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02화 (202/510)
  • 00202 백합 전쟁  =========================================================================

    작품설정란에 전투 지도가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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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군이 시작했다.

    ─ 라아아 리스티, 트리이이 프로이테…….

    ─ 그리스아 시스비이 므르 브레메데아…….

    사제의 노랫소리가 병사들 머리 위에 울려 퍼졌다.

    아군에는 군중사제도 꽤나 많이 참군했다. 성녀급의 인물은 없었지만 수많은 여사제와 남사제가 선율을 이루어가며 낭랑하게 신성한 노래를 불렀다. 가락은 성량증폭 마법을 타고 상공까지 올라가, 마치 하늘에서 햇빛처럼 내려오는 듯했다.

    화음과 함께 육만 대군이 행군했다. 제레미가 나와 말머리를 나란히 세우고 말했다.

    “단탈……아니, 사제님은 노래 한 곡절 뽑지 않으려나봐요?”

    “미안하지만 음악에는 완전 낙제생이거든.”

    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사실 사제직업이 군대에서 가장 요긴하게 써먹히는 대목이 여기였다. 성스러운 군가는 병졸들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 더욱이 병졸들이 함부로 폭주하지 않게 도와주었고, 약탈이나 방종과 같이 군대라면 으레 일어나기 마련인 사건사고도 크게 줄였다.

    뭐, 햇볕을 쬐며 진군하는데 꼭대기에서 성가가 들리는 것이다. 병사들이 신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노라고 느낄 만하지. 아마 PTSD 같은 정신질환도 적지 않을까.

    “헤에.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는 것도 거짓말이네요.”

    “응?”

    “데이지 말이에요. 노래를 엄청 잘 부르거든요. 꼭 정령이 부르는 것 같다니까요.”

    어라. 원래 게임에서 용사가 노래도 잘 불렀던가?

    “……내가 있을 때는 한 번도 노래 같은 걸 부르지 않았다만.”

    “그야 당연하죠. 누구인들 사제님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겠어요.”

    “이 상큼발랄한 화냥년이 혀 놀리는 솜씨 좀 보소?”

    “깔깔깔.”

    제레미가 웃었다. 나는 으르렁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륙 최고의 오페라 가수가 열창하는 가운데에서 펠라짓이나 즐긴 사람이 바로 나였다. 정말이지, 예술에 관련해서 나는 빵점이었다.

    제레미가 엄지손가락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것들은 어디에 써먹으려고 바리바리 싸오시는 거예요?”

    “아아. 목책?”

    우리군은 짐수레를 백 개 가까이 끌고다녔다. 나귀가 끄는 수레에는 미리 조립해둔 목책이 수북하게 실려 있었다. 농민병에게 만들라고 명령해두었는데, 이건 말하자면 나의 비밀병기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앙리에타가 쓸 수 있는 계책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으음. 계책이라고 말하기도 뭣하지만 정말로 회전을 벌이는 것이지. 그때는 아군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압살시키면 그만이야. 하지만……두 번째로, 황제가 친정했을 수가 있어.”

    “프랑크의 황제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명분을 다지려고 일부러 황제가 아니라 '황제의 간신배들'을 목표로 삼았다. 황제는 어디까지나 무고한 피고자이고, 뭐 그런 거지.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떡 하니 적군에 있으면 어쩌겠어?”

    “아하. 사기에 영향이 가겠네요.”

    “그럴 수밖에 없지.”

    내가 우려하는 지점은 황제가 직접 연설전(演說戰)에 나서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대군이 맞붙을 때 각 진영에서 한 명이 대표로 나서서 연설하는 관례가 있다. 연설전은 딱 세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항복해라. 싫다. 그럼 죽어라.

    아무래도 기사의 전력이 상상을 초월해서 강력하다보니, 전쟁에도 자연스럽게 기사도스러운 절차가 생긴 것 같다.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적군의 사기를 후려치는 데 효과적이기도 하고. 지금 시점에서 프랑크 황제가 연설전 대표로 나와버리면 우리 입장에서 상당히 곤란해지겠지…….

    “단, 군지휘권을 황제가 쥐게 되겠다만.”

