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03화 (203/510)
  • 00203 백합 전쟁  =========================================================================

    새벽 무렵. 평원 저편에서 뿔나팔이 음산하게 울렸다.

    처음에는 하나의 가락으로 시작했던 뿔나빨은, 마치 한 마리의 참새가 날아오르자 곧이어 스무 마리가 뒤따라 퍼덕이듯이, 수십 소리의 합창을 이루었다.

    사백 년 전 제6차 월맹군에서 오우거 부대가 일격에 궤멸당했을 때도 뿔나팔은 울렸다. 오백 년 전, 팔백 년 전, 역사서에 오로지 기마돌격만으로 승리를 일구었던 그 순간에 뿔나빨은 어김없이 울렸다. 그들은 감히 천지에 고하고 있었다. 오늘, 역사가 재현된다.

    ─ 끼아아악.

    ─ 그르푸으, 까아아…….

    숲의 정령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산천초목이 핏물로 물들 것임을 예감한 것일까. 나무와 나무 사이로 초록빛 정령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뿔나팔이 우렁차게 울리자 깜짝 놀라서 깊은 숲속으로 도망쳤다. 바람도 불지 않았건만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요란하게 떨었다.

    “장창병 앞으로! 장창병 앞으로!”

    난쟁이 용병들이 농민병을 독려했다. 난쟁이들은 몸집이 작았지만 천성적으로 목소리가 우렁찼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고산지대에서 태어나 한평생, 많게는 백오십 년 동안 전장에서 뒹군 난쟁이들은 단연 최고의 정예병이었다.

    “알겠느냐. 목책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마라! 앞의 사람이 쓰러지면 얼른 목책에 달려가 붙도록.”

    “기사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목책을 뚫고 돌격할 수는 없다. 하나만 기억하라. 목책을 사수해라! 목책이 무너지면 우리도 죽을 것이요, 목책이 건재하면 적이 죽을 것이다.”

    난쟁이들이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엉덩이를 뻥뻥 때렸다. 전투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쉰 명의 양날도끼 용병단은 전원 부사관이 되었고, 능숙하게 병졸들을 전장으로 이끌었다.

    농민병은 고블린과 오크를 상대로 장창을 쓰는 방법을 알고 있다. 몬스터를 뚫는 창끝은 당연히 인간도 꿰뚫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기를 다루는 훈련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짜는 일이다. 용병들이 그걸 유도해준다.

    “……브르타뉴 여왕은 연설전을 생략하려는 모양이군.”

    내가 중얼거렸다. 나는 부대의 뒤편에 서서 일만이천의 부대를 한눈에 지켜보고 있었다. 내 호위역으로 붙은 제레미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황제가 친정하지 않았다는 게 더 확실해졌네요.”

    “음. 우리에게 명분 싸움으로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게지.”

    심지어 사제들이 전투에 앞서 성가를 부르는 절차까지 생략했다. 저쪽에는 성녀가 있는데도 말이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순수하게 전투에만 집중했다.

    ─ 쉬이이익!

    사방에 새벽안개가 옅으나마 깔려 있었다. 뿌연 상공을 뚫고 불벼락이 대여섯 개 쏟아졌다. 적측의 마법사들이 공격해온 것이었다. 화염마법은 목책을 불사르는 데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처방법이었다. 적들은 역시 목책을 방해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군중(軍中) 마법사는 저들한테만 있지 않았다.

    ─ 프로테제!

    ─ 스쿠툼!

    우리군에는 마법사가 스물여섯 명이나 참전했다. 대다수의 마탑이 중립을 선언했으나, 귀족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법사를 끌어왔다. 마법사는 학문과 진리를 위해 갈고닦은 마법이 한낱 살상도구로 이용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나, 귀족들의 수완이 만만치 않았다.

    상공에 방어막이 널찍하게 펼쳐졌다. 화염구가 도중에 막혔다. 어떤 마법사는 수구(水球)를 발사해서 정확히 화염구에 맞추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으아아아!”

    “프랑크 만세!”

    적들의 일제사격이 허망하게 실패해버리자,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난쟁이들이 함성을 주도하고 있었다.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 지금처럼 사기를 올리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반면에 안개 너머의 적들은 조용했다.

    “더 이상 마법으로 공격해오지 않는군요.”

    “아아! 목책을 불태우는 게 어렵다고 판단했겠지.”

    나는 오른주먹을 꽉 쥐었다.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군은 마법전력에서도 적군보다 앞서거나, 최소한 동등했다!

    전장을 생드니 평야로 선택한 것에는 수많은 이점이 있었다. 이곳은 오른편에 강줄기를, 왼편에 숲을 두고 있어서 좁았다. 좁다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군이 주력으로 삼은 장창병들은 밀집할수록 강해졌다.

    “이제 여왕에게는 기마돌격밖에 수가 남지 않았다……!”

    반면에 기병은, 필연적으로, 퍼질수록 강력하다.

    그들은 돌격할 때 3미터에서 8미터에 이르는 기병창(lance)을 쓴다. 특히 브르타뉴 기사단은 8미터짜리 랜스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러를 쓰지 못하는 일반 기마병은 4미터~5미터의 랜스을 들 수밖에 없지만…….

