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06화 (206/510)

00206 백합 전쟁  =========================================================================

롱그위 성녀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 힘은 오직 내가 증명할지어니.

여인의 목소리가 창공을 열어재꼈다. 전투 내내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국가에 오로지 한 명, 대륙에 열두 명만이 오를 수 있는 직위. 합스부르크의 성녀가 마왕군과 밀통한 죄로 사형당한 지금, 오직 열한 명밖에 없는 무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일찍이 정신은 신이었으나 평민이 되고 노예가 되었나니. 여신이여, 여기서 다시금 필멸자가 그대를 노래함을 축복하소서. 다시금 위대한 부족의 발로 춤을 추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다시금 울창해지는 것을 용납하소서.

기병들이 일렬로 나란히 늘어섰다.

성녀의 노랫소리가 그들의 으깨지고 부러진 갑옷 틈새로, 투구와 몸통 갑옷 사이로, 먼지와 핏물에 지친 말갈기 사이로 스며들었다. 전투의 함성에 놀라 숲속으로 달아났던 정령들마저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앙리에타에게 남은 기병은 육천. 그들 전원에게 약간이나마 기력을 되찾아주는 일은, 제아무리 성녀일지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롱그위 성녀는 온몸이 바늘에 찔리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녀는 그러나 성녀였다. 이마를 찡그리지도 않았다. 평온에 잠긴 것처럼 온화하고 묵묵하게 기도를 올렸다.

─ 실로 죽음은 우리의 나날에서 먼 곳에 있나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자유를, 죽음을 가까이서 마주할 자유를 기꺼이 누리고자 합니다. 그것이 필멸자가 유일하게 향유하는 불멸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아테나 여신이시여.

푸른색 빛무리가 잠시 병사들과 군마들에게 깃들었다가 사그라들었다. 여섯 번 넘게 적진으로 돌격했던 기병들은 사막에서 한 모금의 냉수를 마신 여행자처럼 순간적으로 기력이 되돌아온다 느꼈다. 군마들은 여섯 시간 전에 그러했든 짐승의 울음으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성녀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 오늘 이들이 죽음을 죽는 것을 허락하소서.

그 말을 끝으로 롱그위 성녀가 낙마했다. 혼절한 것이었다. 주변의 시종이 떨어지는 성녀의 몸을 안전하게 받았다. 단지 일 분 정도 기도문을 올린 것인데도 성녀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훌륭하다, 자클린 롱그위. 나의 친우여.”

앙리에타 여왕이 말발굽을 한 발자국 나아갔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왕은 말머리를 뒤로 돌렸다. 수천의 기병이 맨앞에 있는 여왕을 바라보았다. 그 증기를 뿜는 시선에 붉은 머리카락의 여왕은 가볍게 웃었다.

“친애하는 나의 제군. 군인은 언제 패배하는가?”

목걸이에 새겨진 성량 마법을 발동시키며, 여왕이 말했다.

“전투에서 질 때 군인은 패배하는 것인가? 전쟁에서 질 때 군인은 패배하는 것인가? 사령관을 잃었을 때, 군기를 약탈당했을 때 군인은 패배하는가? 그렇지 않다.”

여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사들이여. 그대들의 싸움은 다른 어딘가에 있다.”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코를 툭툭 가리켰다.

“바로 여기이다. 이곳이 바로 우리의 싸움터이다. 동료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눈을 돌릴 것인지 말 것인지, 바로 거기에 그대들의 싸움터가 놓여 있다. 적군이 휘둘러오는 창칼에 눈을 감은 것인지 말 것인지, 바로 그곳에 그대들의 싸움터가 놓여 있다. 그대들이 참혹한 고통에 맞서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다만 그곳에 그대들의 전쟁터가 놓여 있음이라.”

앙리에타 여왕이 땅을 가리켰다.

“여기 한 명의 인간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평범하게 살고 있다. 평범하게 태어나서, 평범하게 가족과 정을 나누고, 그렇게 육십 년의 세월을 보내어 죽는다. 그리고.”

왼손을 번쩍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곳에도 한 명의 인간이 있다. 그녀는 달의 높이에서 뛰어내린다.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이 대지를 향하여 낙하한다. 그녀는 육십 년의 시간 동안 낙하해서――이윽고 떨어져 죽는다. 땅에서 육십 년을 살아서 죽은 인간, 하늘에서 육십 년을 떨어져서 죽은 인간. 두 죽음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왕의 육천 병사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앙리에타의 어조는 단호하고 낭랑했으며, 단단한 나무뿌리 그리고 나뭇가지와 같은 것이 여차하면 나뭇잎처럼 흩날려버릴 말의 단편들을 단단하게 쥐어잡았다.

