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16화 (216/510)

00216 D급 모험대  =========================================================================

나는 담배연기를 올려다보았다.

“행복한 인간들의 모습이란 대체로 비슷하나, 불행한 인간들은 제각기 천차만별이다……어느 현자가 그렇게 말했다지.”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저 머리에 떠올랐을 뿐이다. 수 년 전에 보고 여태껏 한번도 떠오른 적 없는 구절인데 말이지. 사람의 기억은 오묘한 물건이로군.”

언제였던가. 대학교 1학년 때 교양수업에서 들었던가. 고작 몇 년 전에 불과한데, 어째서인지 까마득하게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분명히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라는 작품의 첫 부분에 써둔 구절이었다. 그때는 아무런 감명 없이 읽고 넘어갔던, 흰 종이에 까만 글씨에 불과했을 문장이었는데 왜 지금 떠올랐을까.

내 주변에 어디가 꼭 하나씩 부러진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겠지.

마족과 인간의 혼혈인 라피스, 가문에서 노예로 팔아넘겨진 라우라, 어린 시절부터 암살자의 삶을 강요받은 제레미……아버지가 죽고 억지로 촌장이 되어버린 파르시까지. 나의 가신(家臣)이라 불릴 만한 애들은 전부 꼬락서니가 이러했다.

파르시는 촌장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다. 제레미는 물론이고, 라우라 역시 자발적으로 성노예가 되지 않았다. 라피스도 어디 혼혈로 태어나기를 원했겠는가. 그들은 모두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불행해지도록 강요받았다.

불합리하지 않은가.

“…….”

파르시의 집에서 그날밤을 지새웠다. 나는 며칠이고 잠을 자지 않아도 문제가 없으므로, 창가에 앉아 담배를 뻐끔거리며 생각했다.

‘자신이 잘못했기에 불행해진다. 이것은 괜찮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뉘우칠 수도 있고, 반성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예비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행복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불행해진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뉘우칠 것도 없고 용서를 구할 것도 없다. 잘못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세상이다.

즉, 그들에게는 세상에 복수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불합리하게 불행을 강요받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세상에 불합리함을 강요할 차례이다. 우리는 근본부터 악의로 뭉친 작자이며, 다름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악의를 허락받았다.

나는 마왕이다. 왕은 신민의 염원을 대행하는 자. 마왕으로서 나는 가신들의 복수를 대행해준다.

무차별적인 복수를.

‘바르바토스, 그게 나의 왕도(王道)이다.’

모든 마족의 염원을 이루어주겠다는 네 왕도에 비해서는 한없이 더럽겠지. 그래도 우리에게는 그런 방법밖에 없다. 너라면 이해해줄까, 긍지 높은 소녀여.

밤이 조용하게 흘러갔다.

*  *  *

“여어, 형씨. 간밤에는 잘 잤는가?”

다음날 아침에 파비안과 합류했다. 마을 입구에는 파비안뿐만 아니라 스무 명의 모험자들이 시끌벅적하게 요란을 떨고 있었다. 그들 모두 단탈리안 마왕성에 쳐들어가려고 도시에서 온 모험대였다.

“다행히 잘 곳을 구했습니다. 파비안 씨는 잘 주무셨습니까?”

“젠장, 숙박비를 왕창 주었는데도 마굿간에서 잤네. 여기 마을사람들은 일단 모험자라면 이빨부터 갈고 있더구만.”

파비안이 대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새 짚단을 이불로 얻었지. 그럭저럭 괜찮았어. 구름을 이불로 삼아 잠드는 것보다야 훨씬 더 낫지,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그런데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군요. 무슨 약속이라도 잡힌 겁니까?”

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파비안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형씨는 규모가 큰 모험에 가담해본 적이 없는가?”

“예. 주로 5인 모험대와 10인 모험대를 짜서 다녔습니다.”

“아하, 그렇군. 그럼 첫경험인가.”

파비안이 능글맞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것일세. 백 명 이상의 모험자가 모였을 경우에 어떻게 되는지 한번 봐보게나.”

잠시 뒤, 누가 뭐라고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수십 명의 모험자가 움직였다. 한 모험대가 앞장서서 나가자 다른 이들이 천천히 뒤따랐다. 나는 제레미와 고대제국어로 잡담을 나누면서 걸어갔다.

