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99화 (199/510)
  • 00199 백합 전쟁  =========================================================================

    *  *  *

    “배후가 있다.”

    앙리에타 여왕이 말했다.

    막사에 앉은 장군들 중 한 사람이 물었다.

    “배후……라니요, 전하?”

    “배후는 말 그대로 배후이다. 상쾌할 정도로 빌어먹어서 웃을 수밖에 없군.”

    붉은 머리카락의 젊은 여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분위기가 싸늘했다.

    “과인이 속는 것까지는 괜찮다. 인생에서 한두 번 속은 것도 아니거늘. 그거 횟수에 작대기 하나 늘려보았자 뭐 크게 서럽겠나? 예상치 못한 적군이 가세하는 것도 뭐, 괜찮다. 어차피 삶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하지만 말이다, 제군들. 하지만…….”

    앙리에타 여왕이 주먹으로 각탁을 내리쳤다. 쿵, 하고 소리가 막사에 울렸다.

    “그 두 가지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 그건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빌어먹을 사태란 말이다!”

    장군들이 침묵했다. 군주가 분노했을 때 말문을 여는 것은, 말하자면 성난 멧돼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는 것과 같았다.

    앙리에타가 한동안 씩씩거리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장군들은 곤란해진 낯빛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크게 분노하시는가 싶었더니 이제는 웃으신다. 어찌된 영문인가.

    “제군들, 보아라. 공화국 놈들이 비정상적으로 빠르지 않나.”

    여왕이 각탁에 놓인 지도를 손수 가리켰다.

    “바타비아 입장에서 마왕군은 동쪽에 있고, 프랑크는 서쪽에 있다. 월맹군 전쟁이 아직 한창인 이상에야 바타비아는 당연히 동쪽에 군사를 집결시켜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떠한가? 우리가 전쟁을 벌인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공화국놈들이 국경을 넘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말해나갔다. 물론 한 달의 시간이면 공화국이 병력을 동부에서 서부로 옮길 수가 있다. 프랑크 공화주의자 귀족들과 밀약을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전제가 잘못되었다…….

    “전제라니요, 전하?”

    “바로 우리의 작전목표를 공화국이 한 달 전부터 눈치 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앙리에타 여왕은 눈빛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푸른 불꽃이 타오를 때의 고요였다.

    “우리 브르타뉴가 프랑크를 공격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단순히 프랑크를 침공한 것일 수도 있다. 경우의 수는 실로 많다. 한 달 전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어. ……어떻게 바타비아의 창녀들은 우리가 '공화주의자들을 격멸하기 위해 침공했다'라는 사실을 콕 집어서 알았느냐!”

    “……! 배신자입니까!”

    장군들이 나지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했다. 설령 공화국이 브르타뉴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작전목표까지 알기란 어려웠다. 심지어 프랑크 황제가 자국의 귀족들을 토벌해달라고 실제로 명령했다는 것까지, 그 진위를 어떻게 그리 빨리 알아냈겠는가.

    누군가가 정보를 유포했다. 즉,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였다.

    좌중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당연하지만 작전목표는 수뇌부들 사이에서만 공유되었다. 지금 막사에 앉은 누군가가 배신했다…….

    앙리에타가 넉살좋게 웃었다.

    “제군들, 뭘 그리 긴장하나? 브르타뉴의 용자들이 언제 꼬맹이처럼 담력이 작아졌는지 모르겠군.”

    “허나, 전하. 배신자가 있다면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배신자가 구태여 그대들 중에 있을 까닭은 없지.”

    앙리에타의 선문답 같은 말에 장군들이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앙리에타가 또 다시 코웃음을 쳤다.

    “프랑크 황제 쪽에서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

    장군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그 머저리 애송이 황제가!”

    “우리를 끌어다 놓고 공화파 돼지들까지 불렀는가, 가증스러운 놈!”

    “전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당장 파리시오룸을 불바다로 만들겠나이다.”

    장군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분노했다. 장군들은 자기네가 속았다는 생각에,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순백함을 여왕 앞에서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큰소리로 노호를 터트렸다.

    앙리에타가 빙그레 웃었다.

    “거 제군들,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야단법석 떨지 마. 내가 언제 자네들의 충성심을 한 번이라도 의심해보았나? 속이 빤히 보여서 곤란하지 않나. 마드모아젤을 곤란하게 하다니, 장수이기 전에 신사로서 낙제점이야.”

