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7 순례의 길 =========================================================================
다음날, 자크리가 소식을 가져왔다.
“브르타뉴 군대가 황도(皇都)에 입성했습니다.”
“음. 국경을 넘은 지 정확하게 20일인가…….”
나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탁자에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군.”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입니까? 확실히 그렇습니다.”
난쟁이 자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씩 내가 사자성어를 쓰면 뜻이 전달되지 않고 그냥 낱말째로 번역되어 나갔다. 도대체 메커니즘이 어떻게 생겨먹은지 모르겠다.
참, 프랑크에 와서 깨달은 것이지만 나는 발음이 무척 고급스럽다고 한다. 어느 날 자크리가 맥주를 마시면서 지적해주었다.
‘꼭 궁정귀족이 쓰는 프랑크어 같습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따로 외국어를 교습받으셨습니까?’
‘아, 뭐. 그렇다네.’
‘합스부르크어에도 능숙하시다 들었습니다. 혹시 그외에도 능통하신 언어가?’
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언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겠지. 이 세계에선 사람들, 특히 마법 아티팩트를 구입할 정도로 재산이 넉넉한 사람은 좀체 외국어를 배우려 들지 않는다. 번역 마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음. 인간계의 언어라면 웬만큼은 전부.’
‘정말입니까. 대단하시군요!’
자크리가 놀라워했다.
‘보통 마왕 전하들은 공부를 게을러하기 마련인데……아니, 물론 단탈리안 전하께선 보통 마왕이 아니지요. 대단하십니다.’
‘흠. 흠.’
그날 이후로 자크리는 나를 더더욱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싹 다물었다. 양심이 찔렸지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나의 양심은 찔린 걸로 따지자면 벌써 난도질을 골백 번은 당했는걸.
아무튼 지금은 내 우아한 발음보다 프랑크의 전황이 문제였다.
외적이 침입하고 단 20일 만에 수도에 입성했다.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전투 하나 없이 행군했다고 해도 믿을 법했다. 정말로 전투 한 번 없었다면 모르겠으나…….
“프랑크 제국이 힘을 못 써도 너무 못 쓰고 있네. 이거야 원.”
“브르타뉴 왕국이 예상보다 강력합니다. 여왕의 명성도 심상치 않고요.”
전황은 이러했다.
외적이 갑작스럽게 침입하자 프랑크 귀족들은 처음에 우왕좌왕했다. 아직도 월맹군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마왕의 세력과 인류의 세력이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이때, 설마 똑같은 인간측에서 공격해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특히, 프랑크의 귀족들은 월맹군 원정에 병력을 많이 차출했습니다. 국경지대에 대한 감시가 평소보다 소홀했을 겁니다.”
자크리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프랑크 귀족들은 어떻게 월맹군 전쟁 도중에 인류가 인류를 공격할 수 있느냐고, 브르타뉴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멍청한 짓이지.”
벌써 여기서부터 브르타뉴와 프랑크의 실력차가 엿보였다.
“브르타뉴의 앙리에타 여왕은 월맹군 원정이 사실상 끝났음을 간파헀다.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절대로 월맹군의 공격을 못 버티지. 그런데도 월맹군은 공격하지 않는다……어째서냐, 그렇게 자문했겠지.”
그리고 눈치 챘다. 마왕군이 또 분열했다는 것을.
역대 월맹군 원정에서 마왕들이 얼마나 거창하게 삽질했는가는 유명했다. 일일이 나열하자면 내가 왜 마왕 따위로 전생했는가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앙리에타 여왕은 내심 마왕들을 비웃었으리라. 인류를 멸망시킬 기회가 눈앞에 왔는데도, 자기네 파벌 싸움에 정신이 팔려 천재일우의 찬스를 놓쳐버렸다. 한심한 이야기였다…….
“첩보에 따르면, 앙리에타 여왕은 미리 군대를 소집시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인류가 합스부르크에서 완전히 패배할 것이라 예상하고, 추가적인 군대를 준비한 듯합니다.”
그 군대는 고스란히 프랑크 침략에 이용되었다.
프랑크에도 멍청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후작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지방군이 구성되었다.
백전노장 후작들이 군대를 통솔하여 맞서 싸우려 했으나――황도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서가 하달되었다.
‘브르타뉴는 짐의 적이 아니오. 프랑크의 친구이노라. 사령관들에게 명령하는바, 브르타뉴가 원하는 대로 길을 내주고, 브르타뉴가 원하는 대로 물자를 지원하라.’
