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09화 (209/510)
  • 00209 D급 모험대  =========================================================================

    인근 도시로 무사히 옮겨지고, 의용군은 일단 해산했다.

    파리시오룸 일대는 브르타뉴군이 완벽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하던 대다수의 황실친위대 병력도 전투를 기점으로 전부 복속. 황태후파는 대대적으로 몰락했다. 젊은 여왕이 만들어낸 업적에 프랑크는 경탄과 공포를 보냈다.

    황제파……뭐, 브르타뉴까지 합쳐서 왕당파라고 불러둘까. 왕당파는 확고하게 세력을 굳혔다고 보아도 좋겠지.

    파리시오룸에서 일어난 대학살은 주변 도시로 마치 돌림병이 전염되듯이 퍼져나갔다. 황제가 저지른 실책은 어느 사이엔가 '공화주의자 간신배들에 대한 폐하의 철퇴'로 포장되었다. 북부 일대를 제외하고 프랑크 전역에서 공화주의자들이 학살되었다.

    시장(市長)을 비롯한 지방도시 관료들이 학살을 주도했다. 이른바 '저는 폐하의 편이니 살려주십시오!' 하는 제스처였다. 세상사란 요 지경 요 꼴이다.

    지방 장관들은 여태까지 황제의 편을 들까 황태후의 편을 들까 조용히 관망했다만, 생드니 전투가 결정적이었다. 2만으로 6만을 압살해버린 여왕의 위엄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수수방관한 책임을 다른 곳으로 떠넘기기 위해서 다들 필사적으로 학살에 뛰어들고 있었다. 일부 양심적인 시장이 학살권고에 불응했을 뿐이었다. 대세는 기울었다. 당분간 공화주의자들은 집안에서 자위를 할 때도 조심조심 손을 흔들어야 할 것이다……아직 죽지 않았다면 말이지.

    패배란 이런 것이라고,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에서 퇴직 기사들이 대거 프랑크로 몰려왔다 하는군요.”

    “퇴직 기사들이 말입니까?”

    “예.”

    파이몬이 녹차를 홀짝였다.

    패전 직후에 파이몬한테 불렸다. 패배의 책임이라도 묻는 것일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파이몬이 보기에도 생드니 전투는 일개 사령관이 어찌할 수 없었다는 얘기이다.

    바타비아 공화국 총독관저. 그 심처에 비밀스럽게 지어진 정원에서, 파이몬과 나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얘기했다.

    봄이 성큼 다가왔다. 정원에는 푸르고 붉은 꽃이 드문드문 개화했다.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에도 귀족의 잔당은 꽤나 남아 있으니까요. 그들 중에는 기사단 출신도 제법 많사와요.”

    “과연. 국내에 두어봤자 잠재적인 반란분자이자 반동분자……엘리자베트 통령은 그들을 앙리에타 여왕에게 보냄으로써 일거양득을 취한다. 그런 것입니까.”

    파이몬이 빙그레 웃었다. 양갓집 규수 같았다.

    “안목이 녹슬지 않았군요, 단탈리안.”

    “형편없이 패배해버린 장수에 불과합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엘리자베트 종신통령과 앙리에타 여왕 사이에 협조체제가 갖추어져 있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귀족 출신의 기사단들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처리해서 좋고, 앙리에타 여왕은 막대한 전력을 얻어서 좋다.

    원래 <던전 어택>에서는 두 사람이 대륙의 패권을 두고 처절하게 싸우는데 말이지. 어찌된 영문이지 이 세계에서는 둘이 절묘하게 손을 잡았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원.

    “승패란 병가지상사라지요. 단탈리안은 충분히 제 몫을 해주었어요.”

    “글쎄, 과연 그렇겠습니까…….”

    “적어도 프랑크 북부는 공화국의 영향권에 들어 왔습니다. 프랑크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가 공화파의 손에 들어온 거예요. 이걸 업적이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 하겠어요? 자신을 가지세요.”

    파이몬이 조용히 찻잔에 입술을 갖다댔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

    내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뭐라고 할까, 입장이 바뀐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파이몬의 성격이겠지. 그녀는 실패하는 데 누구보다 익숙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을 건국하려고 자그마치 수백 년을 헌신했다. 느긋하게. 누구보다 여유롭게. 그것이 파이몬의 신념이지 않았을까. 그녀 입장에서는 프랑크 북부 일대를 점거했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소득일지 몰랐다.

    “프랑크뿐만이 아니라 <해방동맹>은 대륙 전역에서 봉기했사와요. 현재 버니시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 카스티야 왕국, 모스크바 왕국에서 혁명이 진행되고 있답니다. 폴리투니아와 칼마르에서도 곧 발생할 예정이에요.”

