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23화 (223/510)
  • 00223 마녀의 예언  =========================================================================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바르바토스는 계속해서 폭언을 이어나갔다.

    “아, 그렇다고 내가 단탈리안의 아내라는 얘기는 아니야. 정확하게 말해서 단탈리안이 나의 첩이다. 나한테 단탈리안의 소유권이 있는 셈이지. 하지만 나는 자비로워. 내 귀여운 첩이 바람을 피워도 너그럽게 용서해줄 의향이 있어.”

    바르바토스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단, 무분별하게 놀아대면 곤란해. 단탈리안. 너는 이제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나 바르바토스의 첩이다. 제왕의 애인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냐?”

    “……내가 난봉꾼이라고 알려지면 네 체면까지 덩달아 손상된다는 거로군.”

    왕의 애인이 함부로 몸을 놀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흉이 되어버린다.

    애인만 욕을 먹는 게 아니다. 왜 그런 사람을 연인으로 두었는가. 정말 제대로 된 안목을 갖추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왕까지 비난과 의심을 받는다.

    그런데, 하고 내가 물었다.

    “넌 남자랑 안 잤을 뿐이지 여태껏 신나게 놀아재꼈잖아? 새삼스럽게 그쪽 방면으로 손상될 체면이란 게 있었냐?”

    “멍청아. 유일한 남자 애인이라는 게 중요하지.”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야 너랑 나 사이에 연정(戀情)이니 뭐니 달콤한 감정이 없다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의미심장하다 이거야. 내가 남자랑 사귀는 게 이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에요, 이 양반아.”

    이해했다.

    마인들의 세계에서 오입질은 결코 추문이 아니다. 성적으로 자유분방하기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동네이다. 흉측하게 생겨먹은 몬스터와 섹스했다는 것을 자랑스레 떠들고 다니는 부류도 소수이긴 하나 있다.

    그러나 '아내' 혹은 '남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바람을 피운 당사자야 상관없다만, 파트너가 바람을 피우도록 내버려둔 사람이 비웃음을 당한다.

    “고위 마왕이란 건 여러모로 귀찮거든.”

    바르바토스는 무척 피곤하다는 표정이었다.

    “엉뚱한 뒷소문이라도 생겨봐. 곧장 온 마계에 다 퍼져버릴걸? 예를 들어 단탈리안이 사실은 엄청나게 추잡한 난봉꾼이고 바르바토스가 거기에 꾀여서 넘어갔다, 라고 소문이 돌면…….”

    “당장 아가레스와 가미긴이 좋아하겠지. 젠장.”

    바르바토스는 명분 싸움에서 조금이나마 불리하게 되어버린다. 정치계에서 원래 라이벌의 이미지를 공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수법이 없으니까.

    그런가. 나는 이제 여자관계까지 정리해야 하는 위치에 올라섰는가……. 마음대로 행동하고 욕망대로 살아가면 남한테까지 피해를 입히는 인물이 되어버렸는가. 무척 귀찮았다.

    내가 퉁명스럽게 꼬집었다.

    “그러게 왜 사람들 앞에서 우리 사이를 공언했어?”

    그러자 바르바토스는 무언가 기분 나쁜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어차피 소문은 퍼지기 마련이야. 목 위에 달린 게 돼지방광이 아니라면 생각 좀 해봐, 밥팅아. 네가 내 막사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나오지 않는데 아무렴 소문이 안 퍼지겠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직접 밝혀서 못 박아두는 편이 낫지. 아무튼, 이제부터 좆대가리 함부로 놀리지 마.”

    “하아.”

    한숨이 나왔다. 이래서 정치란 골치가 아팠다.

    이대로 꼼짝없이 바르바토스한테 꽉 잡혀서 살아야 하는가 우울해지던 그때였다.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이마에 손을 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떠오른 해결책이 말이 되나 안 되나 천천히 복기해보았다.

    “……어, 바르바토스. 잠깐 우리 둘이서 얘기할 수 없을까?”

    “응?”

    바르바토스가 내 눈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네.”

    “아아. 조금 외도스러운 방법이지만.”

    “네 두개골이 생각하는 게 전부 외도이지 뭘 새삼스럽게. 다들 나가봐.”

    바르바토스가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라피스와 라우라, 제레미는 그렇게 한 마디도 항변하지 못하고 축객령을 받아버렸다. 참고로 데이지는 제레미가 줄을 끊어서 데려갔다.

    “좋아. 말해봐.”

