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7 백합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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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초조하게 평원의 혈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섯 시간에 걸친 싸움에서 여왕의 기병은 꽤나 많이 상했다. 갑옷이 두꺼운 탓인지 사망한 적군은 적었으나, 주로 군마들이 수두룩하게 죽어나갔다. 덕택에 아군은 적군에 비해 기병전력에서 우위를 점했다.
“여엉차!”
“얼른 끌지 않고 뭐해!”
목책 부근에는 원래 세계의 말보다 1.5배는 덩치가 크고 사나워보이는 말들이 쓰러져 꼴딱꼴딱 숨을 쉬고 있었다. 아군의 장창병들은 조심스럽게 놈들을 찔러 죽였다. 시체가 된 말들은 목책의 틈새로 끌려나와 또 다른 방벽으로 사용되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돌파에 성공했네요.”
“……아아.”
어딘지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군, 하고 제레미에게 맞장구치며 생각했다.
먼지가 전장을 뒤덮었다. 앙리에타 여왕으로 보이는 인물은 검을 높이 세우며 또 다시 먼지구름으로 들어갔다. 대대적인 기병전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돌파를 허용했다는 것이 그닥 희소식은 아니리라.
“우리군이 패배할까?”
“……그럴지도 모르겠는데요.”
내가 한숨을 쉬었다. 패배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얘기이지 않은가.
“저놈들은 괴물인가. 병력에서 우리가 앞섰다. 아니, 전장에서도. 궁기병을 제외하고는 모든 요소에서 우리가 분명히 유리했다. 전략이 고작 전술 따위에 패배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말이냐.”
“…….”
제레미가 우물쭈물거렸다. 아마도 내가 화내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었다. 나는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궁기병의 일격을 얻어맞았을 때 분노가 치밀었던 것은, 아우스테를리츠의 혈전에서 분명히 기병들이 궁기병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투에서 그에 대해 전혀 방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나의 실착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앙리에타 여왕군은 순전히 실력으로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선 분노할 일조차 없었다. 그저 심란할 뿐이었다.
“제레미, 자크리를 불러와라.”
“예.”
나는 사령관이다. 언제까지고 한숨만 쉬어서야 꼴불견이겠지.
월맹군에 참전했을 때부터 이 세계의 병법서란 병법서는 무작정 탐독했다마는, 승리했을 때보다 패배했을 때 지휘관의 역량은 가장 극명하게 발휘된다고 한다. 이제부터 패배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자크리가 다가왔다. 이 옹골찬 난쟁이 용병단장은 아예 핏물로 샤워를 하고 왔다.
궁수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떨어지는 우리 좌익에서 브르타뉴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전적으로 용병단 덕분이다. 나의 연설 같은 건 전쟁터에선 부차적일 따름이다. 용병단이 농민병의 방진과 사격을 통제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자크리. 솔직하고 가감없이 얘기해주게. 아군의 기병이 패할 것 같은가?”
“……승패란 함부로 재단하기 어려운 일입니다만, 소인이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자크리가 덤덤하게 얘기했다. 백 년을 넘게 전쟁터에서 구른 난쟁이 용병에게 승패란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일지 몰랐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틀림없이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기병지휘관이겠지요. 대륙은 적어도 이십 년 동안 여왕의 무훈에 고개를 조아릴 것입니다. 아마도 별명은 피투성이(Blutbefleckt)의 앙리에타 정도가 되지 않을련지.”
“피투성이 브르타뉴인가.”
나 역시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한 별명이 아니고 뭔가.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누구보다 선두에 서는 여왕……그야말로 피투성이라는 멸칭에 어울린다. 그녀는 프랑크인과 브르타뉴인의 피를 빨아마시고 결국에는 대륙의 패자가 되고자 하겠지.
앙리에타 여왕을 조기에 퇴장시키고자 했다. 난세는 위기이나 동시에 영웅한테는 기회였다. 앙리에타 여왕이라면 <던전 어택>에서 그러했듯이 프랑크의 혼란을 기회로 일약 패자로 부상하리라. 그러므로 초장부터 짓밟야만 했다.