“어쩌면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는가? 평범하게 육십 년을 지상에서 보낸 삶과 단지 추락하기만 할 뿐인 삶, 두 개에는 어쩌면 똑같지 않겠는가. 제군들. 이것이 우리 인류의 문제이며 영원한 문제요, 질문 중의 질문이다. 무엇이 다른가. 그대들 역시 몰락하고 있지 않은가? 무언가가 썩어가며 부폐하고 있지 않은가.”

여왕이 한 마디의 숨을 쉬고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그대들은 전쟁터에 서 있다. 그대들은 질문을 강요당한다. 전쟁터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질문을 제일 강렬하고 매몰차게 강요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통탄할지어다! 오늘은 질문을 피하고 싶어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니.”

앙리에타 여왕이 웃었다.

“매순간. 매순간마다 질문은 태풍처럼 그대들에게 몰아치리라. 동료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대는 눈을 돌릴 것인가? 적이 창을 찔러올 때 눈을 감을 것인가? 그대가 참혹한 부상을 입어 죽어나갈 때, 죽음으로부터 눈을 돌릴 것인가?”

군마 수천 마리가 앞발을 뒹굴기 시작했다. 옅은 먼지구름이 말발굽을 스쳤다. 기병들은 숨을 몰아쉬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것을 보며 앙리에타 여왕이 소리쳤다.

“제군이여. 그대들은 지금까지 살았되 산 것이 아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대들은 과연 살아있었는지, 아니면 단지 죽어가고 있었는지 시험받는다. 이것이 그대들의 승리이고 패배이다. 전투이니 전쟁이니 하는 것은 이 질문 중의 질문에 견주어볼 때는 한낱 부차적인 찌꺼기에 불과하다!”

앙리에타의 흑색 군마가 앞발을 크게 들어올렸다. 뛰어오른 눈높이에서 여왕은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남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천천히 몰락할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한 발자국을, 다시 한 발자국을 나아갈 것인가! 전사들이여. 시체들이 돌아다니는 대륙에서 인간으로 거듭나라! 발걸음을 내딛고 고난에 맞서라. 진정으로 거머쥘 가치가 있는 삶은 그 고난 너머에 존재한다!”

앙리에타 여왕이 랜스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기병들이 포효했다. 군마들이 울부짖었다. 육천 개의 랜스가 허공을 찢어발기려는 듯 찔렀으며, 일만이천 개의 앞다리가 대지를 뭉개려는 듯 짓밟았다.

“그리하여 오늘 죽고자 하는 인간은 살아갈 것이고, 살고자 하는 인간은 죽어갈 것이니! 나는 단 한 번도 나의 군대가 패배했다 생각하지 않았으며, 영원불멸 그러할 것이다. 전사들이여! 팔라스 아테나의 아들딸들이여! 위대한 역설로서 승리할 이들이여!”

앙리에타 여왕이 말머리를 전방으로 돌렸다. 그 방향에는 일만이천 명의 프랑크 기병. 여왕의 군대보다 두 배가 많으며, 전투의 피로를 전혀 받지 않은 군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여왕은 소리쳤다.

“――돌격하라!”

여왕이 가장 먼저 말발굽을 딛었다.

기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말허리를 두들겼다. 군마들이 야생의 숨결을 내뱉으며 앞으로 걸었다. 그중에는 브르타뉴인도, 프랑크인도, 버니시아인도, 카스티야인도 있었다. 기사가 있었으며 용병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들은 오로지 한 사람의 왕만을 섬겼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단 한 사람이 그들을 이끌었다.

그에 맞서서 일만이천의 프랑크 기병도 움직였다. 총사령관인 기즈 공작도 그곳에 있었다. 공작은 명예로운 기사이자 훌륭한 대귀족답게 자신의 기병대와 함께했다. 공작 역시 연설을 펼쳤으며, 프랑크의 기병들도 용기백배하여 말을 몰았다. 양군의 사이가 점차 좁혀졌다.

“적은 일만이다!”

앙리에타 여왕이 소리 질렀다. 그녀는 성량 마법을 축소시켜서 주변의 귀족들한테만 소리가 들리도록 조정했다.

“두 배의 병력이다! 무서운가, 제군들!”

“아닙니다!”

“우리는 두 번을 돌파하여 적군을 네 조각으로 찢어발긴다. 이천오백이 되어버린 적군의 조각들을 차례대로 분질러버리는 것이다. 알겠는가. 적군이 두 배인 게 아니다. 우리가 두 배이다!”

앙리에타 여왕이 포효했다.

“나는 두 배나 되는 병력으로 적을 섬멸시키지 못하는 제장을 둔 적이 없다!”

“그렇습니다, 여왕 전하!”

