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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11화 (211/510)
  • 00211 D급 모험대  =========================================================================

    *  *  *

    나는 여장을 풀지도 않고 곧장 마을로 되돌아갔다.

    파르시가 나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우, 전하.”

    “여전히 나이에 비해 얼굴이 늙어빠졌구나.”

    “시끄럽수! 내가 노안인 걸 전하가 책임이라도 져줄 거 아니면 조용히 하쇼.”

    파르시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멧돼지처럼 생긴 남정네가 그러니 웃겼다.

    그는 몇 달 보지 않은 사이 부쩍 늙었다. 파르시는 사실상 영주대리인이었으며, 나를 대신해서 데이지네 화전촌 주민을 다독이고 이끄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듣자하니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분쟁을 조정하느라 심히 고생했다고 한다.

    촌장집에 들어가서 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대화했다.

    “으음. 라우라 데 파르네세 님이 영 어수룩한 것은 아니외다.”

    파르시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째푸렸다.

    “하지만 말이요, 전하. 인간들의 생리를 도통 모른다오.”

    “생리를 모른다니?”

    “샌님처럼 너무 이상적인 얘기만 나열한다는 말이지.”

    파르시가 크흥, 하고 코를 풀었다. 그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거요. 파르네세 님은, 그 뭐라고 하더라? 촌장과 지주가 마을을 관리하고, 법률은 마왕 전하와 가신단이 직접 만들고, 또 그 법률을 집행하는 이들은 따로 뽑아야 한다고 하더이다.”

    파르시가 손바닥에 묻은 콧물을 방바닥에 스윽 문질렀다. 더러운 자식!

    파르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말이나 쉽지 어떻게 잘 이루어지겠소? 생각해보슈. 마을사람들 입장에선 그럼 촌장도 아니고 마왕 전하도 아닌, 영 딴판인 외지인한테 재판을 받는 셈이오. 어디 신뢰나 가겠냐는 말이외다.”

    “으음.”

    라우라가 주장한 것은 이른바 권력분립(權力分立)이었다.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규칙을 추상적으로 정립하는 입법. 이렇게 정립된 법률을 갖고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사법. 법칙과 규칙을 준수하는 가운데 영지민들을 적극적으로 통치하는 행정.

    통치자가 자칫 지나치게 막대한 권력을 얻지 못하도록, 아예 미리부터 구획을 정해놓아 하나의 권력을 여러 갈래로 찢어놓자는 아이디어……그렇지만, 파르시와 같은 보통 농민들에게는 ‘왜 그리 복잡한 과정을 만들어내야 하는가!’ 하고 볼멘소리가 나올 법했다.

    특히나 사법권. 이게 문제였다.

    이 시대에 법률적인 다툼은 일상다반사이다. 논밭을 개척할 때는 대부분 여러 세대가 달라붙는다. 이때 누가 농기구를 빌려주는가? 누가 직접 땅을 일구는가? 개척되어 완료된 논밭은 어느 쪽이 얼마만큼 소유하는가?

    마을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곡물창고, 여기서 각자의 몫은 얼마인가. 마을에서 갑작스레 가장이 병사한 집안이 있을 경우 누가 원조해야 하는가……. 열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이런 사태에 직면해서 마을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간단하다.

    촌장을 비롯하여 지주 등, 유력한 농민들끼리 모여서 자체적으로 심판한다!

    내가 말했다.

    “농민들 중에 유력한 지주한테 재판관을 맡기면 되지 않겠는가?”

    “흥. 그럼 마을관리를 맡은 지주가 따로 있고 재판을 맡은 지주가 따로 있는 거요? 그네들끼리 전부 결혼하고 왕래하여 한 집안이나 다름없는데, 잘도 공정하게 판결이 나겠수다.”

    “끄응.”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연스러운 유착관계라. 그것이 문제인가.”

    “차라리 지주들한테 죄다 재판을 맡겨버리면 말이요, 응? 그네들끼리 짜고 쳤으면 티가 확 나버리오. 마을사람들 보는 눈이 무서워서라도 그럴 수는 없지. 하지만 겉보기에만 공정한 것처럼 위장해버리면……쓰읍.”

    파르시가 말끝을 줄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정하다. 하지만 실상은 결혼관계 등으로 돈독하게 맺어진 지주들. 실상이 어찌 굴러갈지 뻔하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기에, 마을사람들이 불평과 불만을 제기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지주끼리 유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찰관을 만드는 것은 어떠한가?”

    “그 관찰관은 또 어디서 뽑구? 마을 안에서요? 마을 밖에서요?”

    파르시가 훗, 하고 웃었다.

