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13화 (213/510)
  • 00213 D급 모험대  =========================================================================

    “호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희의 어떤 점을 보고 그리 생각하셨는지요?”

    “여기 밑바닥에서 오 년이고 십 년이고 굴러댕기면 말이야.”

    모험자가 자기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삼십 대 중년으로 보이는 이 남성은 대머리였다. 오른쪽 눈가에 길게 칼자국이 났고, 그 때문인지 가죽 안대를 썼다. 피부는 햇살에 잘 구워져 갈색빛이었다. 대머리에다 애꾸라니, 꽤나 깡패스러웠다.

    “촉이 오거든. 누가 빛살 좋은 개살구이고 누가 진주를 문 조개인지, 싸아아악, 하고 촉이 와. 저기 접수대 앞에서 목청 큰 거 자랑하는 놈들.”

    대머리가 청사에서 바글바글대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쟤네들이 마왕성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나자빠질 애송이들이지. 동네에서 고블린 몇 마리 잡아봤다고 기고만장해서는 농삿일 때려치고 도망쳐나온 차남이랑 삼남이야. 안 봐도 뻔해.”

    “아주 자신만만하시군요.”

    “내가 저랬거든.”

    대머리가 씨익 웃었다. 버릇 없는 미소가 아니었다. 인텔리한 남성이 상대방을 인정하고 배려한다는 의미에서 짓는, 무척 지적인 미소였다.

    그러자 대머리의 인상이 확 달라졌다. 근육질 몸매에서 뿜어져 나오던 야성미, 애꾸눈에서 비롯하는 해적선장 혹은 무법자스러운 분위기. 이것을 젠틀함이 껴안았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우습겠지만 대머리는 신사적인 폭력배 같았다.

    “저런 초보자는 대부분 처녀 싸움에서 죽어버리지. 그래, 대략 3할은 죽는다고 해볼까. 그리고 3할은 첫경험에서 지레 겁을 먹어 포기해버리고.”

    대머리가 손가락을 네 개 펼쳤다.

    “4할. 형씨, 알겠어? 오직 초보자 중에서 4할만이 이 업계에 계속 남는 거야. 이 녀석들의 인생은 무척 단순해져. 둘 중 하나이지. 마왕성 동굴바닥에서 뒈지거나, 아님 창녀한테서 매독이 옮아 훅 가버리거나.”

    내가 흥미롭다는 눈치를 보였다.

    “흐음, 살아남는 경우는 없습니까?”

    “없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지. 엄청나게 운이 좋으면 그래, 오십 살이 되어도 살아남을 수 있지. 하지만 그래봤자 뭐하겠나? 우리 같은 하루살이들이 어디 저축을 해두었겠나, 노후를 대비했겠나.”

    대머리가 테이블 근처를 지나가는 여종업원에게 말했다.

    “아가씨, 여기 보리맥주 세 잔 갖다주게.”

    “그냥 맥주 세 잔이요? 알겠어요.”

    종업원이 귀찮다는 듯 틱틱거리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대머리가 동화를 대여섯 개 건네줬다.

    ‘흐음.’

    내가 마음속으로 눈앞의 모험자를 높게 평가했다. 대머리는 능숙하게 제레미와 나한테 술을 사준 것이었다. 우리와 뭔가를 함께해보고 싶다. 그것을 말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대인배 아니면 사기꾼이다. 대인배라면 상관없으나 문제는 사기꾼일 경우이다. 신사적인 미소는 사기꾼이 흔히 써먹는 술책에 해당한다. 과연, 이 사람은 어디에 해당할까…….

    “자네들도 알겠지만, 모험자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어. 하루살이야. 당장 내일 머리통이 몸통에게 작별인사를 고할지도 몰라. 생각해보라구. 만약 내가 죽어버리면 길드 창고에다 저금해둔 돈들은 어떻게 되겠나?”

    대머리가 두 손을 벌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다 공중으로 날아가는 거야. 그날 저녁 길드의 간부 나으리들께선 밀맥주로 건배를 외치겠지……. 늙어서도 잘 살아보자며 아끼고 또 아껴봤자 결국은 남 좋을 일. 그렇다면 차라리 게 사라 사라(che sarà sarà)를 외치는 편이 현명하지.”

    대머리의 말이 옳았다.

    안정적인 삶에서 천만 광년쯤 떨어져 있는 모험자한테는 시집 올 여자가 없다. 가족도 없다. 그렇기에 모험자의 영원한 연인은 길가에 핀 민들레……즉 창녀뿐이다.

    던전에서 한탕 번 다음 그 돈으로 호화롭게 며칠을 산다. 고급스러운 창관에서 돈을 마구 뿌리고, 값비싼 음식에 술을 즐긴다. 여기에다 도박까지 끼어들면 완벽하다.

