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19화 (219/510)

00219 D급 모험대  =========================================================================

오, 보스전이 발생하니 따로 알림창이 떴다. 그뿐만이 아니라 『警告!』 하고 경고창이 새빨간 색깔로 떠오르면서 요란하게 껌뻑거렸다. 긴박감을 연출하려는 것인가.

어슴푸레한 동굴의 공동. 단탈리안이 머무르는 마왕방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목에서, 일찍이 공작가의 영애였던 소녀와 스무 명의 모험자가 서로 마주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불안해야 하는 쪽은 소녀이겠지. 하지만…….

“으, 으으…….”

모험자들이 이빨을 악 물고 소녀를 노려보았다.

시선에서 긴장과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두개골을 수집하는 악취미, 방금 전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대검. 그것들이 모험자들의 사기를 낮추고 있었다. 반면에 소녀는 태연자약하고 여유로웠다. 여자아이 한 명에게 성인남성 스무 명이 기세에서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파비안이 이죽거렸다.

“하지만, 설마 공작가의 영애 정도나 되는 아가씨가 마왕에게 가랑이를 벌리다니. 세상사도 요 지경이군.”

“……?”

라우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자 파비안이 낄낄 웃었다.

“방금 거기 그림자에서 나온 마물 말이야. 아가씨 것이 아니지? 보나마나 단탈리안인가 뭔가 하는 새끼가 내려준 포상이겠지. 대단하군, 아가씨. 얼마나 아양을 떨어댔지? 밤기술이 대단한가봐. 마왕을 녹일 정도이니.”

“…….”

“하긴 얼굴은 반반해. 대갈통에 든 정신은 썩어 문드러져 똥냄새가 나지만 말이야.”

라우라를 도발할 생각인가. 확실히 냉정한 병사만큼 두려운 적은 없다. 상대방의 머리를 뜨겁게 달구어서 오판하게 유도하는 것이 정석이다.

“마왕의 좆탱이는 맛이 좋던가? 온 대륙이 마왕군과 싸우느라 축나는 와중에 네 년 혼자서 떡을 치니까 좋더냐? 네 년한테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었다면 마왕을 암살하려 들었겠지. 적어도 혀를 깨물어 자살할 수 있었을 거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단순한 창녀 새끼라는 얘기다!”

파비안이 비웃었다.

“우리가 쓰레기 인생이라면 네 년은 뭐냐? 인류의 배신자, 목숨만 살려주면 마왕이든 뭐든 아무한테나 씹을 팔아재끼는 년……그래, 쓰레기 이하의 쓰레기다. 적어도 우리는 마왕한테 후장을 대지는 않아.”

“…….”

라우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화났다는 걸 알았다. 라우라는 화나면 조용해지는 타입이었다.

도발은 나쁘지 않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제일 견디기 힘든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가?”

“? 무슨 헛소리냐.”

“자기 주제를 모르고 짖어대는 돼지이다.”

라우라가 천천히 왼손을 들어올렸다.

“다섯 명은 살려주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모험자들이 서둘러 방패를 들어올렸다. 무슨 공격이 온다, 그렇게 직감한 것이었다. 하지만 몇 초가 흘러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파비안이 히죽 웃었다.

“어차피 네 년은 여기서 끝이다. 허장성세도 정도껏…….”

사방에서 기묘한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수십, 수백의 발걸음이 동굴바닥을 타고 울렸다. 몬스터 특유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작게 메아리를 치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뭐, 뭐야!?”

모험자들이 정신없이 주위를 쳐다보았다. 고블린, 수없이 많은 고블린이 통로들에서 기어나오고 있었다. 눈치 빠른 모험자는 자기가 함정에 걸렸음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도망치기 위해 몸을 돌렸다.

─ 케르르륵.

─ 키륵, 키르르.

하지만 실패했다. 그들이 지나쳐온 통로에서도 고블린 무리가 밀려오고 있었다. 모험자들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쳤다.

“……어, 으?”

