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14화 (214/510)
  • 00214 D급 모험대  =========================================================================

    파비안이 슬쩍 내 쪽을 쳐다보았다.

    “음. 이렇게 말하는 나도 쓸만한 놈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겠지. 나는 이 도시에서 황색의 모험자 자격증을 부여받았네. 언제든지 장부에서 확인해볼 수 있어.”

    너는 급수가 어느 정도이냐, 그런 눈짓이었다.

    노랑색 모험자란 대충 게임상에 D급으로 표현된다. 색깔이 없는 최하급(F급), 초록색(E급), 노랑색(D급), 주황색(C급), 붉은색(B급), 검은색(A급), 하얀색(S급). 여기서 절대다수의 모험자가 F급에서 E급에 속했다.

    “과연. 대단하시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랑색이라면 베테랑을 자처할 정도가 되었다.

    애당초 하얀색이나 검은색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몇 사람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기사단에 발탁되거나 최고급 용병단장으로 활약한다. 시궁창 인생인 모험자로 사느니 전직해버리는 것이다. 붉은색이면 그럴저럭 괜찮은 용병단의 단장이 된다.

    당연하다.

    암살자 같은 직업도 똑같다. 만약에 기사를 자유자재로 암살할 정도로 실력이 고강한 암살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 정도 인재가 왜 계속 암살자 따위를 하겠는가? 당장 떼려치울걸.

    어디 영주 밑에 들어가 기사가 되어 신세를 바꾸고 말 거다. 뭐, 제레미처럼 심장에 노예각인을 새겼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모험자가 모험자로서 찍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은……사실상 주황색. 즉, C급이다.

    파비안은 D급이므로 최고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뛰어난 모험자였다.

    내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저희들은 프랑크의 오를레앙에서 왔습니다. 그곳에서 황색 자격증을 얻었지요.”

    “허, 내가 인물을 제대로 보았군. 오를레앙이면 꽤나 큰 도시이지 않은가?”

    파비안이 감탄했다.

    똑같은 등급이어도 소도시보다 대도시에서 발급한 자격증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렇지만 파비안의 눈빛에는 감탄 이외에도 다른 기색, 우리의 말을 의심스러워하는 낌새가 들어 있었다.

    “이 먼 땅촌까지 오를레앙의 모험자가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알고 싶군. 앞으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눌지도 모르니까. 양해해주게.”

    “물론 이해합니다. 파비안 씨, 프랑크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아십니까?”

    “풍문으로 들었네.”

    파비안이 턱끝을 끄덕였다.

    “브르타뉴가 파리 일대를 점령하면서 오를레앙도 떨어졌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진즉에 불길한 냄새를 맡고 얼른 도망쳤지요. 전쟁통에 모험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징집대상 제1호이지. 아아, 그렇게 된 거로군.”

    파비안이 대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정한 정도 전투력이 보장되어 있는 모험자는 시장(市長) 입장에서 즉각 활용할 수 있는 병력이었다. 전투에서 공훈을 세우면 시민권을 주겠다느니 하는 사탕발림으로 강제징집을 해버리기 일쑤였다.

    “징집을 피해서 여기까지 왔구만. 끌끌.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검은 산맥이니, 도망치기엔 더없이 끝내주지.”

    “마침 저희가 튜튼어를 말할 줄도 알아서 겸사겸사 피난왔습니다. 그런데 운 좋게 저런 의뢰가 걸려 있지 뭡니까. 하하하.”

    파비안의 눈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빛났다.

    “……프랑크 사람이라면 튜튼어가 아무래도 투박하게 들리겠구만?”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얼. 겸손하지 않아도 좋아. 프랑크어에 비하면 튜튼어는 야만스럽지. 그래서 말인데, 한번 프랑크에서 유행하는 노래를 한 소절 들려줄 수 있겠나? 내 프랑크인을 만나본 김에 귓속을 청소해보고 싶군.”

    네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스럽다, 정말로 프랑크 출신이라면 어디 노래라도 불러보아라, 이 얘기였다.

    “이를 말씀입니까.”

    내가 방긋 웃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브루노에서 생드니까지――

    눈물과 핏물로 얼룩진 검의 언덕을,

    나는 오로지 맨발로 지났구나.

    진격하자, 조국의 아들딸이여.

    타는 목마음으로 울부짖으라,

    영광의 순간이 왔도다.

    붉은 성에서 울름 평야까지

    보외티아 그리고 미뉘아이여

    언덕과 계곡에 울려 퍼지는,

    적군의 지옥과 같은 함성을 들으라!

