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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10화 (210/510)
  • 00210 D급 모험대  =========================================================================

    “그, 그래. 일하는 중인가. 알겠다. 일은 중요하지.”

    내가 참! 하고 뻘줌하게 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의미에서 격려금을 베풀겠다. 자아, 성실하게 노동한 일꾼들이여. 손에 집히는 대로 금화를 수확하거라!”

    나는 호기롭게 웃으면서 한바탕 금화를 날렸다. 돈지랄만은 아니었다. 두 달이나 부재했으니 일꾼들도 나를 대하기가 적잖게 어색할 터. 일종의 작은 축제를 열어 분위기를 전환하고, 나에게 부담없이 다가오도록 만드려는 의도 또한 있었다.

    찰랑, 찰랑, 유쾌한 소리를 내며 금화가 동굴바닥에 쏟아졌다. 돈 소리가 들리자 고블린들과 난쟁이들이 목뼈가 꺾어질 기세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한 발자국 들어올렸다가――.

    “……어라?”

    제자리걸음을 했다. 일꾼들은 충혈된 눈동자로 조심스럽게, 무척 조심스럽게 어느 한곳을 바라보았다. 무수한 시선의 끄트머리에는 다름 아니라 라피스 라줄리. 분홍빛 머리카락의 서큐버스가 서 있었다.

    “일층은 중앙을 높게 뚫어두어도 좋습니다. 강도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라피스는 금화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이 계속해서 일꾼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먼 훗날을 고려할 때, 일층에는 모험자들을 상대로 해서 각종 상점이 들어설 것입니다. 중앙에 광장이 형성될 수도 있어요. 그것까지 생각해두어야만 합니다. 알겠습니까?”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총지배인 님.”

    일꾼들이 굽실굽실거리며 라피스한테 허리를 숙였다. 곁눈질로 동굴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지만, 결코 한 발자국이라도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깨달았다.

    이 녀석들……전부 라피스의 눈치를 보고 있다!

    마계에서 내로라하는 건축업계 인사들이 한곳에 모였다. 이들 대다수가 사무소장이거나 소장의 대리인이었다. 그런 이들이 한낱 반인반마(半人半魔) 하급 서큐버스한테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얼이 빠졌다. 도대체 지난 두 달 동안 무슨 짓을 했기에 무슨 신병들마냥 군기가 이리도 빡세다는 말인가?

    “그리고,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손에 들린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호명했다. 매우 단호한 어조였다. 내가 흠칫했다.

    “어? 어.”

    “근로의욕을 고취시키려는 의도에 감사드립니다만, 지금은 아직 작업시간입니다. 퇴근은 앞으로 세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때 일괄적으로 상여금을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다.”

    나는 허리를 숙여서 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일일이 다시 주웠다. 마치 한창 막바지 작업이 이루어지느라 바쁜 현장에서 쓸데없이 등장하여 초만 치는 회장님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아니, 비유가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였다.

    “저기, 라우라는 어디 있냐?”

    “글쎄요. 마왕방에서 고귀한 철학책이라도 읽고 있겠지요.”

    순간적으로 라피스가 썩은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초리가 되었다. 마치 세상의 쓴맛과 단맛을 모조리 맛본 오십대 중년의 회사원이 사회 초년생 애송이의 작태를 보는 것처럼.

    겁나게 무서웠다.

    “이, 일단 마왕방에 가볼게. 수고해.”

    나는 일초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뜨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임을 직감했다. 라피스에게 오른손을 흔들면서 뒷걸음질 쳤다. 라피스가 도로 무표정이 된 얼굴로 덤덤하게 대꾸했다.

    “예. 수고하겠습니다. 이미 수고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라피스의 지시와 명령이 재시작했다. 동굴에는 내가 등장하기 전보다 온도가 한층 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데…….

    무언가 죄라도 지은 것 같아 나는 풀이 죽은 채 걸어나갔다.

    그런데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놀라움과 경탄이 샘솟았다. 나의 던전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무규칙하게 이리저리 굽어졌던 동굴이 싹 정리되어, 질서정연하고 널찍한 통로가 놓였다.

    “와아.”