    “상당히 본격적이군요.”

    내가 찻물로 입안을 적셨다. 뜨거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전신에 긴장이 녹아내렸다.

    “……승산은 어느 정도라고 보시는지.”

    “완벽한 승리는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지방도시 몇 개쯤이야 독립시킬 수 있겠지요.”

    파이몬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얼핏 겸손해보이나 도시의 독립, 즉 자유도시를 양산하겠다는 발언이다. 그 도시들은 대부분 알짜배기 땅으로서 부유하기 그지없겠지. 나라의 세금이 줄어들게 된다. 군주들에게는 치명타이다.

    “요 몇 달 수고했어요, 단탈리안. 당신에게도 휴식이 필요하겠지요. 또 다시 일이 생기면 부르겠사와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음. 오늘 예정이 없다면 소녀와 함께 보내도 괜찮은데요?”

    파이몬이 미소를 지었다. 눈빛이 사냥감을 노리는 암사자처럼 번들거렸다.

    “영광이지만 사양하겠습니다, 파이몬 님.”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을 모두 따먹은 남자’라는 호칭에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후환이 두렵다. 파이몬 저거, 나랑 잤다면서 십중팔구 여자 마왕들한테 소문을 퍼트릴 거란 말이지. 순전히 바르바토스를 놀리기 위해서.

    그리고 바르바토스는 대낫을 들고 나한테 달려오겠지. 녀석은 방긋 웃으면서 ‘다시는 함부로 좆탱이를 놀리지 못하게 해주마, 돼지 새끼’ 하고 뿌리부터 댕겅 잘라버릴 거다. 농담이 아니다. 바르바토스는 그런 짓거리를 진짜로 해버린다.

    파이몬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래 봬도 서큐버스의 여왕인데요. 솔직히 말해주세요. 소녀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파이몬 님은 극상의 미녀입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가 알면 저를 죽이겠죠. 뭐, 바르바토스한테 끝까지 비밀로 지키겠다 약속해주시면 얘기가 달라집니다만…….”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요.”

    파이몬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으이구, 그럴 줄 알았다.

    작별인사를 고하고 정원에서 빠져나갔다. 두어 달 만에 마왕성으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패전으로 인한 마음이 어느 정도 풀렸다. 비밀통로를 이용해서 총독관저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그만 물건을 놓고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이 불안해졌을 때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리는 나무공이 없어졌다.

    “아차, 파이몬 님. 제가 물건을…….”

    다시 돌아가서 양해를 구하려는 순간.

    나는 보고 말았다.

    봄꽃이 피어오르는 정원 한 가운데. 밝은 햇빛을 받으며 파이몬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어깨를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얼굴과 손수건의 틈새에서는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종 한 명 없는 정원에 마왕이 우는 소리가 적막하게 가라앉았다.

    “…….”

    무엇이 슬퍼서 우는 것일까.

    짐작이 가는 구석은 썩어빠질 정도로 흔했다.

    자유로운 공화국이 펼쳐지는 세계가 또 한 발자국 멀어졌다는 사실에서 오는 슬픔. 민중의 목숨이 의미도 없이 희생되고 말았다는 데서 오는 슬픔. 내전을 단번에 끝내고 못하고, 결국 나라 전체를 혼란으로 빠트렸다는 데서 오는 슬픔.

    그녀에게 패배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패배에 익숙해지는 사람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다만 익숙한 척하는 것에 능숙해졌을 뿐이다.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나는.

    일개 고블린 상인, 그것도 자신을 배신한 자가 자살했을 때도 파이몬은 울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사상에 동조해준 백성이 수만 명 학살당한 것이었다. 그녀가 어느 정도의 슬픔에 잠겼을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나를 원망하면 편할 텐데.’

    하지만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파이몬은 긍지 높은 마왕이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총독관저에서 빠르게 빠져나갔다. 지금이야 해방동맹에 협력하는 나이지만 언제든지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배신할 수 있었다. 저런 광경을 보면 나중에 마음이 약해질지도 몰랐다.

    이번에는 보지 못한 것으로 해두겠다. 우리처럼 이기적인 마왕에게 눈물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파이몬.

    *  *  *

    나는 자크리에게 농민병을 통솔하는 전권을 맡기고 던전에 돌아갔다.

    참고로 데이지나 루크는 물론이고, 제레미를 비롯해서 암살단원도 전부 따라왔다. 인원이 꽤나 되는 바람에 중급 순간이동 스크롤을 찢어야 했다. 우선 데이지와 루크는 마을에 남겨두고――오랜만에 부모님과 만나라고 배려한 측면도 있었다――나는 헐레벌떡 마왕성으로 달렸다.