    핏물 묻은 전쟁 깃발을 올려라!

    핏물 묻은 전쟁 깃발을 올려라!

    우리 조국의 목마른 밭이랑에

    적들의 더러운 피가 넘쳐흐르도록!

    다름 아니라 내가 작곡한 노래였으므로 쉽게 불러재낄 수 있었다. 가사까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아 대충 끼워맞추었지만, 원래 노래란 게 돌고 돌아서 바뀌는 것 아니겠는가.

    “이야아, 명창이로군!”

    파비안이 박수를 쳤다. 솔직히 명창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아마도 나를 의심했던 걸 사죄하는 의미에서 저러는 것이리라.

    대머리 애꾸눈의 모험자, 파비안은 더 이상 우리의 신원을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모험자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겐 눈물 없이는 듣지 못할 이야기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 그날 저녁까지 파비안은 보리맥주를 열두 잔 쏘았고 우리는 감사하게 받아먹었다.

    다만 술자리에서 내가 정령사라고 말하자, 파비안이 깜짝 놀랐다. 정령사는 마법사보다 희귀한 인종이었다.

    “정말인가? 아니, 자네를 의심하는 건 아닐세. 하지만, 정말로 정령사인가?”

    “물론입니다. 잠깐만 보여드리지요…….”

    내가 주위에 보이지 않게 품속에서 자그마한 무언가를 꺼냈다. 최하급 정령이었다. 나는 직업을 위장하기 위하여 던전에서 실프 몇 마리를 데려왔다. 지금도 내가 입은 옷속에서 두 마리의 실프가 나무늘보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 꺄아?

    실프가 내 손바닥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어디에요, 주인님?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어디라고 설명해봤자 알아듣지 못할 게 뻔하므로 나는 그냥 녀석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주었다.

    ─ 끼하, 꺄아아아~.

    정령이 내 손바닥을 붙잡고 뺨을 부비적거렸다. 귀여워라!

    마왕의 신체는 거의 대부분 마나로 이루어져 있었고, 마나 농도가 짙은 곳에서만 살 수 있는 정령에게 무척 인기가 많았다. 우리 모습을 보며 파비안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저, 정말이로군……정말 정령이야.”

    그는 턱이 아예 벌어져 있었다. 나는 씨익 웃으면서 재빨리 실프를 품안에 집어 넣었다. 조금 더 놀아주고 싶었지만 장소가 좋지 않았다. 우리 귀염둥이, 이번에 모험자들 싸그리 죽여버린 다음에 느긋하게 놀아줄게! 조금만 기다리렴.

    “어떻습니까? 제 말이 믿음직스러운지요.”

    “아, 아아. 당연하네. 이렇게 증거물을 보여주었는데 믿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신이시여, 내 평생 정령사를 보기는 또 처음이네.”

    파비안이 멍하게 맥주잔에 입술을 갖다댔다. 빈 맥주잔이었다. 그제서야 자기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걸 깨닫고 파비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네들과 같은 인재를 찾아내다니, 내 안목이 아주 썩어빠지지는 않은 모양이야. 이번 모험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드는걸.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맥주를 새로 시켜서 가볍게 건배했다.

    믿을 만한 동료를 고르라고 있는 안목이 마왕을 골랐다면 과연 그 안목은 대단한 것일지, 참혹스러운 것일지. 그것이 궁금했다. 아무튼 엄청난 안목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겠지…….

    *  *  *

    이튿날, 우리는 도시를 떠났다. 파비안은 그동안 정말로 준비를 많이 해왔는지 마왕성으로 향하는 지도까지 갖고 있었다.

    “길 잃을 걱정은 하지 말게, 친구들.”

    우리집에 가는 길을 생뚱맞게 다른 사람한테 안내받는 격이었다. 우스웠지만 제레미와 나는 꽤나 먼 도시에서 여행온 모험자로 위장하고 있었다. 잠자코 파비안의 안내를 받았다.

    중간에 마을 몇 군데를 들리며 사흘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섯 개의 언덕, 그 위에 세워진 여섯 개의 마을.

    타지의 인간은 전혀 모르겠지만 이곳이야말로 내가 통치자로 군림하는 소왕국이었다. 세금은 전면적으로 무료. 토지를 배분 받은 가구에만 일시적으로 3할의 세율을 요구하며, 복종의 대가로써 몬스터들을 막아주는……농민들의 천국.

    이곳은 때 아닌 모험자들의 격류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아이고, 나리! 그건 저희 집안의 씨암탉입니다!”

