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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00화 (200/510)
  • 00200 백합 전쟁  =========================================================================

    *  *  *

    이날, 나는 여느 때처럼 데이지와 한방에서 자고 있었다.

    데이지를 거둔 이후로 항상 그녀와 숙식을 함께했다. 주위에 양녀라고 말했으니까 부자연스러울 게 없었다. 하루일과를 끝내고 막사나 여관에 돌아오면, 데이지가 의자에 앉아 숙제를 하고 있었다. 제레미가 내준 숙제로써 대개 고대제국어를 학습하는 공부였다.

    “……윽, 흐윽.”

    때때로 데이지는 방안에서 소리죽여 신음하곤 했다. 뻔했다. 루크가 자기 방에서 슬라임 오나홀로 자위를 하는 것이었다. 그 감각이 데이지에게 전해졌다.

    사춘기 남자애의 성욕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데이지는 하루에 두세 번, 심하면 다섯 번이나 구석에 틀어박혀 신음을 억눌렀다. 방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행여라도 바깥에 있을 때 루크가 자위를 시작하면, 데이지는 얼굴이 벌개져서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날도 루크는 혈기가 왕성했다.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신음에 눈을 깨어보니, 데이지가 침대 아래의 바닥에서 몸을 비틀며 힘들어 하고 있었다.

    “하아……읏, 하…….”

    흑발의 소녀는 작게 경련하더니 이윽고 힘없이 숨을 내쉬었다. 내가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자다 깨어나서 그런지 머리가 약간 흐리멍덩했다.

    “오늘은 여섯 번인가? 끌끌. 루크도 대단하네. 그 나이에 여섯 번이라니.”

    “……다섯 번입니다. 멋대로, 횟수를 추가하지 말아주세요. 불쾌합니다.”

    데이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목소리가 제법 사나웠지만, 눈동자에 물기가 맺혀서야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즐겁게 해줄 따름이었다.

    “다섯 번이든 여섯 번이든 놀랍기는 매한가지야. 내가 그 나이였을 때는 사흘에 한 번도 많았는데 말이지. 역시나 영웅이 될 재목은 떡잎부터 다르다고 할까. 영웅은 색을 마다하지 않는다더니, 장래가 참으로 기대되는군.”

    “최악입니다.”

    “최고의 악이라고? 칭찬 고맙다. 참, 첫경험이 사실은 여동생과 똑같은 슬라임이라는 것도 기가 막히군. 과연 영웅이다. 자라날 때부터 달라도 뭔가 다르지!”

    내가 껄껄 웃었다.

    데이지가 분했는지 베개를 집어들어서 이쪽으로 세게 던졌다. 푹, 하고 베개가 나의 얼굴에 명중했다. 미안하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내 웃음소리가 커지기만 했다.

    데이지는 벌떡 일어서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베개를 도로 잡아서 내 몸을 팍팍 때렸다. 이 어린애 장난으로 보이는 짓거리가 사실상 데이지가 발악할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 그녀는 무언가 무겁거나 뾰족한 물건으로는 아예 나한테 던질 수조차 없었다.

    베개. 아니면 솜덩어리. 혹은 뭐, 물방울? 그 정도 물건이어야 데이지는 나를 타격할 수 있었다. 그걸 거창하게 타격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노예각인이란 참으로 편리해서 좋았다. 하하.

    “단탈리안 님, 큰일이에요!”

    방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제레미가 허겁지겁 뛰어들었다.

    그녀는 이쪽을 바라보더니 석상처럼 굳었다. 나와 데이지도 깜짝 놀라서 굳어버렸다.

    다 자란 어른이 침대 위에서 열 살짜리 꼬맹이와 나뒹굴고 있다. 잠옷차림으로. 그것이 제3자의 눈에 어떻게 비추었을지는, 제레미의 점차 썩어가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아. 단탈리안 님은 그렇고 그런 취향이었군요. 왠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변태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정말로 이 정도로 변태일 줄은 몰랐지만요.”

    “어이, 제레미.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매우 잘 알겠다만 그건 아니다.”

    제레미가 데이지를 쳐다보았다.

    “데이지? 정말인가요?”

    “선생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데이지가 눈썹 한 꺼풀 까딱이지 않고 말했다.

    “아버님이 명령하시면 무력한 저로서는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왼쪽 어깨에서는 잠옷이 내려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옷을 단단하게 차려입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 짧은 틈을 타서 천연덕스럽게도 옷을 풀어재낀 것이었다.

    제레미가 재판관처럼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짜게 식은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소아성애자 변태 마왕 전하. 무언가 하실 변명이라도?”

    “이, 이 상큼한 돼지 년들이…….”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이 녀석들이 요새 선생과 제자가 되어 붙어다니더니 아주 궁합이 착착 맞는군.