마치 콜로세움의 관중처럼 고블린들이 원형으로 모험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한 겹, 두 겹, 이윽고 대여섯 겹의 고블린 장벽이 생겨났다. 겨우 스무 명에 불과한 모험대로 돌파하기란 한없이 불가능하겠지.

고블린들은 이상하게도 얌전했다. 백오십 명의 모험자를 참살시킨 것이었다. 이곳에 모인 몬스터 전원이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위엄에 굴복하고 있었다. 짐승의 본능에 취하여 제멋대로 달려드는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었다. 지금, 소녀의 군권은 확실하게 성립되었다.

“빌어먹을.”

“시발, 뭐야……이게 뭐냐고.”

일찍이 마왕 이외에 몬스터들 위에 여기까지 군림한 인간은 없겠지.

모험자들은 욕지거리 이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욕도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아예 얼어붙어서 무기를 떨어트려버린 사람마저 있었다.

“후.”

웃음소리가 들렸다.

“후후, 쿠쿡…….”

몬스터로 이루어진 장성 너머에서 라우라가 웃고 있었다. 평소처럼 상냥하고 따스한 웃음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오로지 상대를 모욕하고 능욕하기 위하여 전사들이 머금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 웃음이 묘하게 낯익다고 생각했다.

“소녀의 삶이 여기서 끝이라고? 벌써 종막을 맞이한다고?”

라우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웃음기가 증발하고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웃기지 마라, 쓰레기! 소녀가, 마왕 단탈리안의 대리장군인 소녀가, 네놈들에게 사냥당할까보냐!”

그녀는 작은 몸집에 비해 놀랍도록 큰 목소리를 터트렸다. 사자후에 모험자들이 움찔거렸다.

“네놈들이 사냥하는 것이 아니다. 아아, 다른 마왕성에서는 그랬을지 몰라도 이곳에서만큼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여기는 바로 네놈들 같은 쓰레기들을 도륙하기 위해 지어진 사냥터. 소녀가 쓰레기 따위에게 사냥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라우라가 칼날을 바로세웠다.

“네놈들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뼛속까지 각인시켜주마. 포상금에 눈이 멀어 감히 창끝을 들이댄 모험자들이여, 너희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여기서 살육된다.”

한 모험자가 무릎이 풀렸는지 땅바닥에 쓰러졌다. 아니, 일부러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우, 사, 살려주십쇼! 용서해주십시오!”

“네 녀석!? 일어서, 당장 일어서라!”

파비안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어차피 임시적으로 대장을 맡았을 뿐인 파비안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제력을 발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오히려 한 사람이 무릎을 꿇자 다른 모험자들도 속속들이 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했다.

“요, 용서해주십시오!”

“탐욕에……소인이, 탐욕에 정신이 나갔습니다!”

그들은 모든 무기를 놓아버렸다. 방패고 창이고 떨어지면서 요란하게 쇳소리를 냈다.

모험대의 사기는 완전히 붕괴했다. 어느새 오직 세 명. 파비안과 제레미 그리고 나만이 동굴에서 무릎을 펴고 일어서 있었다.

“이제야 눈높이가 맞는군.”

라우라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파비안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개새끼가 눈에 보인다만.”

“…….”

파비안이 서서히 무릎을 굽혔다. 얼굴이 치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은 제레미와 나뿐이었다. 모험자들이 용서를 구하면서 이쪽을 힐끔거렸다. 그들은 시선으로 맹렬하게 질책하고 있었다. 얼른 꿇지 않고 뭐하는 거냐! 우리를 전부 죽여버릴 셈이냐! 하고.

혹여라도 나 때문에 라우라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두려운 것이었다.

“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라우라도 제법 하지 않는가.

재능은 있어도 이런 심리전에서는 아직 미숙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런. 역시 나에게는 사람을 보는 눈이 일천했다. 사자는 어려서도 사자였다. 그 철혈재상 라우라 데 파르네세, 용사 앞에서도 꿋꿋하게 턱끝을 들어올린 여장부가 한낱 D급 모험대 따위를 압도하지 못할 리 없었다.

나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정면. 라우라를 향해 일직선이었다.

“저, 저런 미친놈!”

“개자식, 뭐하는 짓거리야!”