    “안에서 뽑으면 피차일반 인맥에 휘둘릴 것이고, 바깥에서 뽑으면 마을사정도 잘 몰라서 측근들 말에만 귀를 기울여 편파적으로 판정할 거외다. 지주한테 매수당하든지. 아니, 그냥 지주들이 '외지인한테 정보를 팔아넘기는 자는 마을의 공적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말만 흘려도 끝이외다.”

    “하아…….”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나에게는 두 가지 정책이 놓여 있다.

    첫 번째, 마을에 권력을 완전히 떠넘기는 것. 두 번째, 라우라가 주장한 대로 권력분립을 철저하게 실행하는 것.

    첫 번째를 살펴보자.

    마을이 공정하게 돌아가려면 권력을 뭉뚱그려서 모든 지주들한테 맡겨야 한다. 이때 재판이 잘못되거나 얼토당토 않게 흘러가버리면, 책임은 '모든 지주'에게 떨어진다. 연대책임이다. 마을사람들은 지주를 성토하면 된다. 책임소재가 무척 뚜렷하다.

    그러나 지주들도 멍청이가 아니다. 왜 굳이 피박에 광박을 뒤집어쓰겠는가? 재판에서 행여나 모험을 감행했다가 일이 잘못되면 자기네가 피해를 본게 된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관습법'에 따른다.

    왜 이런 재판을 내렸는가? 그것이 관습이니까. 왜 저 사람이 농토를 더 많이 가져가는가? 그것이 관습이니까. 왜 우물은 누구에게 돌아가고 누구에겐 허락되지 않은가. 그것이 관습. 오로지 관습이기 때문에…….

    “결국 관습이 신앙이자 법률이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그게 뭐 크게 나쁘오외까?”

    파르시가 이마를 찡그렸다.

    관습법을 추종하면 책임소재가 부웅 공중에 떠버린다. 일이 잘못되어도 나쁜 것은 지주들이 아니다. 그저 '운이 나쁘게' 상황이 잘 굴러가지 않았을 뿐이다. 요컨대 운명론……매우 통속적인 민간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잘 되면 운이 좋아서. 잘 안 되면 운이 나빠서.

    관습법을 바꿀 필요도 없고, 지주들 이외에 다른 재판관을 임명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이번에는 운이 좋기를 마을 언저리에 모셔진 토속신에게 기도할 따름이다…….

    마을공동체=공동재판 및 인민재판=책임소재의 증발=운명론=토속신앙.

    얼핏 보기에는 각각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사슬로 단단하게 묶여 있으며, 이중에서 한 가지라도 고치려면 제도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고쳐야만 한다.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난해한 작업일지는 상상만 해도 충분하다.

    ――이리하여, 마을이라는 하나의 사회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이게 된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미개해서, 머리가 안 좋아서 보수적인 것이라면 몰라도 말이야.’

    미개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농촌의 보수성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합리적인 보수성, 이라고 표현하면 제격이겠지. 농민들 나름대로 공정한 사회를 이룩하려고 피땀 흘려 노력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영주인 나의 입장은 어찌되냐?”

    “……뭐, 솔직히 그렇소만.”

    파르시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러했다. 마을공동체가 알아서 통치하고 알아서 재판하면, 영주인 내가 할 일이 증발해버렸다. 자기네 관습대로 하겠다는데 왕이 뭐라 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으으음, 세금을 받고 계시니 그걸로 만족하시는 것이?”

    “이런 개자식을 보았나. 너희가 세금을 내든 안 내든 어차피 나한테는 코딱지보다 좀스러운 돈이거든? 애들 푼돈 뜯어봤자 만족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껄껄껄.”

    파르시가 노인네처럼 웃었다.

    “그러니까 마왕 전하께선 우리 마을들 입장에선 아주 이상적인 영주님이라오. 괴수들이 마을에 약탈하러 오는 것도 막아주시지, 세금도 거의 안 받으시지, 딱히 우리 권리에 간섭하지도 않지. 단탈리안 전하 만만세요외다!”

    파르시가 두 팔을 번쩍 들어서 만세를 삼창했다. 나는 홧김에 주먹으로 녀석의 배를 때렸다. 녀석은 “에고고, 파르시 죽네!” 하고 소리 지르면서 벌러덩 쓰러졌다. 엄살이 끝내줬다. 어차피 장난삼아 친 거라서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그럼 이건 어떠냐. 다른 마을의 장로들로 재판을 꾸리는 거다.”

    “음?”

    투박하게 생겼지만 젊고 영리한 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마을의 장로들로? 무슨 뜻이오?”

    “파르시. 나의 영지에 지금 마을이 몇 개 있느냐.”

    “어……기다려보슈. 원래 마을이었던 곳 세 개랑.”

    파르시가 손가락을 굽혔다.

