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04화 (204/510)
  • 00204 백합 전쟁  =========================================================================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스웜 다음에는 기병창 돌격이라니! 적들은 제1열이 사격을 가한 다음에 곧바로 빠져서 제2열이 돌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내가 화급하게 지휘봉을 휘둘렀다.

    “장창병! 장창병을 앞으로 세워라!”

    지휘 깃발이 요동쳤다.

    명령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자크리를 비롯하여 난쟁이 용병들은 “앞으로!”를 외쳤다. 농민병들은 전황이 연이어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몰아닥치자 얼이 빠졌지만, 하사관이 엉덩이를 걷어차자 서둘러 움직였다.

    “거차아아앙!”

    보병들이 창을 꼬나쥐고 목책에 다가붙었다. 너무 서두른 나머지 장창을 땅바닥에 떨어트리는 병사도 있었다. 꼴불견스러운 실수가 연출되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군의 대열은 완전히 얼이 빠졌다!

    궁기병에게 쓴맛을 보여주려고 나섰던 사냥꾼 출신 궁수들은 허겁지겁 뒤로 빠졌다. 앞으로 나가려는 장창병과 뒤로 빠지려는 궁병이 부닥쳐서 곳곳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일 초가 아까운 순간이었다. 랜스 차지, 그것도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가 돌격해오면 궁수로는 조금도 버틸 수가 없었다. 재빠르게 진형을 변형해야만 했다. 지금도 브르타뉴의 기사들이 해일을 이루며 시시각각 닥쳐오고 있지 않은가.

    마침내 기사들이 접근했다. 그들은 최고 속도(gallop)로 군마를 몰았다. 군마가 광폭하게 질주했다. 기사들은 목책과 목책 사이에 난 길목으로 쏟아졌고, 전투의 함성을 내질렀다.

    “수선화 중대, 명예롭게 돌격하라!”

    “여왕 전하를 위하여!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를 위하여!”

    기사단과 장창병이 충돌했다. 핏물이 튀었다. 오러를 실은 기병창이 서너 명의 보병을 찢어발겼다. 혼혈의 몬스터 군마가 날붙이 따위 두렵지 않다는 듯 울부짖었다. 장창보다 압도적으로 긴 기사용 랜스가 농민병의 어깨죽지를, 목을, 가슴을 꿰뚫었다.

    군마의 앞다리가 자신을 막는 방해물을 모조리 짓밟으며 달렸다. 순식간이었다. 수십 명의 장창병이 일거에 무너졌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막아라! 어떻게든 막아내는 거다!”

    말에 올라타서 즉시 달려나갔다. 뒤편에서 제레미가 뭐라고 소리쳤지만 무시했다.

    보나마나 위험하다느니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이겠지. 웃기는 소리가 아니고 뭔가. 위험한 것은 내가 아니라 아군 전체이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기만작전과 기습작전을 병행했다. 작전의 효과가 극대화된 것이 바로 지금, 전투의 초반부였다. 기사에게 겁먹어 보병들이 만에 하나 목책에서 멀어지기라도 한다면――끝장이었다. 모든 것이.

    “물러서지 마라!”

    목책만은 반드시 사수해야만 했다. 나는 미리 목걸이에 걸어둔 성량증폭 마법을 발동하여 소리쳤다. 전장에 나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사, 사제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멍청이들이! 나는 말을 몰아서 장창병 방진의 가장 뒤쪽까지 다가갔다.

    “앞을 노려보아라, 프랑크의 사내들이여!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뒤를 돌아보았던 병사들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 멋대로 전투를 끝내게 내버려둘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들으라! 기사단이 일견 대단해보일지라도 목책을 관통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대들이 목책에서 멀어지는 순간, 기사들은 주저없이 오러로 목책을 파괴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패배하고 만다. 병사들이여, 목책에 붙어라! 기사들이 더 이상 몰아닥치지 못하게 막아라!”

    목책으로! 목책으로! 나에게 호응하여 난쟁이들이 소리 질렀다. 병사들은 나의 말을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전쟁터의 열기에 휩쓸려서 발을 앞으로 향했다. 우우우! 우아아! 병사들은 악을 써가며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난쟁이 용병들이 어떻게든 대오를 유지하려고 발에 피가 날 지경으로 돌아다녔다. 너무 빠르지도 않게. 너무 느리지도 않게. 기사가 다섯 명의 보병을 물리치고 있었다.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다시 다섯 명으로, 열 명으로, 쉰 명으로 대응하면 그만이었다!