    창녀와 술, 도박. 세 가지가 겹쳐지면 돈주머니가 거덜나는 것도 한순간이다. 그럼 며칠 간의 사치가 마치 꿈이요 몽상이었다는 듯이 모험자는 고달픈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딱딱한 호밀빵 하나 얻지 못하여 배를 굶주린다. 시민들 눈치밥을 얻어먹으며 우물물로 배를 채운다. 다시 화려한 그날을 보내기만을 손꼽으며, 길드 청사의 의뢰란 앞에서 건달처럼 서성거린다.

    성공, 사치, 굶주림, 다시 성공, 사치, 굶주림…….

    “그러다가 어느 날 죽는 거야. 우리 모험자란.”

    어쩔 때는 단순히 운이 나빠서. 고블린이 날린 돌멩이가 하필 머리에 맞아 절명한다.

    어쩔 때는 모험대가 실수해서. 정찰조 역할을 해주어야 할 사냥터지기(레인저)가 그만 오우거를 발견하지 못해서 그대로 절망적인 혈투에 돌입한다.

    인간은 약하다. 내가 방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쉽게 죽는다. 확률상으로야 죽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 하지만 모험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다보면, 언제고 그 낮은 확률이 잭팟을 터트려버린다.

    밑바닥의 쓰레기 인생. 모험자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표현은 없겠지.

    게임 <던전 어택>에서 용사 캐릭터도 마찬가지이다. 퀘스트가 끝난 후에는 만날 창관에 들린다. 여기에 빌어먹을 시스템이 있는데, 주인공 캐릭터가 창녀와 섹스하면 0.01%의 확률로 매독에 걸린다.

    데드 엔딩이 떠버리는 것이다!

    더 악질적인 것은 게임상의 매독에 잠복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1년 6개월이 지난 시점에 발병한다. 설령 0.01% 확률에 걸려넘어져 매독에 전염되었다 해도……그걸 알아차리는 것은 한창 게임을 진행해버리고 나서, 즉 1년 6개월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다.

    당연하지만, 1년 6개월 전의 게임 데이터를 저장해놓은 경우란 없다.

    무조건 데드 엔딩이다.

    여기에는 욕을 퍼부어줄 수밖에 없다. 개좆보다 더 좆 같은 개발자 새끼들. 시발스러운 쌍놈들. 내가 매독 때문에 베드엔딩을 띄워버린 경우가 두 번이나 된다.

    차라리 마왕한테 뒤지면 뒤졌지, 니미럴. 그러면 세이브-로드 신공으로 극복할 수라도 있지 않은가. 1년 6개월 이전의 데이터를 어디서 구한다는 말이냐. 만에 하나 그런 데이터가 있다고 해본들 또 다시 게임상으로 1년 6개월 동안 플레이 해야 한다는 거 아니냐. 존나 양심을 정액에 묻혀서 싸버린 말똥에 박아버린 새끼들!

    만약에 그 1년 6개월 동안 레벨업 노가다라도 왕창 해놨다면……끝장이다.

    내가 그랬다.

    솔직히 자살하고 싶었다.

    이 해괴망측한 시스템은 엄청난 원성을 샀다. 플레이어들의 항의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그러자 개발사에서 내놓은 대답이 가관이었다.

    『매독에 걸릴 확률은 기본적으로 0.01%입니다만, 플레이어가 현재 수준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레벨이 높을 경우 확률이 올라갑니다. 소위 레벨업 노가다라 불리우는 플레이를 자제해주십시오.』

    한 마디로 퀘스트를 깨면서 차근차근 레벨을 올리라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놈들!

    당연히 플레이어들은 겁에 질렸다. 레벨업 노가다를 했더니 매독에 걸려서 데이터가 날아가버렸습니다, 하는 보고서가 종종 게시판에 올라왔다.

    결국 플레이어들은 레벨업 노가다를 포기하고 게임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던전 어택>의 난이도가 어마어마하게 높아지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정말 변태적인 게임이 아니고 뭔가.

    아아, 생각나니까 열분이 올라온다!

    틀림없이 저 개 같은 시스템은 비너스빤스가 넣었을 거다. 증거는 없지만 확신한다.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세상에 나쁜 것들은 죄다 그 녀석 잘못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 내 모습에 대머리가 뭔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다.

    “호, 형씨도 모험자의 처지에 공분을 느끼는가 보구만?”

    “……이런, 부끄럽습니다. 못난 꼴을 보여드렸군요.”

    “아닐세. 형씨처럼 젊을수록 분노가 들끓는 거지.”

    이해한다는 식으로 대머리 애꾸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선이 나에게 한결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이쪽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았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뭐, 구태여 교정해줄 필요가 없으므로 나는 계속 착각하도록 내버려뒀다.

    “그냥 맥주 세 잔이요. 파비안, 가끔은 밀맥주를 시키라구요.”

    하고 여종업원이 신경질적으로 맥주잔을 서빙했다. 대머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이 사람의 버릇이었다.