    “차남이랑 삼남들이 빠져나가서 꾸린 마을 두 곳이랑. 저번에 전하가 무책임하게 떠맡긴 화전민까지 해서, 전부 여섯 곳이구만유.”

    “충분히 많군. 잘 봐라, 어느 한 마을에서 사건이 생겼다. 그러면 사건당사자들을 다른 마을로 보내서 재판에 맡겨버리면 되지 않겠느냐?”

    “…….”

    파르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내가 계속 말했다.

    “어차피 다른 마을이니 보다 공정하게 사태를 바라볼 것이다. 같은 영지민에다 교류도 활발하니 외지인도 아니지. 아예 내부인도 아니면서 아예 외부인도 아니다. 어떠냐? 좋은 수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확실히. 크흥.”

    파르시가 콧물을 풀었다.

    “확실히, 꽤나 그럴듯하게 들리는구랴. 하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마을들 사이에 원한이 생겨버릴지도 모르오. 전하의 영지가 내분을 일으키는 거외다?”

    “쯔쯧. 그러니까 더더욱 조심스럽게 재판에 임하겠지.”

    내가 검지손가락을 들어 양옆으로 흔들었다.

    “잘못하면 내전, 그러하지 않기 위하여 최대한 공정하게 재판해야만 한다……마을 원로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흠. 흠. 흐음.”

    파르시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고민에 잠겼다. 콧물이 손바닥 사이에 끼어서 초록색 샌드위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헌데도 재판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면 다시 한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이때는 영주인 내가 직접 꾸린 가신단에서 판결을 내리도록 하지.”

    “……재판 위에 또 재판이 있는 거외까?”

    “글쎄, 대법원이라고 적당히 이름 붙이면 되겠군.”

    파르시의 이마에 파인 골이 점점 깊어졌다.

    이 시대, '같은 계급에서 일어난 일은 그 계급 안에서 해결한다'라는 원칙이 불문율처럼 통용되고 있다. 영지민이 영주한테 쪼르륵 달려가서 무슨 문제 좀 해결해달라고 말해버리면 같은 계급의 사람들한테 완전히 왕따를 당한다.

    불문율을 어기면서까지 1차 재판에 승복하지 않고 항소한다……즉, 상당히 중요한 재판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적다. 재판결과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해서 누구든지 제멋대로 항소하기란 어렵다.

    1차 재판이 유명무실해질 일이 없다는 얘기이다.

    “쇤네가 일자무식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소만 제법 좋은 제도처럼 들리오.”

    “당연하지. 누구 머리에서 나온 해결책인데.”

    “……그거 아시오? 전하께선 가끔씩, 솔직히 말하자면 매우 자주 재수없소.”

    내가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파르시는 배 한복판에 정확히 주먹이 들어갔는데도 끄떡이 없었다. 제기랄, 이래서 근육질 투성이의 농민이란!

    “혹시 모르니, 한 마을의 지주 집안이 다른 마을의 지주 집안과 결혼하는 것도 법으로 금하겠다. 이렇게 해두면 유착관계 따위가 최대한 사라지겠지.”

    “허어. 철두철미하구려.”

    파르시가 혀를 내둘렀다.

    이로써 나의 측근 라우라가 추진하는 권력분립 정책, 영주대리인 파르시가 대변하는 마을공동체 정책이 서로 타협점을 찾았다. 사법권을 마을로부터 분리시키되 다만 마을'들'에게서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누구나 납득할 만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전하.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소. 마을사람들은 여태까지 해오던 방식대로 잘만 살아왔수다. 이제부터 새로운 방식으로 삽시다! 라고 선언해본들 사람들이 제깍제깍 따라주겠소? 소인은 그게 걱정이외다.”

    “아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에게 이득이 있다면, 주저없이 동의할 거다.”

    “이득? 새로운 방식에 뭐 대단한 이득은 없어보이오만.”

    파르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권력을 분산하면 최종적으로 공동체가 건강해진다……라고 말해봤자 아리송하겠지. 너무나 추상적이다.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득으로는 결코 영지민들을 설득할 수 없다. 새로운 정책을 밀어붙이려면 당장의 당근이 필요하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간단하다. 이득이 없다면 만들어라.”

    바로 다음날, 나는 제레미에게 시켜서 인근의 가장 큰 도시로 보냈다. 그리고 모험자 사무소에 거액의 현상금과 함께 어떤 의뢰를 넣었다.

    의뢰는 간단했다.

    『마왕 단탈리안을 잡아오는 자에게 4000골드를 지급합니다.』

    『기한은 촉박. 이번 달 마지막 날까지.』

    『생사불문(生死不問).』

    도시의 용병들과 모험자들을 들끓어 오르게 하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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