    여태껏 무능한 모습만을 보여준 황제 앙리 3세에게 군사적 재능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즉 황제가 친정하는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연설전에서 우리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트릴 수 있으나, 본격적인 전투에선 무능한 지휘가 이루어지리라.

    “황제가 나오느나 나오지 않느냐. 그것만 보면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의 의도가 확실해질 거다. 만약 나온다면 앙리에타는 회전을 원하긴 원하되, 정치적인 승리를 바라는 것이야. 하지만 만약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말끝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수단은 일절 동원하지 않은 채, 순전히 섬멸전만을 노린다는 얘기가 된다. 내가 목책을 저리 잔뜩 싸온 것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야.”

    우리군은 파리시오룸 근교의 생드니(St. Denis) 평야에 도착했다. 그곳에 브르타뉴-황제 동맹군이 사령부를 차려놓고 있었다. 눈으로 어림짐작하건대 적군의 총병력이 삼만조차 안 되었다.

    정찰전과 첩보전을 벌인 결과, 적군에는 황제가 왕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프랑크 황제를 가리키는 군기가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황제를 대리하는 장군의 깃발이 펄럭일 뿐이었다.

    “결국 섬멸전을 노리는 것이냐, 여왕이여.”

    나는 평원 너머의 적진을 노려보았다.

    적 진영에는 알게 모르게 우리한테 협력하는 귀족이 몇 명 있었고, 덕택에 적군의 전력을 상당히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 이처럼 상대쪽에 정보를 제공하는 자가 아군에도 숨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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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군>

    총사령관: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여왕

    부사령관: 가스파르 드 타바느 대리장군

    ■제1군: 브르타뉴 왕국군. 총사령관: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여왕.

    보병 5,000명(용병, 징집병). 기병 8,000명(기사 1,000명).

    ■제2군: 프랑크 황제군. 총사령관: 가스파르 드 타바느 대리장군.

    보병 2,000명(징집병). 기병 8,500명(기사 600명).

    □총병력: 보병 7,000명. 기병 16,500명(기사 1,6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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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인 정보를 가지고 곧바로 군사회의를 열었다.

    우리측 총사령관인 앙리 드 기즈 공작을 비롯해서 바타비아 공화국군 사령관인 안나 더 빗 공화국 13위원회 위원, 난쟁이 부족연맹에서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단의 단장들 등, 쟁쟁한 귀족과 장군이 야외에 모여들었다.

    “확실해졌군요. 브르타뉴의 여왕은 기병전을 노리고 있습니다.”

    안나 더 빗 부사령관이 말했다. 그녀는 하프엘프였다. 이종족 혼혈아로서 공화국의 최고수뇌부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여걸이었다. 나와 똑같이 <해방동맹>에 가입한 인물이기도 했다.

    “기병 전력에서 아군은 열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기사의 전력이 위협적입니다. 적측이 기병전을 원하는 이상, 아군이 그게 어울려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나가 말했다. 그녀는 인간 사회에서 보기 드물게도 초록색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었다. 하프엘프답게 미모가 아름다워, 지금도 몇몇 귀족은 약간 멍한 눈초리로 그녀의 목덜미와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다.

    “본인도 동의하네. 브르타뉴의 기병에는 얼마 전에 쓴맛을 보았지.”

    앙리 드 기즈 총사령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남자는 느긋하게 세월을 챙긴 사십 대의 공작이었는데, 멋들어지게 수북히 자란 턱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브르타뉴군에 참패한 전적이 있었다.

    “폐하께서 계셨다면 곤혹스러울 뻔했지만 말일세. 쟝 볼레 사제가 지적한 대로, 브르타뉴의 여왕은 진심으로 우리를 전멸시키려고 하는 것 같군.”

    “예. 무모하다고 평가해야 할지. 자신감이 지나쳐 보입니다.”

    “허나, 그 자신감을 뒷받쳐주는 실력 또한 있네.”

    기즈 공작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방심은 금물이다. 그런 분위기가 풍겼다.

    얘기를 전해듣기로, 프랑크군이 일패도지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패잔병을 추스려서 안전하게 퇴각했다던가. 천재는 아닐지언정 결코 무능하지도 않다. 총사령관으로서 견실한 인사라 보아도 괜찮겠지.