    통로 양측은 거대한 벽이 빈틈없이 가로막았다. 저 벽 너머에 몬스터 부락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오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자 몹시 신기하여, 놀이공원에 초대된 어린아이처럼 입을 헤 벌리고 돌아다녔다.

    깡! 깡! 까앙!

    통로 어디에서나 일꾼들이 일하고 있었다. 곡괭이가 쉼없이 움직이며 동굴을 깎아냈다. 미장이들이 바지런하게 손을 놀렸고, 마법사로 보이는 고블린이 연신 고개를 흔들면서 뭐라고 화내며 중얼거렸다.

    “에잉, 이래서야 강화 마법을 걸지도 못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아다만티움 재고가 얼마 남지 않아…….”

    “책임자! 여기 책임자를 불러와!”

    대공사였다.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떠들었다.

    나는 시공비를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하나의 사무소가 아니라 여러 사무소에게 일감을 맡겼다. 공사비야 적어졌으나 이것은 총지휘자 한 명에게 부담이 엄청나게 집중되는 방식이었다. 수십 개의 사무소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업무를 조정해주어야만 했다.

    “으아아아.”

    과연, 라피스가 신경질을 부릴 만했다.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게 쌓였겠지. 정작 총책임자가 되어야 할 사람은 '나 돌아왔어, 반갑지?' 하고 태연자약하게 어슬렁거렸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두 시간 정도 느긋하게 걸어서 마왕방에 도착했다. 마왕방은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

    먼저 마왕방 앞에 절벽이 있었다. 절벽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되게 깊은 해자라고 해야 할지. 해자에는 좁다랗게 돌다리가 놓였다. 그 다리를 건너야만 마왕방의 정문으로 갈 수가 있었다.

    정문은……예전에 리프가 손도끼로 가볍게 찍어내린 목조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조각상에 가까웠다.

    대단히 험상궂은 인상의 조각상이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입구멍이 바로 정문이었다.

    그야말로 마왕이 머무르는 거처, 라는 느낌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엄청난 악취미였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 조각상의 눈동자 부분에서는 새빨갛게 불이 타오르기까지 했다.

    나는 압도당한 기분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의 위쪽. 즉 조각상에서는 코와 입 사이의 인중에 해당하는 부분에 조각칼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제국어로 쓰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 희망일랑 죄다 놓아라, 피안에 와버린 자여.

    “으어어억.”

    정말로 본격적이었다. 본격적으로 마왕스러웠다. 마치 RPG에서 보스몹 사냥터가 튀어나온 것 같았다.

    라피스는 속으로 '마왕'이란 것에 대해 이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가. 이백 년 가까이 살아온 마족 주제에 너무 유치하잖아!

    아니, 바르바토스도 자기 마왕성을 <모든 죽은 자들의 성전> 따위로 부르니까……. 의외로 마왕성의 디자인이란 이렇게 유치찬란한 것이 보편적일지 모르겠다. 하기사 마인 놈들은 미적 감각이 심히 괴랄했다. 분홍색으로 된 정장 따위를 무도회용 정복이랍시고 즐겨 입지 않는가.

    나는 반쯤 포기한 기분으로 마왕방에 터덜터덜 들어갔다. 의외로 마왕방 안쪽은 썰렁했다. 아직 공사에 들어가지 않은 낌새였다.

    “라우라? 단탈리안이 왔습니다. 라우라가 사랑하는 단탈리안이 돌아왔습니다.”

    내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그러자 맞은편 침대에서 무언가가 빼꼼 튀어나왔다. 금빛 머리카락. 라우라 데 파르네세였다.

    “주군……정말로 주군인가?”

    라우라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얼굴이 무척 피폐해져 있었다. 언제나 봄날의 햇살처럼 찬란하던 금발도 생기를 잃어 푸석푸석했다.

    “소녀를 꾀어내려고 고안해낸 환영마법이 아닌가? 정말인가?”

    “화, 환영마법이라니.”

    나는 충격을 먹었다. 도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사건들이 벌어진 것인가.

    라우라는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어린 고양이에게 다가가듯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라우라, 진짜입니다. 환영마법도 뭣도 아니고 진짜 단탈리안입니다.”