“모가지를 열 개조차 따지 못하는 장군이 생긴다면 오늘이 장삿날인 줄 알도록!”

여왕이 투구 덮개를 닫았다. 대귀족인 참모들도 뒤따라 투구를 닫았다. 무사가 아닌 일부 참모를 제외하고 최측근 귀족은 모두 여왕을 따라나섰다.

앙리에타가 끄는 군마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명마였다. 자연스럽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뒤를 여왕보다는 못하지만 명마를 탄 귀족 지휘관들이. 다시 그 뒤를 육천의 병력이 따랐다. 이들은 여왕을 선두로 삼아 삼각 쐐기가 되어 평야를 질주했다.

트롯. 적군과 이백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기병들은 속보로 말을 몰았다. 병사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캔터. 백 미터 떨어진 시점에서 기병들은 말고삐를 내리쳤다. 병사들의 함성보다 군마들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랜스의 창끝이 앞으로 향했다.

“여왕 전하 만세!”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만세!”

갤럽. 사십 미터 가량 접근하자, 군마들은 최고 속도로 땅바닥을 내딛었다. 창대에 매달린 깃발이 요란하게 아우성을 쳤다. 일초의 시간이 말발굽에 짓밟히고――양군이 격돌했다.

─ 콰지직! 콰작!

기병과 기병이 충돌했다. 먼저 8미터짜리 기사용 랜스가 오러를 소용돌이치며 적의 심장을 가슴째로 뚫어버렸다. 3미터에서 5미터에 이르는 나머지 랜스들이 서로가 서로를 꿰뚫었다.

쇠창이 피에르라는 병사의 오른쪽 가슴에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창의 위력에 피에르는 군마에서 요란하게 떨어져 흙먼지 속에 얼굴을 처박았다.

어떤 창끝은 막시밀리안이라는 기사의 관자놀이 뒤쪽으로다 뚫고 나왔으며, 덩치 큰 막시밀리안은 땅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다. 시체의 화려한 무구들이 한참이나 요란하게 울렸다.

데오레라는 병사는, 랜스는 피했으나 해일처럼 닥쳐오는 충격에 버티지 못하고 낙마했다. 데오레가 먼지 속에 벌렁 나자빠져서 숨을 힘겹게 몰아쉬었다. 데오레는 전우들을 찾아 두 손을 내밀었다. 그때 한 마리의 군마가 먼지구름을 휘몰아치며 데오레의 배꼽을 짓밟았다. 말발굽은 사정없이 배를 뭉개트렸으며, 속창자가 터져 땅바닥으로 쏟아졌다. 데오레는 눈을 뒤집고 절명했다.

“크하아아아아!”

앙리에타가 랜스를 집어던지고 곡도를 뽑아들었다. 곡도가 푸르게 빛날 때마다 적병의 가슴이 으깨어졌고 팔뚝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붉은 피가 낭자했다. 창이 갑옷을, 검이 검을 들이받아 깨질 듯한 굉음이 울렸다. 전사들이 노호를 내질렀다. 단 한 번의 격돌로 평야는 온통 핏물과 창자로 물들었다. 사방에서 살육의 비명이 엇갈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의 귀를 먹먹하게 마비시켰다.

여왕은 무아의 경지가 되어 곡도를 휘둘렀다. 애마가 적병의 말을 물어뜯고 밟고 내팽개쳤다. 여왕과 군마는 인마일체가 되어 전방을 막아서는 것들을 분쇄했다. 여왕이 지나가고 남은 곳에는 손목과 팔뚝, 머리통 따위가 핏빛 선을 그리며 잠시간 부유했다. 그리고 사정없이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전하! 전하!”

대귀족 한 명이 소리쳤다. 여왕은 퍼득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눈앞에는 적병이 사라지고 없었다. 저 멀리에 적군의 목책들과 장창병들이 보였다. 돌파했다! 앙리에타 여왕은 능숙하게 말머리를 돌리며 검을 치켜들었다.

“반전하라! 나를 따르라!”

여왕의 군사는 일만이천의 프랑크군을 가로질렀다. 한 자루의 대검처럼 겹겹이 쌓인 인의 장막을 일도양단했다. 이제는 두 조각이 되어버린 적군을 네 조각으로 찢을 차례였다. 그때 여왕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적군의 한 가운데. 하얀 장미가 새겨진 깃발.

앙리에타 여왕이 광소했다.

“그곳에 있었는가, 앙리 드 기즈!”

군마가 거대한 탄환이 되어 튀어나갔다. 명령이 필요없었다. 가장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 저곳에 있다는 사실을 앙리에타의 흑색 까마귀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몬스터를 애비로 둔 군마가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뱉어대며 돌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