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15화 (215/510)
  • 00215 D급 모험대  =========================================================================

    여섯 마을의 촌장 중에서 파르시만은 내 계획을 알고 있었다.

    먼저 모험대들을 잔뜩 불러모은다. 외지에서 온 깡패들은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고 난동을 부린다. 자경단원이 부족한 마을들로서는 불합리한 행패에도 견뎌야 한다.

    자기들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주민들은 누가 과연 우리를 도울 수 있는가 살펴본다. 그리고 영주, 마왕 단탈리안에게 손을 벌려야 한다고 깨닫는다.

    “촌장들이 자네한테 뭐라 말하던가?”

    “말도 하지 마쇼. 마왕 전하께 말씀드려보라, 안 된다고 대답하면 어디 부탁이라도 해봐라……으이구. 지겨워서 혼났소.”

    파르시가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눈가에서 피곤한 기색이 줄줄 묻어나왔다.

    대외적으로 파르시는 내 측근이라 알려져 있었다. 장수를 쓰러트리려면 먼저 말을 쏘라고, 촌장들은 파르시에게 먼저 득달같이 달려든 것이었다. 어디 촌장뿐이었겠는가.

    각 마을에서 행사 깨나 하신다는 지주――물론 이들은 모험대에겐 최고의 봉으로 보이기 마련이었고, 가장 많이 약탈당하고 있었다――들이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멀다며 파르시의 집을 들락거렸고, 일반 주민들도 우리 마왕 전하께 제발 말씀 좀 전해달라고 상청했다.

    “아, 나도 별 도리가 없다 계속 말하는데도 귓구녕을 똥구녕으로 알아듣지 않겠소?”

    “그래. 네가 고생이 많구나.”

    어쩌냐? 앞으로는 더 빡세게 고생할 것 같은걸.

    내가 말이야, 네 녀석 고생하는 것 조금 덜어준답시고 프랑크에서 인재들을 카드 뽑듯이 화끈하게 발탁하려 했는데…… 앙리에타한테 처참히 발리는 바람에 걔네 근처에도 못 간단다. 하하. 인재등용이 막 게임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더라고.

    그래도 내가 아예 못난이는 아니다. 키워먹을 녀석들은 데려왔다.

    “이번에 내가 데려온 데이지와 루크는 만나보았느냐?”

    “……꼬맹이 남매 말이우? 그야 직접 부모한테 데려다줬으니 알지.”

    “마을에서 공동회의가 열리는 날이면 걔네를 대동해라.”

    데이지는 물론이고 루트도 머리가 좋았다. 한 달 정도 제레미가 가정교사가 되어 가르쳤을 뿐인데 프랑크어 문자를 익혔고, 고대제국어에도 훌륭하게 입문했다. 조만간 합스부르크어에도 능통하겠지.

    하지만 파르시는 미덥지 못한 눈치였다.

    “얼라를 데리고 뭘 하라는 얘기요?”

    “그 녀석들을 집사와 시종으로 키워볼 요량이다. 나를 대신해서 마을들과 접혹하게 되겠지.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마을의 생리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흐음.”

    뭐 전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하고 파르시가 말했다.

    “헌데 그 남매에서 여동생인 아해가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더이다. 내 참, 이런 얘기를 전하께 해도 되는지 모르겠소만소.”

    “음? 무슨 일이 있었냐.”

    “걔네를 우리집에서 하룻밤 재웠수다. 야밤에 똥이 마려운지 사내아이가 바깥에 나가는 것 아니겠소? 소인은 잠에서 깼수다. 원래 밤잠이 얕아서 누가 좀만 움직이면 바로 깨거든.”

    파르시가 눈쌀을 찌푸렸다.

    “그런데 묘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아니겠소? 처음에는 잠결에 귀신소리가 들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우. 귀 기울여서 자알 들어보니까 이게 여자애가 누운 쪽에서 들려오고 있거든. 글쎄, 깜짝 놀랐지 뭐요. 어린 년이 자위를 하고 있었소!”

    “…….”

    나는 침묵했다. 이마에서 땀이 삐질 흘렀다.

    “자, 잘못 들었겠지.”

    “내 귀가 제아무리 병신이어도 자위질하는 소리를 헷갈릴까봐? 어우, 하여간 아직 보지에 털도 안 났을 것이 시덥지않게 색기는 있어 가지고 숨결을 하아하아 내뱉는데……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어디 손님집에서 그딴 짓거리를 하는지, 원.”

    파르시가 혀를 찼다.