등 뒤로 경악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마치 모세를 맞이한 홍해처럼 양옆으로 고블린들이 스르르 갈라지자, 경악은 의문으로 바뀌었다. 어? 어? 하고 모험자들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나는 라우라 앞에 가서 멈추었다.

라우라가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칭찬해주기를 바라는 애완견 같았다. 나는 무심코 그녀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했습니다, 라우라.”

“음. 별 것 아니었다.”

라우라가 다소곳하게 말했다. 사실 말투만 다소곳했지 목소리에서 ‘나 잘했지! 나 잘했지!?’ 하는 진심이 술술 풍겨나오고 있었다. 라우라는 이런 면에서 영락없이 꼬맹이였다. 어쩌면 나를 주군이라기보다 일종의 아버지로 여기는 걸지도 모르겠다.

“주군이야말로 고생했다. 모험자들에게 수준을 맞춰주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아아, 이쪽이야말로 별 것 아니었습니다. 의외로 재밌었어요?”

옛날 인간이었을 무렵처럼 모험자 플레이어가 된 것 같아서 두근거렸다. 베타 테스트를 뛴 보람도 충분했다.

“그나저나 라우라, 제가 없을 때는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요. 심리전도 능숙하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바르바토스가 와도 맞먹을 것 같습니다.”

“후후, 과찬이다. 소녀는 주군을 보고 배웠을 뿐이다.”

우리가 함께 키득거렸다.

“저런. 누가 들으면 크게 오해할 소리를. 저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실하여서 두개골을 수집하는 취미 따위 없습니다.”

“애당초 주군은 조금 더 마왕스러워질 필요가 있다. 이건 실익을 겸비한 취미이다. 마왕방 앞에 두개골이 수천 개씩 쌓였다고 상상해봐라. 적군의 사기를 깎는 데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사기를 저하시킨다라. 과연, 그런 의미도 있습니까…….”

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광경을 뒤에서 모험자들은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참, 주군. 여성 모험자들은 별도로 포획해서 묶어놓았다.”

“응? 그런 귀찮은 일을 왜 했습니까?”

“성욕을 풀고 싶을 때 자유롭게 쓰라는 배려이다.”

에엑, 하고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성노예입니까? 라우라가 있는데 그런 게 왜 필요합니까?”

“소녀가 견디기 힘들어서 그렇다, 사시사철 발정기인 나의 주군이시여.”

라우라가 내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소녀는 라피스 언니가 조금은 담당해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웬걸, 몇 달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지 않은가. 내일부터 주군이 어떻게 할지 눈에 선하다. 프랑크에서 여독이 쌓였으니 뭐니 하며 소녀를 질리도록 범할 생각이겠지?”

“…….”

얘는 관심법을 쓰는 게 분명했다.

프랑크에서 도착하자마자 라우라의 권위와 마을의 전통, 두 개를 양립시려고 돌아다녔다. 솔직히 너무 열심히 일했다. 이번에 모험대만 격퇴하면 ‘저 덕분에 라우라의 체면이 살았습니다. 저는 보답을 바랍니다!’ 하고 라우라한테 앵겨붙을 생각이었는데……!

라우라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자기 덕택에 마을 건이 무사히 넘어갔다면서, 이 은혜를 몸으로 갚으라는 식으로 말하겠지. 뻔하다.”

“크윽……!”

전부 알아차리고 있었는가! 이래서 천재란 짜증난다!

큰일이었다. 여성 모험자가 예쁘면 얼마나 예쁘겠는가? 험악하게 던전에서 뒹구느라 남자처럼 터프한 애들이었다. 라우라의 빛나는 미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나는 서둘러 변명에 들어갔다.

“라우라, 저는 그저 성욕에 고픈 짐승이 아닙니다. 제 상대가 라우라니까 흥분하는 거예요. 저에게도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있어요. 라우라가 아니면 안기 싫습니다.”

“흐응? 주군이 그리 말씀해주니 기쁘군. 허나, 소녀한테 달콤하게 구애하는 것치고는 프랑크에서 꽤 화려하게 놀아난 것 같지 않은가.”