    “으아아아악! 뒈져라!”

    “말을 찔러! 브르타뉴 돼지 새끼들에게 창맛을 보여주라고!”

    “황제 폐하 만세! 대프랑크 제국 만세!”

    돌격해온 기병이 모두 기사인 것은 아니었다. 기사는 가장 전방에만 있었으며, 뒤이어서 몰아닥친 기병들은 전원 일반병이었다. 그들의 5미터짜리 랜스도 무섭기는 매한가지였으나 거기엔 오러가 없었다.

    랜스는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는 무기였다. 한번 찔러넣은 다음에는 검을 빼들어야 했다. 브르타뉴의 기사와 기병은 랜스를 손에서 놓고 검을 빼들었다. 휘어진 대검이 장창과 날카롭게 부딪쳤다.

    제아무리 브르타뉴군이 정예 중의 정예라 할지라도 고작 검으로 장창병 방진을 몰아붙이기란 불가능했다. 기병들은 돌격력을 잃고 눈에 띄게 속도가 줄어들었다. 좋다, 속도를 잃은 기병은 장창의 밥에 불과하다!

    “자랑스러운 프랑크의 전사들이여, 보아라!”

    나의 내장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용솟음쳤다.

    “브르타뉴 놈들은 죄다 고자새끼다! 저놈들의 좆은 길기만 길지 두 번만 박아대면 찍 싸버린다. 프랑크의 남아들이여! 고자새끼들에게 진정으로 사내다운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어라!”

    병사들이 광소했다. 재밌어서 웃는 게 아니었다. 폐를 쥐어짜내 웃음을 토하게 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동료를 도륙했음에도 단 한 사람 도망친 병사가 없었다.

    이것이 두텁게 밀집한 보병진의 위력이었다. 행여나 우리군 전열이 얇았다면 기마돌격에 속절없이 무너졌으리라. 하지만 한 명이 무너져도 그 뒤에 수십 명이, 더 나아가 수백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열 명 중에 한 명이 쓰러지면 나머지 병사는 동요한다. 백 명 중에 한 명이 죽으면 너끈히 버텨낸다. 자신의 앞과 옆에 동료가 무수히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난공불락의 성벽과 함께하는 느낌을 준다. 하물며 우리에겐 목책까지 있다…….

    브르타뉴의 궁기병과 기마돌격은 확실히 대단했다. 앙리에타 여왕 휘하에서 얼마나 훈련과 실전을 거듭했는지 알 만했다. 생드니 평야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면서도 전술을 연습하고 또 확인했겠지.

    그러나 대단할 뿐이었다. 일만 명의 의용병은 아직까지 훌륭하게 견디고 있었다.

    “정말, 막무가내라니까요! 이 양반이 큰일이 나면 어쩌려고 이러나 몰라!”

    암살대원들이 내 곁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제레미가 그중에 선두를 차지했다.

    나는 잠시 성량증폭 마법을 끄고 말했다.

    “제레미, 대원을 이끌고 기사를 쓰러트려! 기사만 처리하면 무서울 게 없다. 군마의 다리를 베어넘긴 다음에 장창병들한테 먹잇감으로 던져라.”

    “아니, 저까지 가버리면 사령관 각하께선 어떻게 지시를 내리시려구요?”

    “걱정하지 마라. 그대의 사령관은 스스로 부관을 찾는다.”

    내가 얼른 가라며 제레미를 독촉했다.

    “생드니의 일만 의용병 전원이 나의 부관이다!”

    “……아아, 정말이지! 엉망진창이야. 존명! 존명하면 될 거 아녜요!”

    제레미가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녀가 뒤를 향해 외쳤다.

    “붉은 흉터의 빌어먹을 년들, 돼지를 살육할 시간이에요! 놈들의 쓰잘데기 없는 좆탱이를 뿌리부터 잘라버리세요!”

    제레미가 말을 끝내자마자 스무 명의 암살대가 전방을 향해 사라졌다. 제레미 역시 땅바닥에 침을 퉷, 하고 뱉은 다음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뛰쳐나갔다.

    성난 목소리, 쇠와 쇠가 부딪쳐서 내는 소음, 패배한 자가 내지르는 비명, 승리한 자가 토해내는 쉰 함성소리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브르타뉴군은 우리를 밀어내려 발버둥쳤다. 아군은 브르타뉴군을 목책 바깥으로 몰아내려 안간힘을 다했다.