    “전하께서 아해들을 키우신다니 말씀드리는 거요. 그거 때문에 소인이 선입견이 생겨버렸으니까. 언제 전하가 한번 단단하게 예의범절을 교육시켜주시면 감사하겠수다. 그런 변태짓을 내버려둘 수야 없지 않소외까?”

    “……아아. 네 말이 맞다. 단단히 일러두마.”

    녀석에게 변태짓을 교육시키고 강요시킨 장본인이 바로 나다, 파르시여.

    그나저나 루크, 그놈이 문제로군! 야밤에 밖에 나가서 수음까지 하는 걸 보건대, 슬라임 오나홀에 빠져도 단단히 빠진 것이 분명하다. 열한 살 소년은 슬라임의 촉감에 반해버린 것이었다. 오나홀에 새겨진 주름과 주름이 사실은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오빠의 왕성한 성욕 때문에 졸지에 변태로 오해받은 데이지한테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물론 마음 속으로만.

    “그럼 촌장들에게 슬슬 회답을 돌려줄 때가 되었겠군.”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파르시는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발정 걸린 숫말처럼 거시기가 탱탱 불어오른 격이니 전하께서 당장이라도 일로 모이라 하시면 모일 것이오.”

    “나의 입장은 명확하고 간결하다. 법령(法令)을 받아들이라.”

    마을들과 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본질적으로 하나뿐이었다.

    몬스터로부터 마을들을 지켜줄 테니 나를 통치자로 인정하라.

    영주인 나는 고블린 등의 몬스터를 통제할 의무가 생긴다. 영주민인 마을사람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의무, 개간을 신고할 의무 등이 생긴다.

    ――계약의 어느 부분에도 ‘인간들로부터 마을을 지켜주겠다’라는 구절은 없다.

    모험대가 방약무인하게 마을을 휘젓는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모험자는 몬스터가 아니다. 몬스터가 아닌 인간종이 마을을 약탈하든, 방화하든, 심지어 학살하든, 마왕 단탈리안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내가 말했다.

    “정확하게 전달하라. 이번 사태는 계약 이외의 사항이라고. 마왕이란 본디 마물을 다스리는 자, 마물이 아닌 인간종의 침입을 어찌 통제하겠는고. 인간의 일은 인간인 그대들이 알아서 해야 할 터.”

    그렇지 않아도 마을들은 두 번이나 나를 배신했다.

    첫 번째, 리프의 모험대가 들이닥쳤을 무렵. 이때 배신하지 않고 내 편에 붙은 마을만이 생존했다. 그들은 내가 배신자한테 어떻게 보복하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행여라도 이번 사태에 직면하여 ‘차라리 모험대와 합심해서 마왕성의 재화를 나눠갖자!’라는 주장은 나오지 않으리라.

    두 번째, 촌장들이 제멋대로 세금을 착복했을 무렵. 나는 이것을 관대하게 용서해주고 넘어갔다. 마을사람들도 그걸 이해하고 있었다. 염치가 있으면 차마 ‘공짜로 모험대를 쫓아내주십시오’ 하고 말하지 못하겠지.

    나와 영지민 사이에 남은 해결책은 딱 하나. 비즈니스 거래뿐이었다.

    “만약 그대들이 인간의 일 또한 본인에게 맡기겠다 한다면……본인 역시 왕이 된 자로서 왕의 방식으로 그대들을 통치해야 마땅하다. 율법에 충실하라. 법률을 어겼을 경우에는 다른 마을에 가서 원로들의 재판을 받으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완전무결한 보호를 보장해주는 대가이다.”

    파르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대로 전하겠소, 나으리.”

    이곳 농민들은 보수적이므로 새로운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농민들이 새로운 정책을 '대가성이 있는 거래품목'으로 간주하도록 유도했다. 단지 재판을 다른 마을에서 받는다고 약속하면 어머나, 자그마치 마왕 전하께서 보호를 약속해주신다고 한다. 이런 대박 거래가 다 있나!

    세금을 더 내라는 것도 아니다. 사병이 되어 충성하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문제거리가 생겼을 때 다른 마을의 유력자한테 재판을 받으면 그만이다……. 공짜나 다름없는 거래라고 생각하겠지.

    실상은 다르다. 마을주민은 자체적으로 사법권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당장 들이닥친 모험대의 횡포에 주민들이 사법권과 같은 정치학적 개념에 신경을 기울일 리 만무. 나는 보수성이라는 질병에다가 모험대라는 독을 극약처방한 것이었다.