    기병들이 일렬로 주욱 늘어서서 랜스를 앞세워서 돌격해온다. 그 자체로 무시무시한 공포이다.

    하지만, 생드니 평야처럼 전장이 좁다면 어떨까? 기마돌격의 위력이 줄어든다.

    더군다나 우리는 전방에 목책들을 배치하고 있다. 목책과 목책 사이로 난 자그마한 공간뿐이다. 브르타뉴의 기병들은 겨우 그 좁다란 틈새로 돌격할 수밖에 없다. 위력이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급감하겠지.

    마지막 어퍼컷은 장창병이다. 비록 5미터 남짓한 장창이지만, 목책과 함께한다면 기병은 물론이고 기사와 자웅을 겨룰 법하다. 단언하건대 이곳이야말로 기병의 무덤이다.

    ─ 다그닥, 두그닥, 다그닥…….

    드디어 안개 너머에서 일단의 기마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책에서 이백 미터 정도 떨어졌을까. 수백, 수천 명의 기병이 화려한 갑주를 뽐내며 말을 속보(trot)로 몰았다. 무수한 갑옷들이 은빛 파도를 이루며 해일처럼 밀어닥치고 있었다.

    “과연 장관은 장관이로군.”

    나는 지휘봉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쯤 내가 맡은 좌익 말고 다른 진영에도 기마병이 돌격해오고 있으리라. 이제부터 승부였다.

    “제레미. 사격 명령을 하달하라!”

    “예!”

    제레미가 손짓하자 병사의 갑옷을 차려입은 암살대원이 깃발을 펄럭였다. 그 신호를 전해받고 전방의 난쟁이들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사격준비, 사격준비!

    삼천 명의 궁수가 시간차를 두고 활을 올렸다.

    우리군은 무식하게 장창병만 앞세우지 않았다. 장창병 뒤편에 궁병을 충분히 배치했다. 장창병이 목책과 더불어 기마돌격을 저지할 동안, 궁병이 적들을 쏘아맞힌다. 완벽에 가까운 조합이었다.

    난쟁이들이 요란하게 소리를 질렀다.

    “사격개시! 사격개시!”

    화살비가 하늘을 가르며 브르타뉴의 기병들을 향해 꽂혔다. 대략 스무 명의 기병이 한꺼번에 굴러떨어졌다. 두텁게 갑주를 차려입은 중기병에게 화살은 위력적이지 않았으나, 운 나쁘게 말한테 화살이 적중해버린 경우였다.

    내가 쾌재를 불렀다.

    “좋다! 계속해서 화살을 퍼부어라! 화살비는 전액 지원해주겠다!”

    “장창병! 장창병 앞으로오오!”

    화살비를 피한 기병들이 이제 목책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스무 명이 낙마했다, 라고 하면 보잘 것 없게 느껴질지 몰라도 단 한번의 사격에 스무 명이나 무력화된 것이었다. 네다섯 번만 더 반복하면 금방 백 명을 채웠다. 목책을 뚫지 못하는 이상에야 저들은 출혈이 늘어날 뿐이었다.

    “아……!”

    제레미가 옆에서 숨을 들이켰다. 내가 고개를 돌려보자, 제레미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싶더니! 사령관 각하! 없습니다!”

    “없다니? 뭐가 없다는 것이냐?”

    “랜스요!”

    제레미가 소리쳤다.

    “기병들이 랜스를 들고 있지 않아요!”

    “뭐?”

    화들짝 놀라서 전방을 쳐다보았다. 빈틈없이 은빛으로 무장된 갑옷. 몬스터와 이종교배를 해서 낳은 군마. 중기병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그러나 랜스가 없었다!

    언제나 보병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브르타뉴의 전매특허인 8미터짜리 기사용 랜스도, 일반 기병이 사용하는 5미터짜리 랜스도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중기병에게는 지극히 생소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활이라고……!?”

    그 순간, 수천 개의 화살이 공기를 가로질렀다. 브르타뉴의 기마전대는 궁기병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목책에 십 미터 앞까지 접근해서 화살을 겨냥한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아군의 병사들이 경악했다.

    “화, 화살이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목책 앞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병사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수십, 아니 얼핏 보아도 백 명에 가까운 장창병이 꺼꾸러졌다. 전신을 갑옷으로 도배한 중기병과 다르게 이쪽은 대다수가 농민병이었다. 화살에 대한 방어력 자체가 달랐다.

    브르타뉴 기병들은 목책에서 얼마간 떨어진 채 끊임없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앞선 열이 화살을 쏜 후에 뒤로 빠졌고, 다음 열이 화살을 쏘아올렸다.

    그렇게 무한반복이라도 할 것 같았다. 스웜(Swarm)! 스웜 전술이었다! 유목민들이나 운용할 법한 궁기병 전용 전술을, 대륙 최강의 훈련도를 자랑하는 브르타뉴의 기병들이 실현시키고 있었다.

    “으, 으아아악! 피해!”

    “멍청한 놈들! 방패를 들어라! 방패를 들어!”

    “끄아악, 팔, 내 팔이!”