그런데 이런 광경은 우리가 머문 마을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왕성에 가까워질수록 왼쪽 오른쪽에 우리들처럼 수십 명 단위의 모험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리들이 모이자 모험자의 숫자는 스무 명에서 단숨에 쉰 명, 백 명으로 불어났다.

“호오.”

이윽고 던전 입구에 도착하자 모험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얼핏 어림잡아도 백오십 명은 되지 않을까? 진풍경에 내가 놀라워하자 옆에서 파비안이 말했다.

“이번처럼 모험대가 왕창 모이면 말이지, 일정한 시간대에 모여서 함께 들어간다네. 딱히 약속하고 모이는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불문율처럼 되어 있지.”

“왜 그렇습니까?”

“혼자 들어갔을 때보다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거든.”

파비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왕성에 무슨 마물이 살고 함정이 있는지 모르잖는가. 나 대신 다른 모험대가 함정에 걸려주기를 기대하는 것이지. 뭐, 솔직히 말해서 희생양일세.”

과연.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다.

정예군처럼 통일된 움직임을 기대하진 않는다. 단지 다른 인간이 미끼가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득이다. 게임에는 주인공 일행 위주의 소규모 모험대밖에 등장하지 않아서 몰랐다.

“먼저 들어갈수록 불리하지 않습니까? 누구나 나중에 들어가려고 할 것 같습니다만.”

“껄껄. 맞는 말이지만, 나중에 들어가면 그만큼 경쟁에서 뒤떨어지게 돼.”

빨리 들어가면 위험부담이 크다. 대신에 보상도 있다. 그런 얘기인가.

“마왕성에는 마나가 넘쳐흐르지. 그런 마나를 섭취하며 살아가는 마물……가죽은 질기고 탄탄하여 상인한테 팔아넘기고, 뼈는 마법길드에 팔아넘길 수 있어. 전부 돈일세.”

“많이 벌고 싶다면 먼저 마왕성에 들어가되, 안전을 우선한다면 뒤늦게 들어가라…….”

파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적으로 실력에 자신이 있는 무리가 제일 먼저 들어가기 마련이야. 자존심 싸움도 걸려 있다구? 어느 모험대가 다른 무리보다 빠르게 들어갔다, 혹은 다른 무리보다 뒤쳐졌다. 그런 소문은 곧바로 모험대의 평판으로 직결되네. 저것 봐.”

파비안이 던전 입구를 가리켰다. 그곳에 어중이떠중이와 확연하게 구별되는 모험자들이 서 있었다. 어떤 이는 질 높은 가죽갑옷을 입었다. 가슴에 사슬갑옷까지 착용한 사람도 있었다. 최소한 D급 모험대이겠지.

그들은 서로 눈싸움을 벌이며 몸을 들썩거렸다.

“돌풍의 데르달루스, 미친년 미리엘, 독사마귀 디트하르트……근방에 이름 깨나 날리는 양반은 죄다 모였군. 전쟁질하러 빠져나간 애들 제외하면 그나마 쓸 만한 녀석들이지. 흠, 저 놈들 사이에 앙금이 쌓여도 보통 쌓인 게 아닐 텐데.”

아직 칼부림이 나지 않은 게 신기한걸, 하고 파비안이 태평하게 말했다.

“뭐, 곧 있으면 결판이 날 걸세.”

그가 말한 대로였다. 덩치가 산처럼 거대한 모험자가 발을 움직였다. 그를 뒤따라 일단의 모험대가 차례차례 마왕성 입구로 들어갔다. 그러자 신경전을 벌이던 모험자가 고개를 홱 돌려서 소리쳤다.

“우리도 출발한다!”

“정신 바싹 차려!”

한 명이 첫타자를 끊자 다음은 우르르 몰려갔다. 전방의 탐색꾼을 맡은 모험자들――보통 숲지기나 산지기, 즉 사냥꾼 출신이 맡는다――이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미리 협조를 구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적당히 타협하여 마치 탐색부대처럼 함께 움직였다.

파비안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코를 씰룩거렸다.

“흥. 데르달루스 녀석, 몸이 아주 달아올랐군. 저놈이 제일 먼저 죽을 줄 알았다니까.”

“꼭 죽으라는 보장은 없지요.”

