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08화 (208/510)
  • 00208 백합 전쟁  =========================================================================

    옆에서 제레미가 뭐라고 반박하려던 그때였다.

    “개소리 집어치워! 브르타뉴의 사냥개한테 굴복할까보냐!”

    제레미보다 앞서서 어느 농민병,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난 중년이 소리 질렀다.

    한 사람이 우렁차게 대꾸하자 그 다음은 쉬웠다. 농민병들은 그렇다! 하고 맞장구치면서 기사에게 욕을 바가지로 쏟아부었다. 바닥에서 돌멩이를 집어들어 던져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기사가 돌멩이 예닐곱 개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쳐서 떨어트렸다.

    “멍청하군. 너희는 이미 패배했다.”

    기사가 말했다.

    “여기 모인 그대들은 패잔병에 불과하다. 모처럼 행운처럼 찾아온 자비심을 제 발로 걷어찰 생각인가? 잘 생각해보아라. 지휘관만 넘겨라. 그대 전원에게 안전한 귀향을 약속…….”

    “글쎄, 그쪽의 여왕 전하를 넘겨주면 고려해볼까.”

    농민병이 비아냥거렸다.

    “소문으로 듣자하니 궁정에서 귀족들이랑 하루가 멀다 하고 질펀한 나날을 보낸다지.”

    “아예 하렘을 만들어서 이백 명의 미동(美童)과 놀아재낀다 하지 않나! 그런데 말이지, 자네들 알고 있나? 브르타뉴의 여왕은 꼭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의 미동과 씹짓을 한다는 것일세.”

    “호오, 그건 왜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이 해버려서 구멍이 도저히 거시기 하나로는 채워넣을 수가 없거든. 하나로 안 된다면 두 개로 할 수밖에!”

    농민병들이 깔깔 웃었다. 휴우. 나는 한숨을 돌렸다.

    반면에 기사의 분위기가 흉악해졌다. 반응으로 보아하건대 영지에서 구를 대로 굴러가며 자라난 기사가 아니고, 왕립 아카데미아에서 나라의 녹을 먹어가며 키워진 기사인 것 같았다. 요컨대 샌님이었다. 저급한 음담패설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네놈들 감히…….”

    “잠깐만, 그래본들 미동은 두 명이잖아. 나머지 두 명은 어디로 갔어?”

    “거시기를 쑤셔서 집어넣을 곳이 딱히 한 군데는 아니잖나. 뭐, 흐흐흐. 브르타뉴의 자랑스러운 여왕 전하께서 씹짓을 할 때는 미동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꼭 거미가 자위질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농민병들이 빵 터졌다.

    “캬아, 거기에는 당할 수가 없겠는걸! 암거미 전하 만만세일세.”

    “걱정하지 마쇼, 기사 양반. 우리가 이래봬도 프랑크에서 씹짓 하면 알아줘. 네놈들의 물렁 자지로는 만족시킬 수 없더라도 우리라면 한번에 여왕 전하를 보내드릴 자신이 있거든. 사양하지 말고 얼른 데려오셔!”

    “…….”

    기사가 이쪽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말머리를 휙 돌려서 떠났다. 농민병들은 더 크게 웃어댔다.

    “물렁 자지 발기부전 새끼!”

    “소세지 가죽이나 벗기고 다시 와라, 애송아!”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옆에서는 제레미도 벙쪄 있었다.

    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본인은 꽤나 과분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 정말로.”

    한심하게 패퇴해버린 아군의 기병보다 급조해서 편성해놓은 의용군이 더 믿음직스럽다니, 농담이면 웃어버리고 말겠으나 현실이라면 헛웃음을 내뱉는 것이 고작이다.

    이들은 나에게 선동당해서 종군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작이 거짓말이어도 그들의 의지만큼은 진짜이다. 나 같은 어릿광대에 비해서 훨씬 더 제대로 된 인간들이다. 이런 민중이 살아가는 땅에서 황제는 내전을 일으키려 든 것인가? 제정신이라 보기 어렵다.

    나는 결심했다.

    “부상자들을 따로 모아라.”

    “예?”

    “순간이동 아티팩트를 써서 후방의 도시로 옮기도록 하지. 적들이 항복을 받아주더라도 부상병에 대한 처우가 좋을 리 만무하다. 시름시름 앓다가 골로 갈 것 아닌가.”

    후방의 도시에 이송시키면 조악하나마 치료를 받을 수 있겠지.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오늘 전투에서 귀족군이 사실상 전멸해버린 이상, 앞으로는 농민병이 더욱 더 중요해진다. 도시 관료들은 브르타뉴에게 항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농민병을 치유해줄 거다.

    제레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사령관 각하. 순간이동 두루마리를 몇 개나 갖고 계시기에.”

