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05화 (205/510)

00205 백합 전쟁  =========================================================================

좋지 않은 예감은 꼭 현실로 이루어졌다.

적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쉼없이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군마의 앞다리가 격렬하게 질주했으며, 기사들은 랜스를 이쪽에 때려박은 다음 돌아갔다. 제1열 궁기병, 제2열 마상돌격. 이렇게 한 단위의 공격이 일곱 번 넘게 되풀이했다.

징그러운 놈들이었다. 나는 한숨인지 비명인지 모를 말을 뱉었다.

“브르타뉴의 군마는 밥도 먹지 않는다더냐!”

전투가 시작한 지 다섯 시간이 넘었다. 그동안 브르타뉴의 어떤 중대는 어림잡아서 열두 번을 돌격했다. 갑주가 찌그러졌는데도 기병들은 개의치 않고 장창병들에게로 몸을 내던졌다.

“그래도 조금씩 기세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제레미가 단칼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저들의 인마(人馬)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살아숨쉬는 생명체이니까요. 지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우리 병사들도 거의 탈진할 지경이라는 것이 문제이지. 제기랄.”

장창병들은 명백히 지쳐가고 있었다.

적군의 기병이 한 명 죽어나갈 때 아군은 세 명에서 다섯 명이 죽었다. 네 배에 가까운 교전비율이었다. 조금 전에 중앙과 우익에 전령을 보내봤는데, 상황이 이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군은 총 5,1000명에 이르는 보병을 말 그대로 처박았다. 덕분에 목책 방어선을 사수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만약에 적군과 아군의 병력차이가 세 배 이하였다면……상상하기 싫은 사태가 벌어지고도 남았다.

‘왜 제파르 대장이 인간의 기병 전력을 끔찍하게 여겼는지 알겠군.’

비정상적으로 강력했다. 오러를 신체 바깥으로 뽑아낼 줄 아는 기사는 물론이고, 기사의 시종으로서 오러를 수련해온 기병들까지.

일단 랜스 길이부터 무지막지했다. 5미터에서 8미터라니! 오크들로 장창병 방진을 꾸리지 않는 이상에야 누가 이들을 야전에서 대적하겠는가.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이라면 바르바토스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기사단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던 제파르 대장은 또라이 중에 상또라이였다. 저놈들은 인간종이 아니었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 시발스러운 것이었다.

“또 돌격해오는군요.”

“빌어먹을. 개새끼보다 더 개 같은 개자식들.”

수천의 인마가 평야를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었다.

“내 다시 기사단과 회전을 치른다면 맹세컨대 파르시의 좆을 빨겠노라!”

“그건 또 누구예요? 어휴.”

제레미가 한숨을 푹푹 쉬면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전방으로 갔다. 만에 하나 기사가 난입해 들어올 경우에는 제레미의 암살단이 활약해줘야만 했다. 그 암살단원도 벌써 다섯 명이 죽었다.

“콜록, 콜록……썅.”

다시 한번 성량증폭 마법으로 병사들을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내 목소리는 이미 깡마른 노인처럼 쉬었다. 그게 세 시간 전의 일이었다.

랜스에 꼬챙이가 된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군마가 구슬픈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악바리가 되어 있었다. 농사를 짓던 백성이 피와 눈물 범벅이 되어 울부짖었으며, 브르타뉴인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에서 희생되었다.

“사제님……이 친구를 살려줍쇼…….”

한 병사가 부상병을 부축하며 다가왔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또였다.

“친구가 팔이 잘렸습니다. 사제님, 부디 자비를…….”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내 눈으로 봐도 일목요연했으니까. 부상병은 오른팔과 왼팔이 팔꿈치부터 잘려나갔다. 절단면이 무서울 정도로 깔끔했다. 운 나쁘게도, 하필 제3급 이상의 기사가 달려든 것이었다.

병사가 나의 발끝에 키스하며 몇 번이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저랑 동향인 놈들 중에서 이제 이놈밖에 안 남았습니다요. 얘까지 죽어버리면 제가 마을사람들을 뭔 낯빛으로 보겠습니까……사제님.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쇼……!”

“이보게. 나의 동지여.”

