는 찰나, 한 발자국 앞서서 입술을 틀어막았다. 바르바토스의 말은 형태를 잃고 조악한 신음이 되어 흘러나왔다.

    “흐읍, 하아……흐응.”

    “바르바토스.”

    입술을 때고 말했다.

    “조금 보지 못한 사이에 내가 변태가 되었다고 놀렸지? 그거 사실이야. 내가 꽤나 변태적인 놈이라는 사실을 요즘에 와서 깨닫고 있어. 야아, 정말이지 놀라운 발견이었다고.”

    “……넌 원래부터 변태 새끼였어.”

    “호오. 내가 변태라는 걸 알면서도 섹스 파트너가 된 거로군.”

    바르바토스는 조금이라도 나에게 욕을 날리고 싶은지 한 마디도 곱게 넘어가지 않았다. 안타까웠다. 그게 도리어 실착이 되었다, 불멸의 마왕이여.

    “바르바토스는 말이야, 의외로 조금 마조끼가 있지.”

    “하아?”

    “평소에는 주인처럼 굴지만 역할이 바뀌어도 엄청 기뻐하고.”

    나는 눈짓으로 홀로그램 창을 띄워서 곧바로 몬스터를 구입했다. 고문용 슬라임. 데이지에게 써먹은, 투명한 슬라임이었다. 바르바토스가 눈쌀을 찌푸렸다. 불안한 시선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걸……어쩌려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이 슬라임에는 감각을 공유하는 성질이 있잖아.”

    내가 바르바토스에게 얼굴을 바짝 붙여서 속삭였다.

    “네 몸속에 이걸 쑤셔넣을 거야.”

    “…….”

    “반쪽으로 갈라서, 나머지 하나는 내가 가지고 다닐 생각이란 말이지. 언제나 주머니속에 휴대하고 다니겠어. 그리고 나는 너랑 함께 돌아다니면서 심심할 때마다 주머니를 만지작, 만지작거리는 거지. 어때? 좋은 생각이지?”

    바르바토스의 입가가 떨렸다. 표정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냐니……미친놈이, 감히 나를……서열 제8위의 마왕을…….”

    “그동안 합스부르크에서 고생하느라 힘들었지? 우리집에 도망쳐온 김에 니블헤임으로 놀러가자고. 카지노에도 가고, 최고급 유곽에서 돈을 펑펑 쓰고, 응? 내가 요즘에 돈이 아주 많거든. 꽤 즐거울 거야.”

    슬라임을 찢어서 바르바토스의 안쪽에 흘려넣었다. 슬라임이 애벌레처럼 꼬물꼬물 기어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로 그녀한테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인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만지는 거지. 주머니에 있는 슬라임을. 격렬하게, 강하게,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수많은 마인이 보는 앞에서 서열 제8위의 마왕이 가버리는 거야.”

    “미쳤, 어……?”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진 바르바토스는――.

    “그런 거, 내가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

    희열을 참지 못해 웃고 있었다.

    표정을 관리하려 했지만 앞으로 쏟아져내릴 쾌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입끝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 거만하고 자신만만한 폭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의 잔해만이 남아서 간신히 바르바토스를 버티게 해주었다.

    내가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것은 우리 둘 사이의 역할이 뒤바뀐다는 신호였다.

    “아가리가 삐뚫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들어주는 게 아니다, 천박한 암퇘지 년아. 내가 명령하는 것이다. 육노예라면 육노예다운 방식으로 말해야지. 응?”

    “……, …….”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이후 여섯 시간 동안 바르바토스는 사람의 언어를 허락받지 못했다. 돼지처럼 꿀꿀거릴 수밖에 없었음을 알려두겠다.

    데이지가 보는 앞에서 날 노예로 부려먹은 대가이다. 나는 받은 은혜는 반드시 돌려주는, 무척 성실한 성격이거든.

    *  *  *

    “회합?”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바르바토스는 단순히 도피성으로 온 게 아니었다. 용무가 따로 있었다. 바로 마왕들 사이에서 회합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원래 목적은 그 소식을 전해주는 거였다, 하고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후우……월맹군 전쟁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으니까. 논공행상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거지.”

    그녀가 담뱃대로 연초를 길게 피웠다. 지친 얼굴이었다. 몇 시간 동안 동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놀아재꼈으니 당연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옷에 구멍이 생길 정도로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고블린 일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르바토스는 절대로 절정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했다.

    결국 가버렸지만. 그것도 쉰여섯 번.

    갈 때마다 몇 번째 절정인지 말하라고 명령했으니 나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에 바르바토스는 거의 기절해버렸다. 그녀는 동굴바닥에 쓰러져서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로 ‘쉰여섯……쉰여섯 번이요……쉰여섯 번이요……’ 하고 중얼거렸다.

    참고로 이상한 레벨까지 올라버렸다.

    「조교 레벨(Lv.2)이 올랐습니다!」

    이게 뭔가 싶어 얼른 확인해보았다.

    데이지를 노예로 삼으면서 나한테도 새로운 기능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조교 레벨이 높을수록 노예를 효과적으로 조교할 수 있습니다.’ 설명창에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언제 한가해지면 데이지한테 실험해봐야겠다.