    “적어도 이 몸 하나는 지킬 만큼 충분히 갖고 있다.”

    내가 가슴을 툭툭 두들겼다.

    “내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는 잘 알고 있겠지? 뭐, 확실히 수십 골드가 훌쩍 뛰어넘는 아티팩트이지만 벼락부자의 선심이라는 녀석이다. 멋진 모습을 보여준 병사들에게 마땅히 보상이 주어져야지.”

    “하아. 예, 뭐……그리 말씀하신다면.”

    정말로 돈을 물 쓰시듯 쓰시네요, 하고 제레미가 투덜거렸다. 농민병을 먹여살리고 재운 자금이 전부 이쪽의 손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제레미는 알고 있었다.

    부상병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자기는 아직 펄펄하다며 가만히 냅두라고 소리치는 아저씨도 있었지만, 뼈가 아작나버린 사람이 요란을 떨어봤자……. 제레미의 알밤 한방에 기절하고 얌전히 끌려나갔다. 그 광경을 보며 또 농민병들이 와락 웃었다.

    사기는 충분. 여유도 넘쳤다. 전투에 들어서는 데 이보다 적합한 부대는 없겠지.

    우리는 목책의 틈새를 산더미만한 군마로 채웠다. 마치 자그마한 산성이 지어진 것 같았다. 브르타뉴의 군세가 접근해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말이 따로 필요없었다.

    적군은 오늘 새벽부터 지겨우리 만치 반복한 전술을 재현했다. 정말 질리지도 않는 놈들이었다. 궁기병이 이삼십 미터 앞까지 다가와서 일제사격을 펼친 다음, 기병이 창을 꼬나쥐고 돌격했다.

    그렇지만 효과는 상당히 떨어졌다.

    목책에 더불어서 숲의 나무들을 자연적인 방해물이 되어주었다. 필연적으로 화살공격도 기마공격도 지지부진했다.

    더욱이 적들은 지쳤다. 성녀의 예찬가, 순간적인 버프도 이제 효력을 잃었다. 여섯일곱 시간 내내 돌격을 반복한 기병과 군마는 명백히 움직임이 둔해졌다. 평야에서 마주친다면 그래도 위력적이겠으나 이곳은 숲지대. 농민병들은 훌륭하게 적을 세 번이나 격퇴했다.

    “후퇴하라!”

    네 번째 돌격에서도 적군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물러났다. 사냥꾼 출신 궁병들의 저격에 값비싼 군마들만 죽어나갔다. 그렇게 시체가 되어버린 군마는 새로운 방해물이 되어 적군의 돌격을 가로막았다.

    “흐하하! 사제님, 이놈들 별 거 아닙니다요!”

    “갑옷만 삐까번쩍하지 속알맹이는 비실비실합니다!”

    “아아. 훌륭하다.”

    내가 쉰 목소리로 웃어주었다.

    의용군이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러나 유리한 전황이 오래 가지는 못하리라.

    적군에게도 보병대가 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체력과 기력이 만땅인 보병대가. 그들이 다가와서 육박전을 벌이면 우리가 패배할 수밖에 없다. 결국엔 화광반조……마지막에 불타오르는 불빛에 불과하다.

    최선의 결과는 브르타뉴군이 다시 한 번 항복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제법 관대한 조건으로 말이다. 어차피 브르타뉴군은 싸움에서 이겼다. 쓸데없이 보병대를 낭비하고 싶어할 리 없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사항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의 기마돌격이 이루어지고 난 뒤, 적측에서 사자를 보내왔다. 붉은 망토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이었다. 젊은 귀족이 목책 부근에서 소리쳤다.

    “나는 브르타뉴의 준남작 가르종 드 데제이다. 귀 부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은 누구인가!”

    “우리를 통솔하는 지휘관은 아르테미스 여신이시요!”

    한 농민병이 당당하게 외쳤다.

    “그리고 지휘관을 대리하시는 분은 쟝 볼레요외다!”

    “쟝 볼레……아아, <미치광이 사제 쟝 볼레>인가.”

    귀족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처음으로 쟝 볼레가 브르타뉴측에서 어떤 별명으로 불리는지 알았다. 미치광이 사제라니! 최악의 네이밍 센스였다. 하긴 브르타뉴의 암퇘지들에게 센스를 기대하기란 어불성설인가…….

    “쟝 볼레 사제여. 귀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그대들과 우리는 이미 일곱 시간을 오손도손 대화한 것으로 알고 있소만.”

    내가 장창병들 사이로 나아가며 대답했다.

    귀족이 모자를 벗어서 깍뜻하게 인사했다. 나 역시 사제의 예법에 따라 마주 인사했다. 양군에 자연스럽게 일시적인 휴전이 이루어졌다. 귀족은 깃털 달린 모자를 도로 썼다. 그가 거두절미하고 본론에 들어갔다.