    “단탈리안 마왕성을 털고 나서는 밀맥주 따위는 삼백 잔이라도 시켜주지.”

    “지금 너도 나도 그 소리만 하고 있는 거 알아요? 데르달루스는 어제 모험대를 꾸려서 떠났다구요. 파비안, 당신은 이미 지각생이 되어버렸어요.”

    “데르달루스는 운빨로 버텨온 종자야.”

    대머리가 맥주잔을 손에 들고 말했다.

    “이제 슬슬 땅바닥에 입맞춤할 때가 되었지. 나와 내기할까, 플뢰르? 그 녀석은 사흘 안으로 대지의 여신과 결혼식을 올릴 거야. 백골이 너무 하얘서 누가 신부복을 입었는지 모를걸.”

    여종업원이 피식 웃었다.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여러분들, 이 아저씨 말을 너무 믿지 마세요. 사기꾼은 아니어도 그보다 더 악독하니까. 멀쩡하게 보여도 완전히 미쳤어요. 작년에 이 남자가 하룻밤 만에 육십 골드를 날린 건 유명하죠. 신이시여, 글쎄 유곽의 고급 창녀들을 모조리 사들여서 놀아재꼈지 뭐예요!”

    “정확히 팔십이 골드였어.”

    대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내주는 밤이었지.”

    “미쳤어, 진짜.”

    종업원이 깔깔 웃었다.

    “헛소리가 아니야, 플뢰르. 난 그날부터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거든. 그런데 이렇게 대박 의뢰가 들어오는 것 아니겠어? 여신들께서 날 굽어살피는 게 분명하지. 이번 기회에 손을 털고 무기상이나 차려볼까 해.”

    “꿈도 야무지셔. 밀맥주나 시키고 호언장담하세요, 애꾸눈 파비안 씨.”

    종업원이 손짓으로 얄밉게 작별인사를 건넨 뒤 총총걸음으로 떠났다. 주홍빛이 나는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대머리는 그녀가 떠나자마자 우리 쪽으로 머리를 들이댔다.

    “죽여주는군. 어떤가, 자네들?”

    “무엇이 말입니까?”

    “플뢰르 말일세. 꽤 매력적이지 않나?”

    대머리가 속삭였다.

    “길드 청사에 허구한 날 들락날락이는 건달패의 태반은 플뢰르한테 반해 있어. 붉은색급 모험자의 딸인데, 아비가 죽은 다음엔 저렇게 허드렛일을 하고 있지. 모험자의 생태계에 빠삭할뿐더러 보다시피 예쁘장하게 생겼지. 그런데.”

    대머리가 손바닥을 좌우로 흔들었다.

    “자존심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랑도 두 번 이상 자지 않네. 어쩌다 마음이 맞아서 한 번은 떡을 칠 수 있지만, 절대로 두 번은 침대에 같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별종이지.”

    “호오, 파비안 씨도 저 여자와 자본 모양이군요?”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끝내주는 밤이었지.”

    대머리가 맥주잔을 들이밀었다. 우리도 잔을 들어서 건배했다. 맥주는 미지근하고 맛없었지만,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운 청사의 분위기와 어울렸다.

    “내가 이번 어릿광대 행렬에 참가하려는 이유도 저거일세. 오육백 정도의 금화가 있으면 당장이라도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어. 여기 치안대와 연줄이 있으니 자그마한 무기상을 차리는 게 가능하거든. 그러면 플뢰르를 신부로 맞이할 수도 있겠지.”

    꿀꺽꿀꺽, 하고 파비안이 맥주를 원샷했다.

    “크으. 이번 의뢰에 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거시기로서의 행복이 전부 달린 거야. 어디 어중이떠중이와 모험대를 꾸릴 수 있겠나? 급할 때일수록 차분하게 옥석을 가려내야 해. 실력 있는 모험자는 그걸 알고 있지…….”

    파비안이 제레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거 보자, 웬 남녀 한쌍이 탁자에 조용히 앉아 있지 않겠나? 청사의 모험자들을 관찰하면서. 마치 '어느 녀석이 쓸만한지 판별하려는 듯' 말이야. 어이, 아가씨. 특히 자네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

    제레미는 파비안이 착석한 이후 줄곧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파비안이 입끌을 히죽 들어올렸다.

    “피냄새가 진동해서 견딜 수가 없어. 아수라장을 몇 번이나 빠져나온 사람만이 내풍길 수 있는 공기가 아가씨 주위에서 풀풀 날려. 바로 깨달았지! 자네들은 나와 생각이 똑같다는 것을. 제대로 된 동료를 구하지 못한다면 아예 출발하지 않겠다……. 어때, 내 말이 틀렸는가?”

    내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맞습니다, 파비안 씨.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누군가'를 찾고 있었지요.”

    다만, 그 누군가란 동료가 아니라 탐스러운 먹잇감일 따름이었다.

    내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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