    “내가 너랑 잔 것 때문에 몸을 조심해야 한다. 그건 맞아. 하지만 정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떠냐.”

    그녀가 의뭉스러운 눈초리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정반대?”

    내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예 희대의 오입쟁이가 되는 거다.”

    “……하아?”

    얘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바르바토스는 그런 얼굴이었다.

    내가 개의치 않고 말해나갔다.

    “바르바토스, 생각의 전환이야. 마왕 단탈리안이 바르바토스만의 애인이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거다. 거의 모든 여자 마왕들이랑 잠자리를 같이 든다면 문제가 안 돼!”

    “……하아아?”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이건 또 웬 개소리야' 정도로 바뀌었다.

    둔하기는.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상상해보라고. 만약 내가 파이몬, 가미긴, 시트리 그리고 너랑 전부 애인관계를 맺으면 어떻게 되겠어? 바르바토스, 네가 나를 통제하지 못하는 게 아니야. 내가 대단한 새끼가 되어버리는 거지.”

    그렇다. 어떤 남자가 여왕님과 은밀한 사이라면 과연 그는 조심조심 처신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만약에 그 남자가 한 명의 여왕이 아니라 이 나라 저 나라의 여왕이랑 모두 관계를 가진다면 어떻게 되는가?

    정말로 대단한 수컷이 되는 거다.

    어느 여자가 난봉꾼이랑 잔다. 그럼 욕을 먹는다. 허나 그 난봉꾼이 다름 아니라 카사노바라면? 여자의 잘못이 아니다. 단지 카사노바가 엄청날 뿐이다.

    “……잠깐만. 미안. 나, 지금 머리가 무척 혼란스럽거든?”

    바르바토스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지금 너랑 내가 똑같은 언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야. 단탈리안, 그러니까 네 얘기는……파이몬 그 개년뿐만이 아니라 시트리, 가미긴까지 따먹겠다 이 말이냐?”

    “바로 그거지.”

    내가 손뼉을 쳤다.

    “이해력이 빨라서 좋군.”

    “――뒈져라, 개새끼.”

    바르바토스가 전력으로 발차기를 날렸다.

    나는 이미 바르바토스가 공격해올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간신히 피했다. 바르바토스가 얼굴이 잔뜩 붉어져서 속삭포로 말했다.

    “바보 아니야? 멍청이 아니야? 돌았어? 미쳤냐? 이거 완전히 또라이네!”

    “아니,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생각해봐. 이거 생각보다 말이 되는…….”

    “나는 너한테 처녀를 따였다고, 나쁜 새끼야!”

    바르바토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아무리 연애자유주의자라고 해도, 응? 네가 첫남자라고! 내가 아무런 생각도 마음도 없이 네 자식이랑 떡쳤을 거 같아? 세상에. 두개골이 시궁창이어도 어떻게 그런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어? 어떻게 파이몬 그 창녀를 먹겠다고 내 앞에서――.”

    “나한테도 너가 제일이야!”

    내가 두 손을 들고 소리쳤다.

    “골빈 년아, 왜 하나는 생각하고 둘은 생각 못하냐! 내가 파이몬이랑 가미긴을 따먹었다고 쳐봐! 그런데도 단탈리안한테는 마왕 바르바토스가 가장 소중하다고 소문이 흘러봐! 빌어먹을, 그럼 바르바토스 네가 여마왕들 중에서 최고가 되는 거야!”

    “…….”

    바르바토스가 뚝, 하고 동작이 멈추었다.

    “……파이몬이랑 가미긴보다 높은 게 된다고?”

    “그래! 존나 자존심이 천원을 돌파해도 될걸! 사람들이 나한테 물어볼 거 아니냐. 댁이 따먹은 마왕들 중에 누가 가장 소중하냐고. 그때 내가 시바알, 세상에 아름다운 마왕이란 마왕은 죄다 시식해보았지만 바르바토스만한 여자가 없더라, 하고 대사 한방 날려주면!”

    내가 허공에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다.

    “끝장인 거지! 그때야말로 네가 내 정실(正室)이 되는 거라고! 이해했냐? 파이몬이나 시트리나 가미긴은 그냥 하룻밤 즐기는 첩에 불과하고, 바르바토스, 너는 천하의 난봉꾼마저 휘어잡은 여장부로 숭배받는다!”

    “…….”

    바르바토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닥쳐. 젠장, 네 새끼가 말하니까 개소리도 개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리잖아…….”

    “그야 개소리가 아니니까 당연히 개소리가 아닌 걸로 들리지!”