    “쟝 볼레 사제,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브르타뉴의 여왕 전하께서는 전사에게 있어 전쟁이란 영원한 투쟁이라 말씀하셨던 것 같소만? 내가 벌써 가는 귀가 먹어서 잘못 엿들은 모양이로군.”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거야 원, 전쟁터에 있으면 사람이 금방 늙어버리오. 안 그렇소? 가르종 드 데제 준남작.”

    “오, 셀레네의 고귀한 사제여. 귀하께서 연설가 중에서 명연설가임을 저에게 입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귀족이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귀하의 명성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으니 말입니다. 여왕 전하께서는 친정하기 전에 철학적인 연설을 자주 즐기시지요. 귀족인 저에게 그 연설은 고귀하고 또한 적합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귀족이기 이전에 한 명의 군인으로 귀하 앞에 있습니다.”

    “좋소. 허면 군인으로서의 가르종이 전달할 말은 무엇이오?”

    귀족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명예로운 항복인가! 아니면 추잡스러운 죽음인가!”

    “…….”

    적나라한 요구였다. 투항할 것이냐,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것이냐.

    내가 침묵하자 목책 건너편의 젊은 귀족이 진중하게 말했다.

    “쟝 볼레 사제. 원숭이 앞에서 재롱을 떠는 격이나, 제가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신념과 집착의 차이점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신념이란 이성적인 것이고, 집착은 감성적인 것이오.”

    “모범적인 답안이군요.”

    귀족이 미소를 지었다.

    “군인이 된 자로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전투에서 승리의 가능성을 믿으며 올곧게 나아가는 것이 신념이며, 단지 패배를 향해 일직선으로 질주하는 것이 집착이라고.”

    나는 귀족의 논조를 이해했다.

    “패배함으로써 얻는 것도 있소.”

    하지만 지금은 한번 튕겨줄 필요가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하고 얌전히 물러나서야 항복의 조건이 엄격해질 뿐이었다. 나는 짐짓 엄격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것이 한 나라의 자존심이라면, 결코 추잡스러운 죽음은 아니지. 본인으로서는 항복이 더 명예롭다 느껴질 이유가 없소.”

    “물론 역사서에서는 쟝 볼레와 그의 농민병을 칭송하겠지요. 하지만 대중의 칭송이란 대저 흙탕물로 몸을 씻는 격이지 않습니까? 나라의 자존심을 앞세우며 무고한 백성을 전쟁터에서 죽게 내버려둔 죄, 후대의 현자들은 절대로 잊지 않겠지요.”

    “…….”

    나는 고민하는 척 뜸을 들였다. 먹혔다고 생각한 것일까, 귀족이 추가타를 날렸다.

    “백성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쟝 볼레 사제. 내전의 책임을 엉뚱하게 백성들이 짊어질 이유는. 그것도 피와 살로 짊어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자 뒤편에서 농민병들이 아우성쳤다.

    “아니, 저놈들이 먼저 침략했음서 뭔 개소리야! 황제 폐하를 유폐시킨 게 네놈들 아니냐!”

    “사제님! 들을 것도 없구만유. 저 기생오라비 낯짝을 깔아뭉갭시다요!”

    “브르타뉴 애새끼들이 뒈지기 전에는 눈꺼풀 하나 감을 수 없다! 우우우!”

    나는 서서히 오른손을 들었다. 병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뚝 하고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진 가운데 내가 말했다.

    “……투항한 백성을 해치지 않겠다는 보장은?”

    “모든 여신께 맹세코. ……라고 말씀하셔도 불안감이 남겠지요.”

    귀족이 멋쩍게 웃었다.

    “여왕 전하께서는 다른 곳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기즈 공작의 잔당과 공화국 군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귀하의 의용군은 잇몸에 낀 가시에 불과합니다.”

    “불편하지만 단지 불편할 뿐이라.”

    “바로 그렇습니다.”

    귀족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맹세했다.

    “모든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십시오. 어차피 귀하의 군대에는 몸값을 받을 만한 병사도 없습니다. 자유로워진 손, 자유로워진 발로 동쪽으로 향하십시오. 가문과 주군의 명예에 맹세하건대, 제 소대가 여러분의 신원 보증인이 되어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호위하겠습니다.”

    “…….”

    나는 두 눈을 감았다.

    한낮의 태양이 눈꺼풀 너머에서 어둡게 비쳐왔다. 생드니 평야의 태양을 얼굴로, 온몸으로 곱씹었다. 햇살이 따갑게 살갗에 스며들었다. 이것이 나의 첫 패전(敗戰)임을 각인시키면서.

    입을 열었다.

    “투항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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