지금이라면, 명분과 전략 모두 나에게 유리한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리였는가…….
어쩌면 앙리에타 여왕 또한 나와 똑같이 생각했던 것일까. 앙리 드 기즈 공작으로 대표되는 '유능한 귀족'을 조기에 진압해야겠다고 판단했을까. 그렇기에 일부러 '우리가 유리하다'라고 판단하게 만든 다음에 이곳으로 집결하게끔 만들었는가…….
“부럽군.”
앙리에타에겐 강력한 군대가 있었다. 책략이나 계략을 어지럽게 짤 필요없이 그저 이쪽을 뭉개뜨리기만 하면 될 만큼 강력한 군대가. 그것은 게임으로 따지자면 레벨과 같았다. 일종의 절대적인 수치였다.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약자이다. 민중을 선동하고 합종연횡을 획책해서 부족한 힘을 어떻게든 떼워야만 한다. 하지만, 강군(强軍) 앞에서는 아무래도 모잘랐던 모양이다. 서열 제71위 마왕의 한계이겠지.
내가 말했다.
“자크리, 아군의 기병이 패퇴한다면 돌아올 곳은 뻔하다.”
“예. 이쪽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좌측은 강물이, 우측은 숲이 가로막았다. 전방에는 브르타뉴군이 버티고 있다.
일패도지한 아군의 기병 전력이 도망칠 곳은 오로지 후방뿐……즉, 목책이다.
기병들이 살려달라면서 아군의 목책으로 뛰어들 것이다. 차라리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라면 다행이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막아내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아군이 들이닥친다. 죽일 수도 없다.
목책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지고, 장창병 방진은 혼란에 휩싸인다. 아군이 도리어 아군을 망가트리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좋다. 앙리에타 여왕은 바로 그 순간을 노리고 돌격해올 게 분명하다.
내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보니 어이가 없군. 마치 여왕은 우리가 기병을 꺼내들기까지 기다린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성녀라는 패를 여태까지 아껴둔 이유가 있었던 게야. 생드니 평야는 아군이 아군에 압살당하는 지옥도가 되겠지…….”
“어쩌시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후퇴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후퇴하면 자칫 패전의 책임을 우리가 뒤집어쓴다. 자크리. 우리 병력을 숲에 바싹 붙여라. 나무들을 또 다른 방벽으로 삼아 끝까지 응전한다. 앙리에타 여왕은 항복을 권고해올 거야.”
“예, 사령관 각하.”
우리는 바쁘게 움직였다. 농민병을 숲에 배치시켰다. 숲은 기병들이 공격해오기에는 최악의 입지조건이며, 따라서 우리 입장에서는 최고의 방어전선이다. 목책들도 떼어다가 숲 앞으로 옮겼다.
문제는 우리가 배치를 채 끝마치기도 전에 아군의 기병이 도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못해도 십 분 정도는 더 버텨주지 않을까 싶었다만, 기병들이 혼비백산해서 소리치는 말에 사정을 알아차렸다.
“기, 기즈 전하께서 패사하셨다!”
“후퇴하라! 후퇴해서 대열을 가다듬어라!”
총사령관인 앙리 드 기즈 공작이 전사한 것이었다.
보아하니 영광스럽게도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와 일검을 나누다가, 즉 챔피언끼리 일기토를 겨루다가 모가지가 날아간 듯했다. 아름다운 여왕이 일기토에서 적장을 물리쳤다라. 전 대륙의 호사가들이 일제히 발기하겠군. 나도 패장에 속하지만 않았다면 기꺼이 한발 뽑아줄 용의가 있었다. 빌어먹을.
아니나 다를까, 기병들은 후퇴하면서 아군의 진영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적군에는 용감하게 맞서싸우던 장창병의 진형이 아군에는 어쩔 도리 없이 무너졌다. 그 뒤로 곧바로 브르타뉴의 기병들이 바짝 추격해오는 것이 보였다.
“차라리 싸우다 죽을 것이지, 쯧.”
프랑크 귀족들의의 기병대는 달아나면서 아군의 보병 전열을 짓이겼다. 다만 그것은 중앙과 우익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농민병들에게 지시해서, 아군이든 적군이든 목책에 접근하는 기병은 모조리 쫓아버리라고 명령했다.