내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목구멍이 묵직했다. 이건 정말 빌어먹을 짓이었다.

“안타깝지만 여신의 사제도 죽은 자를 되살릴 수는 없네.”

“예?”

“그 친구는 이미 죽었네.”

병사가 부상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상병, 아니 전사자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더 봐야겠고 더 말해야겠다는 듯이. 병사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자신의 친구와 나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어? 어? 예? 아까 전까지, 아니, 바로 전까지 말을 했는데……예?”

내가 방금 한 말을 철회해달라고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아마도 병사가 맞겠지. 바로 전까지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버텨라,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라, 곧 사제님께서 치유해줄 거다, 조금만 더……아군의 장창병 방진을 겨우겨우 빠져나왔다. 그러는 도중에 부상병은 죽었다.

동향의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건내지도 못하고. 그뿐이었다.

병사는 전사자의 뺨을 이리저리 때렸다. 눈을 뜨라고, 일어나라고 말했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제서야 병사는 친구가 영원히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음을 터트렸다. 수염이 거칠게 난 중년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반쯤은 먼지에 잠긴 울음소리였다.

“…….”

나는 병사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위선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위선이라도 필요하겠지. 어차피 전쟁터에 선 따위는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적군이 먼저 지쳐 쓰러지든지, 아군이 먼저 붕괴되든지, 둘 중 하나였다. 버티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지휘관들이 생각하는 것은 대충 비슷한 것일까.

“공작 전하께서는 예비대를 투입하시고자 합니다.”

총사령부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내가 맡은 좌익 이외 다른 곳에서도 지휘관들은 '어떻게든 해야 한다'라고 결심한 듯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내가 만이천 명의 병사를 맡았다면 총사령관인 기즈 공작은 물경 육만삼천의 목숨을 등에 짊어진 셈이었다. 일만과 육만은 차원이 달랐다. 단지 수사학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이건 정말로 차원이 달랐다. 심리적인 압박에서 비교조차 안 되리라.

“예비군이라니? 우리군에 아직 예비대가 남았는가?”

“아군의 기병 전력. 공작 전하께서는 그것을 이용하시려는 계획입니다.”

전령의 보충설명에 내가 아, 하고 깨달았다.

왜 여태까지 고려하지 못했을까! 그렇다. 적군에게 기병이 있듯이 우리한테도 기병이 있었다. 그것도 일천의 기사에다 일만의 기병이. 비록 브르타뉴의 강병보다야 질이 떨어질지 모르겠으나, 적군은 지금 지쳐 있었다.

반면에 아군의 기병은 쌩쌩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과연……본인의 휘하에는 기병대가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공작 전하께서 최선의 수를 고안해내신 것 같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령이 말했다.

“우익의 사령관께서도 작전에 동의하셨다고 말씀을 전해도 되겠습니까?”

“아아. 어차피 본인에겐 기병이 없으니 별반 쓸모있는 동의는 아니네만. 공작 전하께 무운을 빈다고 전해주게나.”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령은 훌쩍 떠났다.

사실 이쪽이 동의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기병과 같은 고급전력은 중앙의 황태후파 귀족군, 우익의 바타비아 공화국군이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끼리 합의한 다음에 나한테는 명령만 하달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도 구태여 동의를 구한다면서 전령을 보냈다. 기즈 공작이 얼마나 됨됨이가 철두철미한 인물인지 알 만했다. 사람을 끌어안는 인덕이 있었다.

‘만약 황제가 기즈 공작의 절반만 닮았더라도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프랑크에는 불운이었으며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죽어버린 부상병에게도 불행이었다…….

말에 올라타서 후방을 바라보았다. 일만의 기병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아군의 장창병 방진을 용이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나는 미리 길목을 만들어둘 것을 명령했다.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끝이 다가왔는가.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  *  *

“드디어 시작하는군.”

앙리에타 여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중갑을 차려입고 군마에 올라타 있었다. 여왕 주변에는 브르타뉴의 참모들이 나란히 말머리를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적군의 저주스러운 목책. 방책과 방책 사이에 난 길목에서 장창병들이 천천히 물러서고 있었다. 여왕은 흥분을 삭히며 말했다.