    “…….”

    여왕의 대응에 분위기가 머쓱해졌다.

    장군들이 험, 험, 하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여하간 여왕 전하께서는 우리를 멋쩍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니까. 장군들이 그렇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주군이 충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만큼 든든한 일이 없었다.

    방금 전, 앙리에타 여왕은 충분히 반역을 의심할 만했다. 귀족들의 기를 죽여놓을 수 있었다. 여왕의 지휘권은 더더욱 강해졌으리라. 그런데도 여왕은 자네들을 믿는다고 말했다…….

    이러한 태도 덕분에 휘하 귀족들은 되레 여왕에게 기꺼이 복종했다. 군사적인 재능과 사교적인 능수능란함, 두 능력이 앙리에타 여왕을 지탱하고 있었다.

    “제군들. 분노하기 이전에 차분하게 생각해봐라. 이건 기회가 아닌가.”

    “기회라니요, 전하?”

    “우리의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직접 정보를 흘렸을 리는 없다. 자네들이 말한 대로 폐하께서는 천하의 멍텅구리에다 애송이 머저리 새끼니까.”

    장군들이 피식 웃었다. 브르타뉴군에서는 일반 잡졸까지 황제를 병신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럼 누가 정보를 흘렸겠어?”

    “황태후, 아니면 황제의 측근일까요.”

    “아아. 그리고 공화주의자이겠지.”

    앙리에타 여왕이 말했다.

    “제군들. 실제로 누가 흘렸는가,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공화주의자가 황제 폐하께 배신을 저질렀다'라는 정황적인 증거이다. 우리 프랑크의 황제 폐하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여왕의 말에는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장군들이 고민에 잠겼을 때, 자클린 롱그위, 군대에 종사하는 성녀가 입술을 열었다. 그녀는 고운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설마……전하께서는, 숙청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로 맞혔다.”

    앙리에타가 미소를 지었다.

    “제군들. 황제에게 공화주의자들이 정보를 흘렸다고 전해라. 공화주의자에서 공 자만 들어도 길길이 날뛰는 폐하께서 과연 어떻게 반응하실지 궁금하지 않는가. 파리시오룸에서 살아 숨쉬는 공화주의자들을 모조리 싸잡아 죽일 기회이다.”

    그날, 황제가 대노하는 소리가 궁정에 울려 퍼졌다.

    오래 전부터 왕당파와 공화파는 서로를 증오했다. 그중에서도 극렬분자, 철저하게 왕당파를 옹호하는 귀족들이 있었다. 황제는 그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 '배신자'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왕당파 귀족들은 지금이야말로 황도에서 바퀴벌레들을 박멸할 기회임을 깨달았다.

    사흘 뒤. 한밤에 학살이 시작되었다.

    왕당파 귀족들은 파리시오룸을 여러 구획으로 나누어 세밀하게 담당자를 배정했다. 그들은 “배신자를 죽여라! 프랑크를 욕보인 자를 죽여라!” 하고 소리높여 외치며 습격했다. 철저하게 계획된 학살이었다. 대다수의 파리시오룸 시민들은 왕당파였기에 쉽게 선동에 물들었다.

    학살이란 시작하기 어려울지라도 일단 움직이면 폭주하기 마련이었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이 모이자 그 다음부터는 열 명이 되었고 스무 명이 되었다. 군중은 광기에 물들어서 가장 좁은 골목부터 가장 넓은 대로까지 뛰어다녔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을 처단하라!”

    “프랑크를 위하여 일어서라, 시민들이여! 망설이지 마라! 여신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

    “싸그리 죽여라. 가리지 말고 죽여라. 저승의 신께서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해주실 것이다!”

    왕당파 귀족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까지 피냄새에 물들었다. 선동구호에는 당파적인 이해관계, 사사로운 복수와 증오, 단지 학살의 대지에서 피어오르는 혈향에 취한 폭주, 마지막으로 공화파 귀족의 재산을 약탈하려는 수작이 섞여들어 폭발했다.

    일부 공화주의자들은 하루나 이틀 전, 무언가 불길한 낌새를 알아챘다.

    “이상하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서둘러 짐을 싸거라. 질문하지 마라! 경화(硬貨)만 챙기고 마차에 올라타!”