    병이 낫는 도중에 영지민들은 재산을 약탈당한다. 아마 모험자에게 딸이 강간당한 집안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적군은 물론이고 나 자신의 영지민에게도 이 따위 극악무도한 수작을 부린다…….

    암군을 뛰어넘어 폭군. 아니, 간군(奸君)이라 표현해야 알맞겠지. 바르바토스는 나에게 군주가 되라고 말했거늘 나는 이런 방식의 통치법밖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파르시. 네놈도 꽤나 능글맞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요?”

    파르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연기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라도 좋았다. 어느 쪽이든 나는 파르시라는 인물을 좋아할 자신이 있었다. 전자라면 그 맹목적인 순진함에, 후자라면 맹수와 같은 야비함에. 둘 모두 내가 동경하는 면모였다.

    “모름지기 촌장이란 촌민의 재산과 법도를 지켜주어야 하는 자리 아니더냐. 그대는 본분을 망각하고 나에게 충성한 셈이다. 촌민에 대한 의무와 군주에 대한 충성, 그 사이에서 너는 후자를 선택했다. 어째서인가?”

    내가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촌민보다 내 쪽에 가치가 있다고 여겼느냐? 촌장이기 이전에 나의 총신이고자 했느냐?”

    “…….”

    “걱정하지 마라, 파르시. 나는 너를 질책하는 것이 아니야. 너는 항상 나에게 충실했다. 단지 궁금하다. 그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대의 본질이 무엇인지. 부디 솔직하게 말해다오.”

    파르시의 낯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 솔직히 마왕 전하에게 충성심 같은 것은 없소. 소인은 리프의 모험대에 붙지도 않았고, 촌장들이 지랄할 때 앞장서서 걔네를 처치했지. 꿀리는 게 하나도 없다는 소리요외다. 다만…….”

    “다만?”

    “예전에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 말이오.”

    나지막한 목소리. 청년인 것 같기도 하고, 장년인 것 같기도 하고, 노인인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기억나시오? 소인은 그때 아비를 잃어서 막 촌장이 되어버린 참이었수. 다른 지주가 촌장을 대행할 수도 있었는데 리프 그 새끼가 무서워서 시뻘겋게 어린 소인한테 떠맡겼소.”

    “아아, 기억한다.”

    파르시는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무례했다. 무례하지만 말에 조리가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면서도 결코 상대방인 나의 입장을 무시하지 않았다. 정치감각을 타고난 녀석이었다.

    “소인의 아비가 왜 죽었는지도 기억하시우?”

    “……리프가 자기 모험대에 협력하라고 말했는데 거부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 기억하고 있다마는.”

    “정확하외다.”

    파르시가 말했다.

    “사실은 좀 더 복잡하오. 내 아비는 아예 마을주민을 이끌고 리프 그놈을 습격하려고 했소. 음. 마을에 그놈이 들어오는 즉시 맞이하는 척하다 단번에 처치할 계획이었지.”

    “호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들만큼이나 호쾌한 양반이 아닌가.

    “예정대로 모험대는 마을 깊숙하게 들어왔소. 아비는 큰소리로 지시했지. 공격하라! 공격하라!”

    “훌륭하군. 어찌되었는가?”

    “아무 일도 없었소.”

    파르시가 낄낄 웃었다.

    “마을 놈들이 막상 모험대를 두 눈으로 보니까 겁을 먹어서 말이외다. 아비가 명령을 내렸는데도 움직이지 않았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지. 아비 혼자서 스무 명의 모험자 앞에서 꽥꽥 소리친 꼴이었수다.”

    “…….”

    “리프 그놈이 눈치 하나는 귀신처럼 빠르더이다.”

    상황을 파악한 리프는 곧바로 도끼를 휘둘렀다.

    촌민들이 배신한 것에 격앙한 파르시의 아비는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고, 도끼날에 머리가 장작처럼 쪼개졌다. 파르시는 그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파르시이기에. 촌장의 의무라는 것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있었겠지.

    “……그런가.”

    파르시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랬소.”

    나는 품속에서 담뱃대를 꺼내었다. 거기에 불을 지펴 파르시에게 건네주었다.

    파르시는 말없이 담뱃대를 받아서 한 모금 길게 내뿜었다. 조용한 공기가 우리 둘 사이에 흘러갔다. 그는 다시 나에게 담뱃대를 넘겨주었고, 나 역시 한 모금을 빨아 공기에 올려보냈다. 그것이 하늘에 있는 아버지께 공양하는 행위임을 파르시도 나도 알고 있었다.

    세상에 상처 하나 없는 인간은 없었다. 당연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가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파르시 또한 그랬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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