    “말만 전하이니 예의는 어디에 갖다 팔아먹었냐!”

    내가 베개를 제레미한테 전력으로 투구하면서 소리쳤다. 제레미는 너무나도 가볍게 베개를 피했는데, 그래서 더 열이 받았다.

    “여긴 나의 침실이다. 급한 일이든 뭐든 적어도 문을 두들기는 게 예의이다. 네 녀석의 모자걸이는 암살 빼고는 써먹을 데가 없나!”

    “아!”

    제레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단탈리안 님! 큰일입니다! 너무 변태스러운 광경에 그만 깜빡했어요!”

    “……너의 오해는 나중에 가서 풀도록 하고. 그래, 고귀하신 제레미 경이여. 얼마나 다급하신 일이길래 자그마치 마왕 전하의 침실에 칩입하셨는지?”

    내가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는데도 제레미는 진지한 낯빛으로 고했다.

    “파리시오룸에서 숙청이……아니, 학살이 벌어지고 있어요!”

    잠시 뒤, 나는 잠옷차림에다 망토 하나만 걸쳐서 걷고 있었다.

    우리가 잠자는 저택은 도시의 부자가 살던 집이었다. 평민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부자의 목과 몸통을 정성스럽게 분리시킨 이후에는 용병단과 암살대가 머무르고 있었다.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이미 일행의 수뇌부들이 모여 있었다. 로비에는 각탁과 군사지도까지 갖추어졌고, 마법수정구에서는 누군가가 쉬지 않고 보고했다. 자크리가 얘기를 전해들으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두 수고가 많다. 아닌 밤중에 파자마 파티를 열게 생겼군.”

    내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면서 말했다. 난쟁이들과 엘프들이 빠릿하게 경례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서 되었다, 하고 손짓했다.

    “먼저 상황을 보고해라. 원인에 대한 분석은 나중으로.”

    “예, 전하. 현재 시각에서 약 네 시간 전부터, 파리시오룸 시내가 소요에 휩싸였습니다. 단순히 일부 구역이 아니고 도시 전체에 폭도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자크리가 우렁차게 말했다.

    “대부분의 무리는 귀족가의 하인들이 이끌고 있으며, 그들은 황제를 배신한 간신배를 처단하라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결과, 지난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가택에 감금된 생-드레 원수가 습격을 당했습니다. 코르나통 남작, 텔레녜 자작, 로쉐푸코 자작이 참살되었다는 소리도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내가 이마를 짚었다.

    “전부 황태후파의 간부이거나 공화주의자 아닌가. 단순히 우발적인 폭동이 아니야. 계획된 거사이다. 혹시 어찌된 일인지 분석까지 끝났는가?”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자크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프랑크의 황제가 직접 명령을 하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당파 중에서 극렬분자들이 실행부대를 맡은 것 아닌가, 하고…….”

    “미쳤군.”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세수하듯이 쓸었다.

    미쳤다. 그 단어가 한동안 입안에 맴돌았다. 무언가, 무언가 마실거리가 필요했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도록 자극이 필요했다.

    그때 옆에서 데이지가 뿔잔을 올려바쳤다. 포도식초를 섞은 물이었다. 데이지도 나를 따라오느라 잠옷차림이었는데, 말없이 조용하게 군의(軍議)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뿔잔을 넘겨받아 단번에 들이켰다. 시디신 식초물이 뇌까지 강하게 흔들었다.

    좋다. 딱 좋게 정신이 들었다.

    단탈리안, 이게 도대체 무슨 사단인지 파악해보자.

    “먼저 이것이 황제의 독단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자크리, 학살에 브르타뉴군이 개입하고 있는가? 아니면 왕당파들만 움직이고 있는가?”

    “예, 전하. 현재까지 브르타뉴의 군복을 입은 폭도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브르타뉴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개입하지 않았다…….

    “앙리에타는? 여왕은 어디에 있는가.”

    “앙리에타를 비롯해서 브르타뉴군은 황도 근교의 요새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오늘밤에 여왕이 요새에 있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황도 파리시오룸에 입성한 직후, 브르타뉴군은 파리시오룸에 주둔하지 않고 근처의 요새로 이동했다.

    “최소한, 겉보기로는 완벽하게 황제와 왕당파의 소행이라는 얘기인가?”

    “그러합니다. 파리시오룸 시민들도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자크리. 너무나도 이상하다.”

    “예?”

    내가 오른발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얘기했다.

    “안 그래도 황제의 권위는 침몰하고 있었다. 여기서 학살극까지 벌인다고? 우둔하다. 밑 빠진 배에다가 쇳덩이를 싣는 격이다.”