    그들은 자산을 챙겨 황도에서 탈출했다. 대체로 공화주의에 인생을 헌신한 자들이었는데, 설령 황제 폐하에게 맞서더라도 이념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공화주의자 귀족들, 특히 상인과 같이 부유한 평민들은 황도에 남았다.

    “음, 폐하께서 왕당파를 총애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지금까지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는가? 큰일이래봤자 잠깐이겠지.”

    “이곳이 내 고향인데 어디로 떠날꼬.”

    설마 황제가 자신들을 직접 해치겠는가? 그들은 평소처럼 생업에 종사하며 낙관하고 있었다.

    낙관의 대가는 참혹했다.

    부유한 상인들의 재산은 폭도를 더욱 흥분시켰다. 밤이 깊어질수록 학살은 움츠러 들기는커녕 산불처럼 거세게 번졌다. 공화주의자가 아닌 상인들까지 습격당했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아이, 모두 폭도의 창끝에 가슴이 꿰뚫렸다.

    어느새 소문은 와전되어 있었다. 공화주의자들이 황제 폐하를 암살하려 했다, 폐하께서는 분노와 두려움에 차서 브르타뉴한테까지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우리 스스로 황제 폐하와 프랑크를 수호하자…….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밤 중에 황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국의 지엄한 황태후는 미처 의복을 갈아입지도 못했다.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궁정을 쏘다니며 울부짖었다.

    “오오! 신들이시여,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이나이까! 왜 시내에서 고함과 비명이 들려오는가! 근위병! 근위병들은 어디 있는가!”

    황태후는 역시 잠옷차림으로 헐레벌떡 뛰어온 시녀들을 대동하고 황궁으로 들이닥쳤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애타게 부르며 당장 학살을 멈춰달라고 애원했다.

    “폐하! 당신께선 프랑크의 황제이십니다! 저들은 당신의 아들딸이요, 다름 아니라 당신께서 굽어 살펴야만 하는 백성입니다!”

    황제 앙리 3세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짐은 아비에게 창끝을 들이대는 자식을 키운 적이 없습니다, 어마마마.”

    “폐하, 제국이 저주에 휩싸일 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살해하고, 자식이 아비를 증오하는 나라에 미래는 없나이다! 폐하, 제발……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부디 가여운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황태후가 황제 앞에 쓰러지며 애원했다. 오십 세의 어머니가 잠옷차림으로, 이제 늙어버린 살결을 드러내며 흐느끼고 있었다. 근위병들도 마음이 울적해져 황태후를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젊은 황제는 단호했다.

    “한 나라에 두 개의 정부는 있을 수 없다!”

    앙리 3세가 자리를 박차고 포효했다.

    “나를 낳은 어머니여, 실로 가증스럽구나! 황권을 무너뜨리고 나라의 분열을 방치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어마마마, 당신입니다. 감히 의회가 황제보다 위에 있다 주장하는 자들을 어찌 제국의 일원이라 볼 수 있겠습니까.”

    “앙리……나의 앙리야. 제발, 부디 자비심을…….”

    “저의 자비심은 바로 어머니가 앗아갔습니다.”

    황태후가 꿇어앉은 채 오른손을 벌려왔다. 그러자 황제는 어미의 손을 걷어쳤다.

    “오늘밤 이후로 프랑크에는 오로지 단 한 하나의 주권(主權)만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시여!”

    황태후가 얼굴을 붉히여 일어섰다. 그녀는 분노에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이 조롱거리를 기르느니 차라리 독사 한 뭉치를 몽땅 낳고 말 것을! 내 뱃속에 죄악의 씨앗을 배버린, 덧없는 쾌락의 그 밤이 저주스럽구나! 신들이시여! 아아, 신들이시여!”

    “태후를 모시거라.”

    황제가 근위병들에게 손짓했다. 병사들은 머뭇거리면서 황태후에게 다가갔다. 황태후는 온갖 악독한 저주를 내뱉으며 황궁에서 끌려나갔다.

    황제가 그 모습을 비웃으며 말했다.

    “시녀들은 따로 감금하라. 그들 중에도 역적의 딸이 있을 터. 섣부른 관용은 후환만을 남겨둘 뿐일지니. 신들께서는 오늘밤이 다만 완벽해지기를 허락하셨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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