    “기병들은 보병의 뒤에 배치하여…….”

    “장창병들 사이에 틈이 없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장군들이 자유롭지만 절도를 잃지 않고 회의했다.

    예상한 대로 공화국의 지휘권은 안나 위원, 귀족군의 지휘권은 기즈 공작이 나눠가졌다. 하지만 내 예상이 기분 좋게 엇나간 부분도 있었다. 바로 지휘관들 사이에 알력다툼이 의외로 적다는 것이었다.

    기즈 공작은 앙리에타에 비하면 장군으로서 2류일지 모른다. 그러나 귀족으로서 틀림없이 1류였다. 회의 도중에 일부 호전적인 용병대장과 귀족이 큰소리로,

    “여러분, 무슨 말씀을 나누시는 것이오? 우리는 육만이고 적은 고작해야 이만에 불과하오. 세 배나 많은 병력을 이끌었으면서도 고작 계집애가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으니 차마 견딜 수가 없구려! 총사령관 각하! 소장에게 일군을 맡겨주십시오. 계집애를 붙잡아서 효수하겠습니다.”

    하고 호언장담하면 기즈 공작은 냉철하게 말했다.

    “실로 용감하군! 하지만 기병의 운용은 계속해서 보류하겠네. 기병전만이 사내의 용기를 보여주는 방법은 아닐세. 여왕이 원하는 대로 전투를 이끌어줄 필요는 없네.”

    기즈 공작은 지휘관들을 능수능란하게 중재하며 자기가 결코 카드게임으로 공작위를 따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우리군은 쟝 볼레 사제가 입안한 작전을 채용하겠네.”

    기즈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입안한 작전이란 의외로 간단하다. 며칠 동안 나귀를 굴려서 힘겹게 운반한 목책들을 전방에 장성처럼 꽂아둔다. 이렇게 만들어진 목책에 의지하여 장창병을 배치하는 것이다.

    ‘제파르 대장의 아이디어를 빌렸지.’

    내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제파르 대장은 목책과 말뚝을 이용해서 기사단의 돌격을 훌륭하게 방어했다. 제파르 대장처럼 신묘한 지휘를 보여줄 수야 없겠지만――그런 묘기는 마왕이 몬스터들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때나 가능했다――목책을 활용하는 것쯤이야 쉬웠다.

    전방에 대량으로 목책을 배치할 경우, 기병의 돌격은 자연스럽게 효과가 급감한다. 앙리에타 여왕이 바라는 기마돌격이 힘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속도를 잃은 기병들을 향해서 장창을 꽂아넣는다.

    본래 소수의 병력이 다수의 병력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친다. 이번에는 정반대이다. 절대다수의 병력을 가진 우리가 도리어 방어전을 고수한다.

    “여왕이 자랑하는 기병과 기사단은 우리군의 방패에 막혀 힘을 잃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쳤을 때 본격적으로 공격에 들어갑니다.”

    “음.”

    나의 작전설명에 기즈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우리 사이에서는 논의가 끝났지만 주변에 알리려고 일부러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극단적으로 기병에 맞서기 위해서만 고안된 전술……. 순전히 앙리에타 여왕에 맞추어서 만들어진 진형이다.

    몇몇 장군은 겁쟁이 같은 작전이라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총사령관인 기즈 공작은 불과 얼마 전에 브르타뉴 기병의 무서움을 체험했다. 기즈 공작은 섣부르게 전투를 벌이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안심했다. 아군의 지휘부는 무능하지 않았다. 패배할 요소는 사라졌다.

    전장으로 삼은 생드니 평야조차 우리에게 유리했다. 평야의 왼편에는 강이 흘렀다. 오른편에는 숲이 빼곡했다.

    강가는 땅바닥이 물러서 기병이 돌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숲은 말할 것도 없다. 즉, 생드니 평야는 기마돌격으로 승부를 보기에는 상당히 불리하다. 브르타뉴에게 유리한 요소는 전혀 없다.

    기즈 공작이 호기롭게 외쳤다.

    “우리군은 병력에서 우위를 선점했을뿐더러, 전장에서도, 전술에서도 우위를 확보했네. 제장들은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분투해주길 바라네!”

    다음날 새벽, 브르타뉴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드니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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