    군중이 순식간에 혼란으로 가득찼다. 장창병들은 자그마한 나무방패를 들어서 어떻게든 화살을 피해보려 애썼다. 농민들은 처음 겪어보는 화살비에 허겁지겁 머리를 방패로 가렸다. 자연스럽게 장창들은 땅바닥을 향해 조금씩 내려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몇 초 동안 말을 잃었다. 직후에 내가 내뱉은 것은 말이라기보다 차라리 경악성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것을 노렸는가, 앙리에타……!”

    “사령관 각하! 어서 명령을!”

    제레미가 옆에서 나의 정신을 일깨웠다. 제기랄! 분노에 잠길 틈조차 없었다. 난쟁이들 덕분에 대열이 유지되고 있지만 이대로는 피해가 속출할 게 뻔했다. 나는 이를 물고 소리쳤다.

    “화살에는 화살로 맞서라! 궁병을 앞으로 세워, 방패를 가진 이들은 궁병을 엄호해라!”

    “즉시 명령을 하달하도록!”

    제레미가 스무 명의 암살대원에게 손짓했다. 미리 깃발로 정해놓은 범위에서 벗어난 명령이었으므로, 대원들이 일일이 명령을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이들은 재빠르기로는 마계에서 일등 이등을 다투는 정예 암살자였다. 대원들은 전방에 수천의 장창병이 밀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뛰어들어, 난쟁이 하사관들한테 명령을 하달했다. 이 분도 채 걸리지 않아 난쟁이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궁병 앞으로! 궁병 앞으로오오!”

    “방패로 궁병을 사수해! 사내새끼들아, 겁먹지 마라! 궁기병과 궁병이 싸우면 이쪽이 백전백승이다!”

    “아군을 믿어라! 아군을 지켜라!”

    병사들이 허겁지겁 움직였다. 궁수가 대열 사이로 뛰어갔다. 인파에 파묻혀 있던 궁수도 동료들이 손으로 밀어서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 그들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난쟁이들이 사기를 북돋았다.

    “말을 노려라! 말을 향해서 쏴!”

    삼천 명의 궁수는 대부분 사냥꾼이었다. 훈련된 궁병처럼 일제사격을 펼칠 순 없었어도 명중률만큼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궁수들은 동료들의 엄호를 믿으며 필사적으로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젠장!”

    내가 화를 못 이겨서 발로 땅바닥을 내리쳤다. 완전히 속아버렸다!

    앙리에타 여왕은 우리가 지극히 방어적으로 나오리라는 사실을 전부 간파하고 있었다. 아군은 생드니 평야를 전장으로 삼았다며 좋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앙리에타 여왕은 우리가 그러하기를 내심 갈망한 것이었다.

    나는 이를 빠득 갈았다. 이것과 똑같은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로젠베르크 변경백, 그들도 훈련도가 높은 기병을 활용해서 궁기병 전술을 펼쳤다.

    “아우스테를리츠의 재현인가……!”

    비좁은 평야에 수만 명의 장창병이 밀집해 있다. 화살로 인한 피해를 극대화하기에 더없이 알맞겠지. 우리는 브르타뉴의 기마돌격을 너무도 겁냈고, 그 이미지에 사로잡힌 나머지 궁기병에 대비하지 못했다.

    “사령관 각하. 아직 우리가 유리합니다.”

    제레미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표정을 꾸미지 않았다. 제레미의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본성이 얼굴에 드러났다.

    “방패로 수비하며 궁수들을 계속해서 활용하면 결국 궁기병은 패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십시오. 목책이 방벽의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제레미 말이 맞았다. 나는 목책을 더럽게 튼튼하게 만들도록 명령해뒀고, 덕분에 훌륭한 화살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꽤 많은 궁수가 그곳에 달라붙어 공격을 피하면서, 목책과 목책 사이로 난 자그마한 틈새로 화살을 쏘았다. 장창병들은 화살이 닿지 않은 뒤편으로 조금씩 물러서고 있었다.

    “알고 있다. 다만, 앙리에타 여왕에게 속아넘은 자신이 한심하다!”

    “당장에 기습적인 효과를 얻었을지 몰라도 앙리에타 여왕이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엔 변함이 없습니다. 앞으로 침착하게…….”

    제레미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레미의 눈동자에서 나는 무언가 불운한 것을 직감했다.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궁기병들이 천천히 물러났다. 여기저기 화살에 맞아 죽은 군마가 널브러져 있었다. 우리측의 사격에 피해를 입을까봐 물러갔다, 일견 그렇게 보이기도 했으나.

    “제2열이……!”

    제1열과 교대하듯이 제2열의 기마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의 궁기병보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기병들. 기사였다. 기사들은 브르타뉴를 상징하는 검은 백합의 망토를 휘날리면서 이곳으로 군마를 몰았다.

    전신갑주, 심지어 말까지 갑옷으로 철저하게 입었다.

    제1열과 다르게 기마병으로서 완벽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 완벽한 무장을! 그들은 8미터짜리 랜스를 꼬나쥐고 있었다!

    아군 병사들의 다급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기사다! 기마돌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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