    “집 나간 탕아가 돌아왔다, 마이 러블리 스위트 홈이여!”

    마왕성이라 쓰고 동굴이라 부르는 입구에 다가가서 내가 소리쳤다. 그런데 동굴 외관이 확 바뀌었다. 무슨 신전 입구처럼 큼직한 기둥들이 멋지게 들어섰다. 고블린 일꾼들이 거기에 달라붙어서 세심하게 조각을 새겨넣고 있었다.

    “오오! 벌써 1층은 다 지어가는 거냐.”

    “어이쿠. 이거 단탈리안 전하 아니옵니까.”

    일꾼들의 책임자로 보이는 고블린이 고개를 조아리며 달려왔다.

    “기체후 일향 만강하옵신지요? 별래무양하신지요? 옥체 만안하시온지요?”

    “허허. 그대의 인사만 들어도 벌써 여독(旅毒)이 싸악 풀리는 것 같군.”

    내가 고블린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고블린은 자신의 아부가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더 열성적으로 손을 싹싹 비볐다.

    “소인이 맡은 입구 구역은 벌써 마무리에 들어갔사옵니다. 갖은 노력을 가했사오나, 저희들 실력이 부족한 탓에 감히 단탈리안 전하의 위명을 전부 담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용서하여주십시오.”

    “무얼, 충분해보이는구만. 마왕의 거처가 또 너무 화려하면 인간스러워서 욕 먹어. 적당히 진중한 감이 있어야지. 아니 그러한가?”

    “실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헤헤.”

    주변에서 일하던 고블린들도 입을 모아 ‘과연 단탈리안 전하이옵니다!’ 하고 소리쳤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아아――.

    이 기분이다.

    사람들이 모조리 나에게 굴복하여서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무진장 발버둥치는 이 분위기. 프랑크에 있을 때는 이런 공기를 좀처럼 맛보지 못했다. 역시 마왕이란 마인들 가운데에 있을 때 비로소 반짝거리는 법이었다.

    “하하하. 기분일세! 오늘 거하게 회식하게나!”

    나는 주머니를 꺼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뿌렸다. 고블린들이 경악의 환호성을 지르면서 주변으로 달려들었다.

    “금화다! 금화야!”

    “케르르륵, 월급이 땅바닥에!”

    고블린들이 개처럼 땅바닥을 기면서 허겁지겁 금화를 집어넣었다. 탐욕스럽기로는 마계 제일을 자부하는 종족이었다. 나에게 아부하던 책임자도 언제 체면을 차렸냐는 듯 무리에 끼어들어 케륵케륵 소리를 질러댔다.

    “흐하하! 아직 본인의 주머니는 빵빵하니 걱정하지 말도록!”

    “케륵! 단탈리안 전하 만세!”

    “대륙에서 제일 멋진 마왕 전하 만만세!”

    나는 마음껏 황금비를 뿌렸고 그때마다 고블린들이 만세를 연호했다. 이래서 인간이든 마인이든 일단 돈이 있고 봐야 했다. 전투에서 패배하여 기분이 꿀꿀해졌어도 이처럼 쉽게 고조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동굴에 들어가서 지나가는 길목마다 황금비를 내려주었다. 한창 마왕성 건축에 종사하던 난쟁이와 고블린은 때 아닌 행운에 만만세를 불렀다. 마왕이 귀환하는 길에 이 정도 축하는 필요했다.

    삼십 분 정도 느긋하게 걸어가니 멀리서 라피스가 보였다. 라피스는 언제나처럼 검은색 정복을 차려입고 일꾼들을 선두지휘하고 있었다. 건축자 간부들로 보이는 난쟁이랑 고블린이 그녀를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소리쳤다.

    “라피스으으으, 나다! 단탈리안이 돌아왔다!”

    “…….”

    라피스가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꿈에서도 그리웠던 푸른색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기대하던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라피스는 무표정이었다.

    “예. 그곳에는 예비공간을 확비해두십시오. 창고가 필요합니다. 아뇨, 그곳은 넓게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푸른 닭벼슬 사무소 여러분께서 소재 확보에 수고를…….”

    그녀가 도로 고개를 돌리고 건축업자들에게 뭐라뭐라 복잡하게 지시했다. 일꾼들도 딱히 나에게 집중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멋쩍어져서 슬그머니 그녀한테 접근했다.

    “저기, 라피스? 단탈리안이에요? 두 달 동안이나 보지 못한 마왕이에요? 딱히 화려한 환영식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따뜻한 한 마디라도…….”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지금 일하는 중입니다. 안 보이십니까? 방해되니까 나중에 얘기해주시길.”

    “…….”

    라피스는 언제 어디서나 라피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