“궁기병들에게 어서 전달해. 당장 랜스를 챙겨들라고.”

“예, 전하.”

참모가 전령들에게 명령을 전달했고, 전령들은 딱 부러지게 군례한 다음 쏜살같이 말을 몰았다. 오늘 싸움을 위해서 만들어진 랜스만 해도 무수히 많았다. 프랑크 황실의 병기창고를 먼지까지 털어낸 것은 물론이었고, 파리시오룸에 있는 대장간을 요 수십 일 동안 가열차게 돌렸다.

“롱그위 성녀. 저번에 나는 정보를 팔아넘긴 자가 황제의 측근이라 말했지.”

“네? 아, 예. 기억합니다. 전하.”

아테나의 성녀 자클린 롱그위가 대답했다.

“그거, 거짓말이었다.”

“……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가 씩 웃었다.

“만약에 그 정보팔이범이 정말로 우리 브르타뉴군을 막고 싶었다면 말이다, 공화국이라는 '또 다른 외적'에게 원군을 요청했을 리가 없어. 누군가가 독단적으로 공화국을 끌어들인 거다. 둘 중에 하나겠지.”

그녀는 먼저 한 사람을 지적했다. 공화국의 힘을 빌려서 옹립되고자 하는 인물, 즉 현재 귀족군을 통솔하는 앙리 드 기즈 공작.

“기즈 공작은 지난 번 전투에서 유일하게 안전히 철수했다. 반면에 정치적인 라이벌인 몽모렌시 원수는 전사했지. 기즈 공작이 모든 것을 획책했을 가능성이 꽤나 크다.”

“두 번째 가능성은 무엇인지요, 전하?”

“롱그위. 발상의 전환이다.”

앙리에타가 시종에게서 랜스를 넘겨받았다. 전나무로 만들어진 브르타뉴군의 랜스는 속이 텅 비게끔 파여 있었다. 그만큼 무게가 가벼웠으나 내구도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브르타뉴의 랜스는 부러지면서도 적병을 꿰뚫도록 설계되었다.

본인이 제2급 무사이기도 한 앙리에타는 능숙하게 랜스를 잡았다.

“누군가가 공화국을 움직인 것이 아니야. 공화국 자체가 프랑크의 북부 귀족들을 조종한 것이다.”

“……공화국이 말입니까?”

“그래. 그러면 왜 프랑크의 위험을 굳이 외국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했는지, 이게 말이 되거든. 음. 마상돌격은 꽤나 오랜만이군.”

여왕이 탄 군마가 가볍게 푸레질을 했다. 걱정하지 마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새까만 몸통과 새까만 갈기를 지닌 군마. 이 명마에게 여왕은 '까마귀 깃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브르타뉴의 상징, 검은 백합을 드러내기에 더없이 멋지다며 애지중지하는 애마였다.

“만일 기즈 공작이 범인이라면 깊숙한 곳까지 유인할 필요가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상냥하게 말갈기를 쓰다듬었다.

“정적을 희생시킬 정도로 기민하고 약삭빠른 위인이야. 전장이 웬만큼 유리하지 않으면 아예 출전하지도 않았을걸. 흐음, 한없이 장기전으로 끌고 나갔을 거야. 명분에서 밀리는 만큼 장기전은 우리한테 불리했지. 바타비아도 정치적인 술수를 애용했을 것이야.”

앞뒤로 교대하며 공격을 가하던 기병들이 평야에 정렬하기 시작했다. 일자 정렬. 기마돌격의 고전적인 진형이었다. 상대편의 기병들도 방책에서 빠져나오며 착실하게 진형을 이루고 있었다.

“진실이 어느 쪽이든 기즈 공작과 바타비아군을 없애버릴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승리해서는 안 된다.”

앙리에타 여왕은 느긋하게 말을 몰았다. 참모들도 위대한 여왕을 따라 함께 움직였다.

“철저하게 녀석들을 깔아뭉개야 한다. 롱그위 성녀. 나와 우리 병사들에게 무운을 빌어주게. 한 번 더 힘을 내줘야 하니 말이야.”

“예. 전하의 뜻에 운명이 함께하기를.”

여왕 일행은 돌격의 선두에 서기 위하여 기병들에 합류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