    “아 글쎄, 돈을 주고 사겠다는데 왜 난리야.”

    모험자 무리가 푼돈을 얹어주며 가정의 재산을 약탈했다. 겨우 동화 한두 닢에 씨암탉을 빼앗기게 생긴 농민은 울상을 지었지만 차마 대들 수가 없었다. 이 마을에만 지금 모험자가 서른 명 가까이 활개치고 있었다.

    “값이 너무 헐어? 아니면 댁네 따님을 하룻밤 빌려주든지.”

    “아, 아닙니다. 충분합니다……충분합니다.”

    농민이 동전을 꾸욱 쥐면서 고개를 숙였다. 모험자들은 장난스럽게 농민의 어깨를 치고 떠나갔다. 오늘 그들의 저녁 메뉴는 닭고기 스프이겠지.

    차남과 삼남이 독립하면서 각 마을은 인구가 크게 줄었다. 마흔 명밖에 살지 않는 개척마을도 있었고, 많아봤자 아흔 명을 넘기지 못했다. 영지민들은 숫자의 폭력에 굴복했다.

    하물며 상대측은 비록 고블린뿐일지라도 평생 칼을 잡고 놀아난 건달패였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자경단원이 나서야 했다. 그리고 내 영지의 자경단은 지난 번의 리프 사건 때 숫자가 급격하게 줄었다…….

    “쯧, 분위기가 영 좋지 않군. 다른 마을에 가보세.”

    파비안이 혀를 찼다. 우리는 옆마을로 갔다. 하지만 그곳도 무법지대가 되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퀴리날레, 비미날레, 에스퀼리노, 카피톨리노, 아벤티노, 첼리오……어느 곳이나 모험자로 붐비었다. 여섯 마을 전부 외지인들의 등쌀에 신음하고 있었다.

    “젠장, 무슨 쌩건달밖에 안 모였군! 내 이럴 줄 알았어. 빌어먹을 애송이들.”

    졸지에 반나절 동안 나의 영지를 순례해버린 파비안은 어처구니가 없어져 소리쳤다. 그가 가래침을 카악 하고 땅바닥에 내뱉었다.

    “저런 새끼들 때문에 사람들이 모험자를 부랑자로 여기는 거야! 도리도 도의도 없는 것들, 지들이 이쪽 업계에 흙탕물을 쏟아붓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지.”

    “여관이 있는 마을도 없습니다. 노숙이라도 해야겠군요.”

    “……마왕성에 들어가기 전날 제대로 쉬어두지 않는 건 어리석은 짓일세.”

    파비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청하는 수밖에.”

    “흠. 그래서야 다른 모험자 무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만.”

    “나를 뭘로 보는 것인가? 제대로 숙박비를 지불할 것이야. 내일 아침, 마을 입구에서 보세.”

    파비안은 툴툴거리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에게는 미안하게도 제레미와 나는 숙소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마을 어귀로 걸어갔다. 일찍이 사냥꾼의 집이었던 그곳은 지금은 촌장집이 되어 있었다.

    내가 방문을 두들겼다. 문 너머에서 남자가 소리쳤다.

    “아아! 모험자라면 냉큼 꺼지고, 마을사람이라면 더 꺼져버리라구! 난 너희한테 집을 내줄 생각이 없을뿐더러 너희 집에서 모험자를 쫒아낼 생각은 더 없으니까!”

    내가 키득 웃었다.

    “파르시, 나다. 그대의 자랑스러운 주인님이다.”

    “어이구야!”

    건물 안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영지 최고의 노안을 가진 파르시가 그곳에 서 있었다.

    “언제 오나 기다리느라 불알이 쪼그라들 뻔했수다, 전하!”

    “겨우 며칠 지났다고 성화인가.”

    “그 며칠 동안 마을들이 뒤집어져도 열 번은 뒤집어졌소. 얼른 들어오소.”

    파르시에게 안내를 받아 들어가며 내가 물었다.

    “그래, 모험자 놈들의 행패에 영지민들이 불만을 좀 가지던가?”

    “조금? 지금 조금이라고 하셨소? 말도 하지 맙시다. 이대로 당하느니 차라리 죽더라도 저놈들 눈꾸녕에 불알을 쑤셔넣고 죽자, 하고 소리치는 판국이라오.”

    “요컨대.”

    내가 자리에 앉으면서 웃었다.

    “일이 아주 잘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로군.”

    그러자 파르시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렇수다. 빌어먹을, 다 전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흘러가고 있소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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