기병들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우리는 아군이다! 적이 아니야!”
농민병들이 장창을 쑤셔대며 우우우, 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옘병, 패배한 아군은 더 이상 아군이 아니다!”
“겁쟁이는 꺼져라! 좆탱이는 달고 있냐, 새끼들아!”
애당초 그들은 나의 연설에 감복하여 종군했다. 기병과 같은 고급전력은 대부분 귀족이나 귀족의 하수꾼이 맡았고, 농민병은 그들에게 적대적이었다. 기병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기랄! 어처구니가 없군!”
“어서 다른 곳으로 가세!”
그들은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말머리를 돌렸다.
내가 사령관을 맡은 좌익은 피해가 최소화되었다. 우리는 아군을 내쫓으면서 차근차근 숲에다가 방벽을 마련했다.
그러나, 황태후파 귀족이나 바타비아 공화국이 맡은 곳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쪽에는 숲과 같은 자연적인 방해물이 없었다. 거기에다 기병대는 그들과 똑같은 소속의 군대였다. 세상에 어떤 지휘관이 자신의 군대를 내쫓을 수 있겠는가?
보병 진형이 망가졌다.
아군의 기병이 패퇴하면서 자기네를 짓밟았고, 곧이어서 브르타뉴군이 밀어닥쳐서 다시금 기마돌격을 퍼부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병대에게 버티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리였다.
장창병들은 목책 방어선에서 조금씩 밀려났다. 그중에는 패배를 직감하고 기병과 함께 도망치는 보병도 적지 않았다. 쇠약해진 댐이 무너지듯이 이곳저곳에서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곳에 브르타뉴군이 랜스 차지를 부딪혀오자 모든 것이 끝났다. 댐이 무너졌다. 장창병과 궁병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
“…….”
농민병들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연했다. 눈앞에서는 학살이 벌어졌다.
방진이 시시각각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대열을 이루지 못한 장창병은 기병의 사냥감에 불과했다.
몇몇 보병이 필사적으로 대오를 지키려 발버둥쳤으나, 기사들이 그동안 고생시켰던 대가를 돌려주겠다는 듯 오러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소수의 보병으로 기사들을 막기란 불가능했다. 죽을 수밖에.
이럴 때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인물은 총사령관 이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기즈 공작은 이미 머리통과 몸통이 분리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패배가 확실해지자 저항을 멈추고 도주했다.
“어리석기는…….”
내가 중얼거렸다.
도망친다는 것은 적군의 기병에게 등을 내보인다는 얘기였다. 두 발로 도망치는 보병, 그리고 군마를 타고 추격하는 기병. 여기서 어떤 결과가 이어질지는 자명했다. 차라리 시체가 된 것처럼 땅바닥에 누웠으면 조금이라도 생존 가능성이 올랐을 텐데.
그나마 맹렬하게 저항의지를 불태우는 일부 용병대가 있었다. 그들에게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하나의 진실이란, 의지가 오러를 막아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용병대는 예외없이 참혹하게 도륙당했다.
브르타뉴군은 신나게 적병을 약탈했다. 수레를 강탈하고 시체의 무구를 발가벗겼다. 그게 전부 돈벌이였다. 앙리에타 여왕이 용감하게 싸운 병사들을 칭찬하는 의미에서 자유로이 약탈해도 괜찮다고 명령한 것 같았다.
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브르타뉴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향했다.
마지막까지 진지를 만들어서 사수하고 있는 군대. 우리 의용대였다.
꽤나 직책이 높아보이는 기사가 이곳으로 다가왔다.
“흐음.”
기사는 목책을 쓰윽 살펴보더니, 다음으로는 숲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손쉽게 돌파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까. 그가 소리쳤다.
“지휘관을 넘겨라! 지휘관을 넘긴다면 일반 병사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
나는 순간 철렁했다. 보나마나 저건 거짓말이었다. 지휘관을 넘겨받은 다음에 우리를 섬멸할 생각이었다. 기초적인 기만책이었으나, 농민병들이 거기에 속아버리면 끝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