    황제가 무력으로 공화주의자를 박멸하기 시작했다. 브르타뉴군의 실력을 빌리지 않고 직접 근위부대를 동원해서.

    왕당파야 환호하겠지. 하지만, 공화주의자들은? 나머지 세력들은?

    “황태후파이거나 공화주의자라고 해서 무조건 황제에 대립하는 것은 아니야. 그중에는 중립도 많거니와, 황명에 최대한 순응하려는 무리도 많다. 지금처럼 대학살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똘똘 뭉친다.

    당연하다. 제 마음대로 신민들을 몰살시키기 시작한 주군에게 공화주의자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

    학살은 도리어 반(反) 황제파를 결집시키게 되었다. 아무리 앙리 3세가 머저리여도……아니, 외세를 끌이들인 시점에서 이미 병신인가. 녀석은 그냥 무시하자.

    문제는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이다. 그녀가 이 일을 방관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황제도 여왕과 손을 잡은 이상, 적어도 학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주었을 터이다. 앙리에타라면 곧바로 학살의 반작용을 알아차렸겠지. 왜 황제를 말리지 않았는가? 어째서…….

    “이해할 수 없군. 으음, 이해할 수 없다.”

    내가 혼잣말했다. 난쟁이들과 엘프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황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멍청이라서, 여왕과 상의조차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거사를 치렀을까.”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섭습니다.”

    자크리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여왕이 황제 근처에 첩자 한 명 심어두지 않았을 리도 없다. 어떻게든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적들을 결집하게 만든다……공화국 군대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황태후파 귀족들이 합류하게……아아, 그런가. 그런가!

    “자크리. 회전이다. 브르타뉴 여왕은 일대 회전(會戰)을 노리고 있어.”

    “예, 전하? 회전이라니요?”

    수뇌부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너무 비약했는가.

    내가 초조한 마음으로 말해나갔다.

    “지금까지 황제에게 반항하려는 세력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토록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난다면 순식간에 반-황제군이 결집한다. 가볍게 3만 대군을 이루겠지.”

    그중에는 대귀족들도 기라성처럼 포진되어 있겠지. 공화국 군대를 불러들인, 북부의 몇몇 영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할 거다.

    “충분히 강력해진 그들이 공화국군을 어떻게 대접하리라 생각하는가?”

    “…….”

    자크리가 잠시 고민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지휘권이 분산되겠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반황제군이 집결하지 않는다면 공화국이 지휘권을 장악할 것이다.”

    본래 병력이 가장 많은 세력이 지휘권을 갖는다. 프랑크의 북부 영주귀족들에 비해서 바타비아 공화국의 군대가 훨씬 많다. 그러니, 본래대로라면 바타비아 공화국이 지휘권을 독점할 것이나…….

    “하지만, 프랑크 국내의 귀족들이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소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화국군이 2만 2천. 여기에다 귀족들이 약 3만의 병력을 모아오면……프랑크의 귀족들이 병력 면에서 우세해진다! 공화국군은 지휘권을 독점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귀족군이 공화국군을 휘하에 넣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병력이 우세한 것도 아니다. 이럴 경우…….

    “프랑크군의 사령관과 공화국군의 사령관이 따로 생깁니다. 틀림없습니다!”

    “아아.”

    자크리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프랑크의 귀족들에는 공화주의자만 있지 않다. 일부이다. 대다수는 황태후파와 중립파이겠지.

    “귀족들은 바타비아에게 필요 이상의 군권이 넘어가는 것을 경계할 것이고, 내정간섭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력으로 움직일 것이다. 브르타뉴군은 고작 일만에 불과하다.”

    황제 근위병과 용병이 추가로 섞이더라도 많아봤자 이만 명……. 그 정도면 딱히 공화국에 손을 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섬멸할 수 있다. 태후파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할 터.

    이쪽의 지휘권을 분리시켜서 앙리에타 여왕이 노리는 바는 무엇인가? 머리가 쪼개진 군대만큼 탐스러운 먹잇감은 없다……즉, 회전. 일거에 섬멸하는 것이다.

    대담하게도 앙리에타 여왕은 기껏해야 이만에 불과한 병력으로 프랑크 북부 영주귀족-황태후파-바타비아 공화국의 약 오만 대군을 헤치우고자 하고 있다.

    이 무슨 자신감인가.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병법의 기본은 아군을 집결시키고 적군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반대로, 앙리에타 여왕은 적군을 집결시키고 있다. 몸뚱어리만 거대하지 머리는 두 개 달린 군대가 만들어지도록 부추긴다.

    그녀는 확신하는 것이다. 이쪽의 군대 따위 사만이든 오만이든 얼마든지 쳐부술 수 있다고!

    ============================ 작품 후기 ============================

    던디가 어느새 200화를 달성했습니다. 응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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