    “논공행상이라니……바알이 무슨 우리들 군주도 아니고, 왜 그런 자리에 참석해야 돼?”

    “뭐, 네 말이 맞지. 근데 말이 논공행상이지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거든.”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내가 바알 아저씨한테 중재를 요청했어.”

    그녀의 말은 이러했다. 현재 합스부르크에서는 마왕들 간의 삼파전……요컨대 바르바토스와 아가레스, 가미긴 사이에서 세력 다툼이 나날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중립파의 마왕 마르바스가 다툼을 조율해주었다. 하지만 이번 싸움은 마르바스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아가레스는 서열 제2위의 마왕이며, 가미긴은 서열 제4위의 마왕이다. 서열 제5위인 마르바스에게 마냥 순순히 복종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바르바토스는 마왕군에서 절대적인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바알에게 중재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알 아저씨는 스스로 해결책을 제안해주지 않아. 절대로.”

    마왕 바알은 기본적으로 자유방임주의자였다.

    문제가 생기면 중재의 자리를 마련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해결은 당사자끼리 마무리 지어라, 그런 느낌이라고 한다. 바르바토스는 조금이라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네가 아가리 하나는 물에 빠져도 둥둥 떠서 조잘거리잖아. 좀 도와줘봐.”

    “……야, 야. 미쳤냐? 나보고 아가레스와 가미긴이랑 척을 지라고?”

    내가 식겁해서 말했다.

    “걔네들이 나한테 원한이라도 품으면 어쩌고.”

    “가미긴이 너 마음에 들어한다며? 좆탱이로 꼬셔보시든지.”

    “놀고 있네.”

    가미긴과 만난 것은 월맹군 전쟁에서 잠깐뿐이었다. 그래도 알 수 있었다. 가미긴은 정적을 없앨 수 있으면 주저없이 암살 따위의 수단을 동원할 위인이었다. 이권이 걸린 문제에서 개인적인 호감 때문에 이쪽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가레스는 말할 것도 없다. 나랑 친분이 전무하다.

    “음. 내가 교섭자로 나서서 이득을 볼 구석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부탁해도 안 되냐?”

    바르바토스가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주인-노예 놀이는 조금 전에 끝났다. 그런데도 바르바토스는 제법 저자세로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 내가 교섭자로 나서봤자 이득을 볼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바르바토스도 충분히 이해한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부탁했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무엇을 주겠다. 너에게 뭔가를 해주겠다. 바르바토스는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텐데, 전혀 이득을 제시하지 않았다.

    즉……바르바토스는 이번만큼은 이익이라든지 손해라든지 하는 관계에서 떠나 순전히 나에게 우정으로써 부탁하고 있었다.

    “…….”

    내가 골똘하게 고민에 잠겼다.

    지금까지 바르바토스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부탁해온 적이 없었다. 우리의 관계는 꽤나 건조했다. 그녀나 나나 우정이나 연정 따위의 말랑말랑한 단어를 싫어했다.

    언제든지 몸을 섞는다.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결코 연정과 우정을 이용해먹지 않는다. 무척 드라이한 관계라고 표현해도 좋겠지.

    나는 고민 끝에 납득했다.

    ‘과연.’

    이것 역시 거래였다.

    바르바토스는 나에게 파이몬 등과 자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감정의 응어리가 사라질 리 없었다. ‘내가 너에게 그 정도 허락했으니까, 너도 나에게 이 정도는 양보해줘.’바르바토스는 그렇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걸 입으로 설명하지 않은 까닭은, 명확하게 말해버린 순간 우리 둘의 관계에 연정과 우정이 너무나 명확하게 들어서버리기 때문이리라. 그런 것이 끼어버리면 관계는 순식간에 질척해져버리고 만다…….

    “흐흐.”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태도가 귀엽게 느껴졌다. 정말 건방진 꼬맹이가 아닌가.

    “바르바토스. 너, 내 손가락 가지고 왔냐?”

    “응? 어.”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품속에서 하얀 수건을 꺼냈다. 수건 속에 내 손가락 두 개가 모셔져 있겠지. 라피스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자른 손가락이었다. 아마도 나한테 도로 붙여주려고 가져왔으리라.

    내가 말했다.

    “그거 목걸이로 만들어서 네가 가지고 다녀.”

    바르바토스가 눈을 깜빡거렸다.

    “뭐?”

    “약속했잖아. 파이몬이랑 자도 나한테는 네가 제일이라고. 증거물, 이라고 하기에는 그렇다마는 꽤나 적나라한 징표가 되겠지. 나중에 파이몬 만나면 손가락 목걸이를 보여줘. 내가 선물했다고.”

    네가 단탈리안과 잠을 잤을지라도, 그는 나에게 신체의 일부까지 선물했다. 내가 그와 훨씬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만큼 효과적인 제스처가 있을까. 나는 바르바토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손가락 두 개를 헌상하고자 했다.

    “……응. 알겠어.”

    바르바토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하얀 수건을 꾸욱 쥐었다. 무엇을 알겠다고 말한 것인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말없이 몸을 기대왔다. 나는 미소를 짓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둘 다 형편없는 어리광쟁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