    “평소에는 무척 근엄한 척하지만 조금이라도 압박감에 시달리면 맛이 가버려서 웃었다가 풀이 죽었다가 다시 웃어버리는, 옆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주군이 맞는가?”

    “……예, 바로 그 단탈리안입니다.”

    라우라가 침대에서 얼굴만 내민 채로 여전히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성실하네 착실하네 헛소리를 일삼으면서 틈만 나면 소녀의 육체를 탐하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만 세상에서 제일 성실하고 착실한 색마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주군이 맞는가? 열일곱 살 이상으로는 여자로 보지도 않는 주군이 정말로 맞는가?”

    “……라우라가 평소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매우 잘 알겠군요.”

    내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는 색마도 아동성애자도 아니라 단탈리안입니다. 그저 어떠다가 평균연령이 살짝 낮은 여성과 관계를 맺게 되었을 뿐이지요.”

    “아아, 그 뻔뻔하기 그지없는 상판대기를 보아하니 틀림없이 소녀의 주군이로다!”

    라우라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전쟁터에 나갔다 돌아온 주인을 마중하는 애완견처럼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주군! 주군! 보고 싶었다! 소녀는 진심으로 보고 싶었다!”

    하고 점프하여 나를 온몸으로 덥썩 안았다.

    나는 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뭘까요. 분명히 감동적인 재회 장면인데, 마음 한 구석이 싸하게 슬픕니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요.”

    “아아, 이 엉망진창의 소인배스러운 관상하며!”

    라우라가 감격했다. 아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볼품없이 굽어진 등줄기에 좁은 어깨! 두 달이고 세 달이고 전혀 깎지 않아서 밀림처럼 제멋대로 삐져나온 머리카락! 비열함이 응축되어 생생하게 배어버린 입가! 아, 진짜배기이다. 진짜배기 주군임에 분명하다!”

    “……아, 예. 그렇습니까.”

    “주군은 분명 세상에서 제일 싸구려 같은 마왕이지만, 그런 싸구려 주군이기에 소녀는 주군을 좋아한다!”

    라우라가 두 손을 벌려 내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진하게 키스했다. 한 번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라우라는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마구잡이로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아무런 감동도 없었다.

    “좋아요. 환영인사로는 충분합니다.”

    내가 라우라를 떼어내면서 말했다.

    “그런데 뭡니까, 그 꼬락서니는? 저보고 더럽다고 욕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부터 살펴보십시오. 머리카락은 푸석하고 피부는 잔뜩 상했고……이게 전직 공작가 영애이자 열일곱 살 소녀의 행색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목욕이나 하고 살았습니까?”

    “그것이, 그것이……흐윽.”

    라우라가 눈물을 훔쳤다. 솔직히 말하건대, 여태껏 봐온 라우라 중에서 제일 꼴불견이었다. 이건 결코 내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 아니다. 객관적인 견해였다.

    “라피스 님께서 소녀에게…….”

    “……라피스 '님'이요?”

    “아, 아니. 아니다. 라피스 언니가 소녀에게 너무 과분한 업무를 맡긴다!”

    라우라가 얼른 말을 정정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언어 사용이었지만, 나는 상냥한 마음씨의 소유자이므로 너그롭게 넘어가주었다. 대충 어떤 사정인지 예상이 가기도 했고.

    “소녀는 율법이라든지 마을의 관습법이라든지 도통 모르겠다. 그저 효율적인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런데 라피스 언니는……게다가, 그 파르시인가 뭔가 하는 남자까지 덩달아서 소녀를…….”

    “일단 콧물부터 닦으십시오.”

    내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열일곱 살 소녀가 제아무리 찬란할지라도 콧물마저 찬란할 리는 만무했다. 결단코.

    라우라가 코를 팽하게 풀었다.

    “소녀가 꼭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인 것처럼 깔보는 것 아닌가!”

    “……아아. 알겠습니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아무래도 게임에서 당대 최고의 전술가로 이름을 드높인 라우라 데 파르네세 철혈재상께서는, 정치력이 영 꽝이라는 사실에 좌절한 모양이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마왕성 및 영지의 경영이 매우 지난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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