    “아가리 좀 닥쳐보라고, 쌍놈아.”

    말투는 거칠었지만 촉이 왔다. 현재 그녀는 나한테 설득되고 있었다. 그것이 느껴졌다. 단지 감정적인 문제 때문에 납득하지 못할 따름이었다.

    이럴 때 밀어붙여야 한다.

    이건 어마어마한 중대사였다. 앞으로 마왕으로 살아갈 나날이 수천 년이건만 벌써부터 바르바토스한테 코가 꿰일까보냐! 우리 사이에서 첩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쪽이다.

    “야. 바르바토스. 이게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아가리는 삐뚫어졌어도 말은 제대로 해……나 내비두고 딴 년들이랑 떡치겠다는 게 어떻게 날 위해서 하는 거야!?”

    “네가 '여자'로서 파이몬을 깔아뭉갤 절호의 기회라고.”

    조용히, 바르바토스의 귀에 속삭였다.

    지금 내 모습을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보았다면 주저없이 악마라고 욕했겠지. 무얼. 전혀 상관없었다. 사실 말이지 나는 예전부터 악마가 되고 싶었다.

    “파이몬한테 이기고 싶지 않아? 단지 마왕으로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여성으로서도 그 녀석을 짓밟고 싶지 않아? 파이몬의 자존심과 체면을 모조리 나락으로 떨어트려서 큰소리로 웃어보고 싶지 않냐고.”

    “으……으으…….”

    바르바토스가 으으, 하고 신음했다. 그녀는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했다. 나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난공불락의 산성을 함락시킬 장수가 된 기분으로 귓속말했다.

    “솔직히 아니꼬웠잖아. 파이몬이 만날 너한테 만년 꼬맹이라고 놀리고 그랬다며? 가슴으로 빨래하는 빨래판 마왕이라고 비웃었다며? 너 자존심도 안 상하냐? 이대로 파이몬을 내버려두면, 응? 맨날 마계 사람들이 파이몬이랑 너랑 비교하고 그럴 텐데.”

    “으으…….”

    “세상 사람들한테 보여주자 이거야.”

    내가 상냥하게 바르바토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슴은 크다고 좋은 게 아니야. 작은 여자이기에, 아니 작은 여자일수록 아름다운 매력이 있어. 무지몽매한 군중은 그 진리를 외면하고 있지. 바르바토스. 네가 파이몬을 처참하게 패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기회는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안 그래? 네가 나 말고 다른 남자와 또 언제 떡을 치게 되겠어?”

    “하지만……내가 파이몬과 똑같은 남자를 돌려먹기는 싫어.”

    목소리가 약해졌다. 이건 거의 함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러짖었다. 바르바토스에겐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었다. 쭉쭉빵빵한 미녀가 가득한 마왕군에서 자기 혼자 체구가 작았다. 나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린 것이었다.

    “이보전진, 아니 백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야. 파이몬을 물리치는 전쟁이다. 약간의 손해 따위는 감당해야만 해. 당연하지 않냐.”

    “이, 멍청아……파이몬이……너랑 잘 거라는 보장은 어디 있는데? 시트리는? 가미긴은?”

    바르바토스가 울상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빨을 꽉 물고 참는 것이 꽤 귀여웠다.

    “미안. 네가 마음 상할까봐 말하지 않았어.”

    내가 눈빛을 진지하게 가다듬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파이몬이 나한테 두 번 정도 추파를 던진 적이 있어.”

    “뭐……?”

    “이미 시트리는 나를 좋아해. 가미긴은, 뭐. 저번에 보니까 조금만 꼬시면 바로 넘어올 것 같던데.”

    바르바토스의 낯빛이 아연해졌다.

    “구, 구라 까지 마! 파이몬이 왜 너 따위를 좋아하냐!?”

    “진짜야. 걔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려줄까? 너, 파이몬이랑 옛날에 사귀었다면서.”

    “…….”

    바르바토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얘기했다며. 너와 파이몬이 만약에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어떤 남자일지 무척 궁금하다고. 설마 너랑 똑같은 남자를 마음에 두게 될지 정말 몰랐다면서, 파이몬 걔가 말하던데?”

    “으, 으……!?”

    체크메이트다, 바르바토스.

    내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르바토스. 나 한번 밀어줘봐. 내가 널 최고의 여마왕으로 올려줄게. 내가 누구야? 단탈리안이야. 검은 산맥을 뚫고 합스부르크 홀라당 태워먹은 양반이야. 나 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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