    암살대가 투입되자 즉시 효과가 발휘되었다. 몇몇 브르타뉴 기사가 겨우 곡도 하나를 손에 쥐고 일기당천이 되어 아군을 휘젓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어느 순간 갑작스레 낙마했다.

    “기사가 떨어졌다! 찔러! 찔러넣어라!”

    “아아악! 모두 달려들어!”

    기사들은 방진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만큼 사방에 적이 넘쳐났다. 일단 자그마한 틈이 생겨나자 장창병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창을 내리꽂았다. 땅에 넘어진 기사를 향해 수십 개의 창과 도끼가 내리쳤다. 기사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절명했다.

    그런 광경이 점차 늘어났다. 암살대원은 장창병들 사이에 숨어서 잽싸게 군마의 다리만을 절삭했으며, 나머지 처리는 군병들이 알아서 해치웠다.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건만 난쟁이 하사관들은 이쪽의 요구에 정확히 맞춰주고 있었다.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했을까.

    “물러서라! 우선 물러서라!”

    브르타뉴의 중대 하나가 말머리를 돌렸다.

    일단 하나의 중대가 퇴각하기 시작하자 거의 동시에 모든 기병이 뒤로 내달렸다. 아군의 함성이, 방어선을 사수해냈다는 확신에 가득 찬 울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승리! 우리는 초전에 승리했다. 기사가 포함된 최정예 기병들을 농민병이 쫓아낸 것이었다.

    “으아아아! 프랑크 만세! 황제폐하 만세!”

    “브르타뉴 개좆 같은 새끼들아아악!”

    목책들 사이의 길목으로 기병들이 도로 빠져나갔다. 절대로 곱게 보내주지 않겠다는 듯 일부 궁수들은 마지막까지 활시위를 당겼다. 별다른 소득은 없었지만, 병사들이 화살값에 신경 쓰지 않고 전투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프랑크의 남아들이여! 그대들에게 묻는다!”

    내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대들은 제국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가!”

    그러자 병사들이 무질서하게 외쳐댔다. 이미 정련된 언어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짐승들의 울음에 불과했다.

    “그렇다! 프랑크는 우리의 자랑이다. 조루 토끼 새끼들이 그것을 짓밟으려 하고 있다……감히 용서할 수 있겠는가!”

    ─ Non! Non! Non!

    병사들이 연호했다. 아니오!

    “우리는 더러운 토끼 새끼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가!”

    ─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그렇다, 죽여라! 망설임 없이 죽여라! 학살하라!”

    나는 아무런 대사도 준비하지 않은 채 소리치고 있었다. 아아, 이럴 때 예정된 연설문 같은 것은 꺼져버려도 좋았다. 일만의 인간은 한 덩어리가 되어 전장의 광기에 휩쓸려 있었다. 아니, 우리가 파도가 되어 전장에 광기를 때려넣고 있었다!

    “끝없는 학살을! 만족을 모르는 학살을! 외적의 핏물로 일 드 프랑크의 초목은 자라나리라! 제국을 약탈하는 야만인들에게 신들께서 어떠한 최후를 약속하셨는가 각인시켜줄지어다! 프랑크의 전사들이여, 유구한 역사 앞에서 우리가 제국의 성벽임을 보이거라!”

    나는 힘껏 숨을 들이마셔서 소리 질렀다.

    “오늘, 이곳에서, 우리는 승리한다!”

    병사들이 열광적으로 울부짖었다. 비바 프랑크! 비바 프랑크! 좌익에서 울리기 시작한 함성은 곧이어 아군의 중앙으로, 새벽안개 너머의 우익까지 전염되었다.

    좌익뿐만이 아니라 아군 전체가 기마돌격을 막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앙리에타 여왕의 회심에 찬 기습공격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평야 저편에서 다시금 말발굽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심장이 흥분해서 날뛰는 것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앞쪽을 노려보았다. 궁기병. 천 명이 훌쩍 뛰어넘는 궁기병들이 또 달려오고 있었다.

    “크으.”

    나는 깨달았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가 어떤 전술을 채택했는지.

    여왕은 제1열의 궁기병, 제2열의 창기병, 다시 제3열의 궁기병, 제4열의 창기병, 이렇게 끊임없이 번갈아가며 공격해올 속셈이었다. 즉, 방금은 첫 번째 파도를 막은 것에 불과했다.

    브르타뉴의 창인가. 아니면 프랑크의 방패인가. 태양은 이제 막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궁병을 다시 앞으로 배치하라 명령했다. 오늘은 틀림없이 기나길고 지난한 하루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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