“아아. 하지만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지. 안 그런가?”

파비안이 껄껄 웃었다. 우리 역시 인파에 떠밀려서 마왕성으로 들어갔다.

바깥의 햇빛과 다르게 던전 안쪽은 마나를 머금은 마광석(魔光石)들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혹시나 던전이 어두울까봐 횃불을 챙겨온 모험자들은 머쓱하게 되었다. 파비안도 횃불을 챙기고 있었는데,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거, 기대한 것보다 마나가 풍족한걸. 적어도 횃불이 부족해서 돌아가는 일은 없겠어.”

“좋은 일입니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네. 장점은 물론 빌어먹을 횃불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야, 씨발 새끼야! 거리 확보 안 해!?”

파비안이 설명하다가 뒤쪽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 뒤를 바싹 쫓아오던 모험자 무리가 맞받아쳤다. 파비안과 그들은 한동안 쌍욕을 주고받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거리를 벌렸다.

“으이구. 너무 몰려 있으면 칼 휘두를 공간도 없어서 떼죽음이야, 떼죽음. 하여간 애송이들이 마음만 조급해서는……음, 어디까지 말했더라?”

“마왕성에 마나가 풍족할 경우 어떤 단점이 있는지.”

“아, 그래. 단점. 그거야 간단하지.”

파비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나가 풍족하면 풍족할수록 마물들이 많이 살지. 당연하지만 말일세. 우리 입장에서야 돈이 되는 사냥감이 넘쳐단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달리 말하자면, 반대로 우리쪽이 사냥감으로 전락할 수도 있겠군요.”

“바로 그거야.”

파비안이 씩 웃었다.

그때 전방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쇳소리와 고함이 동굴벽에 부딪혀서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고블린이다!” 하고 소리쳤다. 먼저 들어간 무리가 처음으로 마물과 조우한 것 같았다.

소동은 금세 멎었다. 모험자들이 가볍게 고블린을 퇴치한 모양이었다.

“별로 대단한 마물은 아니로군. 도망치자고 소리치는 녀석이 없어. 뭐, 아직 초입이니 당연하지만. 느낌이 좋군.”

그런 느낌으로 십 분 정도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험대 무리가 줄어들었다. 몬스터에게 당한 것이 아니었다. 던전에서 갈림길이 나온 것이었다. 통로가 세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모험대들은 각자가 바라는 대로 왼쪽이나 오른쪽, 또는 중앙을 골라잡아 뿔뿔이 흩어졌다.

“……흐음.”

파비안이 갈래길 앞에서 멈추었다. 고민해도 소용없음을 깨달았을까. 파비안은 비교적 많은 모험대가 선택한 오른쪽 길로 빠져나갔다.

잠시 뒤에 또 갈래길이 나왔다. 이번에는 갈래가 두 개였다. 다시 갈래길이 나오자 모험자들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들은 몸집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했으나, 오십 명 이상의 사람이 몰려들어가기에는 통로가 좁아져 있었다.

“…….”

모험자들이 또 한 번 나뉘었다. 우리는 오른길에 들어갔다. 비교적 뒤늦게 출발한 우리 모험대는 앞서가던 사람이 사라짐으로써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십 분쯤을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모험자들이 완전히 멈춰섰다. 백오십 명에서 출발한 모험자들은 어느새 스무 명 가량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들은 한곳에 멈추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파비안이 중얼거렸다.

“……이건 조금 불안하군.”

그들 앞에는 다름 아니라 또 한번의 갈림길이 놓였다. 아까 전보다 조금 더 좁아진 통로로서.

여기서 두 쪽으로 갈라지면 스무 명이 열 명이 되어버린다. 평범한 소규모 모험대 수준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이다. 숫자로 인해서 자신감을 얻었던 모험자들이 그런 사태를 꺼려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다들 머뭇거리는 가운데 파비안이 모험자들에게 말했다.

“이보게들. 여기서는 힘을 합치는 게 어떤가? 조금 무리해서라도 한쪽 통로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네마는.”

모험자들도 불안했는지 파비안에게 동의했다. 사람들은 서로 간에 다소 간격을 두고 차례대로 오른쪽 통로에 들어갔다.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이것이 내 새로운 마왕성의 '베타 테스트'임을 전혀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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