라우라가 입끝을 들어올렸다.

“주군, 듣자하니 오페라에서 제법 재밌게 놀았다던데.”

“제레미이이이!”

나는 바로 옆에 서 있는 제레미를 향해 소리 질렀다. 도대체 언제 까발린 것인가!

제레미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머나. 저는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네 년 아니면 여기서 누가 그걸 알고 있다고!”

“글쎄요. 단탈리안 님의 양심이 몰래 속삭여준 것 아닐까요? 만약 단탈리안 님께 양심이란 게 남아 있다면 말이에요.”

제레미가 깔깔 웃었다. 제기랄, 세상에 믿을 신하 한 명 없었다.

라우라가 말했다.

“결국 주군은 얼굴만 반반하면 아무나 붙잡고 박아댈 수 있다. 걱정하지 마라. 소녀도 보는 눈이 있다. 특별히 미모가 괜찮은 여자 모험자들만 살려두었으니, 주군의 하반신도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저는……그게 아니라…….”

“더 이상 변명할 필요없다. 소녀는 전부 이해한다.”

라우라가 나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중년의 아저씨나 지을 법한 미소였다. 이제 열여덟 살이 될 소녀한테 성생활을 위로받는 내가 그곳에 있었다…….

“뭐, 냐……!”

그때 모험자들이 무릎 꿇은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웃기지 마! 도대체 뭐냔 말이다……!”

파비안이었다. 그는 방패와 검을 꾹 잡고 몸을 일으켰다. 파비안의 두 눈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주군? 단탈리안? ……네 녀석이, 네가 마왕 단탈리안이었다는 거냐!”

“오. 바로 그렇습니다, 파비안 씨.”

내가 히죽 웃으면서 손뼉을 쳤다.

“제가 바로 전 마왕군 서열 제71위. 이면(異面)의 마왕. 월맹군 최고 참모이자 평원파의 간부. 혹은 소수의 마왕들이 별명으로 부르기를 '절름걸이', '능욕하는 자', '브루노의 학살자'. 마왕 단탈리안입니다.”

모험자들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아. 여러분은 정말 잘해주셨어요. 물론 5,000골드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어쩌면 이렇게 예상대로 움직여주시는지! 감사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프랑크에서 당한 울분이 깔끔하게 씻겨졌습니다!”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아니, 정말 진심으로 고마웠다. 앙리에타 여왕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가 한번에 해소되었다.

내 웃음소리에 감염되었는지 라우라와 제레미도 따라서 웃었다. 우리 세 명은 서로가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더 크게 웃어재꼈다. 모험자들은 다만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쳐다보는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크흐. 여러분께서 저희한테 이렇게 헌신해주셨으니 보답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라우라, 여자 모험자들을 성노예로 삼는 데 동의하겠습니다. 그 대신 이들에 대한 처분을 저한테 맡겨주지 않겠습니까?”

“흐으음.”

내가 아무리 주군이라도 이번 전투의 최대 공로자는 그녀였다. 당연히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라우라는 잠시 고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소녀와 주군을 모욕한 저들에게는 끔찍한 처벌이 주어져야 마땅하지만, 주군이 그리 말씀하니 받아들이겠다.”

“오오, 고맙습니다.”

내가 모험자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자아, 여러분. 살아남고 싶으시지요?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깡패짓을 하고 다니는 여러분이지만, 살고자 하는 욕망은 귀족이든 왕이든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욕망을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여러분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기회?”

“예. 이곳에서 살아서 도망칠 기회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솔직히 몇 시간이나마 같이 움직인 동료 아닙니까? 제가 또 인간의 정이란 것에 약해서.”

파비안이 묻는 말에 내가 대답했다. 모험자들의 눈빛에 초조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벌써부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무얼,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라. 이쪽은 아직 할 말이 남았다.

“여러분은 서로 죽여주셔야겠습니다.”

“뭐……?”

“결투입니다. 검투사 모릅니까? 마지막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십시오. 마지막에 생존한 인간에 대해서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내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자, 시작하십시오.”

실로 나는 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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