무엇을 숨기겠는가. 바로 프랑크의 황제였다.
프랑크의 지방사령관들이 대혼란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어느 나라의 황제가 외적에 길을 내주고 물자를 제공하라 명령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었다.
외적에 저항해야 하는가. 아니면 황명에 복종해야 하는가. 사령관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사상초유의 사태였다.
이런 혼란을 틈타서 브르타뉴는 여유롭게 행군했다.
행여나 제국군이 길목을 막아서면,
‘여기 프랑크의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서가 있다.’
‘우리는 이곳을 지키는 수비대로…….’
‘닥쳐라! 네놈들, 감히 폐하의 명령에 반항할 생각인가!’
하고 앙리에타 여왕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녀는 정말로 황명이 적힌 양피지를 들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어디서 그딴 위조 명령서를 들이미냐고 비웃었겠지. 하지만 제국군은 떨떠름하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무려 세 군데의 요새가 눈뜬장님처럼 왕국군이 지나가는 걸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요새주둔군은 무장까지 해제됐다는군요.”
마왕들 못지않게 희대의 병신짓을 터트려주는 황제였다.
브르타뉴군은 국경지대와 요새지대를 아무 피해 없이 통과했다. 이때 가서야 몇몇 프랑크 귀족들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조금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공화주의자 귀족들이 충격을 먹었다. 비유하건대 조선 국왕이 신하들 때려잡겠다며 왜군을 불러들인 격이었다.
‘우리를 없애려고 폐하가 불구대천의 원수 브르타뉴까지 끌어들였다!’
참다못해 일부 귀족이 들고 일어섰다. 프랑크 육군 총사령관 몽모렌시 원수, 기즈 공작, 생-앙드레 원수 등, 황태후파와 중립파의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서둘러 병력을 소집했다.
아쉬우나마 15,000명 가량의 병력이 준비되었다. 질풍노도의 기세로 브르타뉴가 몰려오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모을 수 있는 병력이란 죄다 모은 것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브르타뉴군은 약 9,000명. 병력 면에서 프랑크가 압도했다. 과연 제국을 칭하는 나라답다고 칭찬해야 할까. 제국군과 왕국군은 군사요충지에서 격돌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프랑크군은 분명히 그리 생각했을 겁니다.”
“뭐, 어쩌면 브르타뉴를 아예 몰아낼 수도 있다고 기대하지 않았을까.”
거의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 * *
브르타뉴 왕국군은 작전회의로 시끄러웠다.
“프랑크의 황제가 원군을 파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오.”
“정말로 황제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해온 대로 프랑크 놈들에게 말합시다. 황명이라고 둘러대면 놈들도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칠 겁니다!”
“글쎄, 적군의 사령관은 몽모렌시 원수요외다. 웬만한 협박에는 콧방귀나 뀔 것이오.”
귀족들은 대체로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의견이었다. 구천의 병력으로 일만오천의 병력에 대항하는 것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다. 자연스러운 경향이라 보아도 좋겠지.
앙리에타 여왕은 상석에 앉아 회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수들이 어느 정도 의견을 조율했을 무렵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조용히 툭, 하고 말했다.
“내일 새벽에 총공격한다.”
귀족들이 침묵했다. 그러자 노장(老將) 콜레녜 후작이 대표로 발언했다.
“전하. 프랑크의 황제가 원군을 약속했나이다. 구태여 병력이 열세에 처한 지금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눈앞의 제국군은 허울만 좋은 허수아비야. 속은 텅텅 비었어.”
붉은 머리칼의 젊은 여왕이 당차게 말했다.
“일견 병졸의 숫자가 많아 대단해보여도 기병이 적다. 일만오천 중에 겨우 삼천은 될까. 반면에 우리는 구천 명에 불과할지언정 오천 명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다. 제군들. 그대들은 착각하고 있어.”
앙리에타 여왕이 손가락을 네 개 펼쳤다.
“적군이 우리보다 많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적군보다 '네 배 넘게' 많다.”
“……예? 전하, 네 배라니요?”
“프랑크의 귀족들은 아직도 황명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다. 지금 눈앞에 모인 병력은 대다수가 징집병. 즉, 귀족들의 기사단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숫자가 적은 기병 중에 기사의 비율은 더더욱 적을 터. 기껏해야 백 명이겠지.”
앙리에타 여왕이 미소를 지었다.
“반면에 우리는 기사단의 수효가 구백 명에 이른다. 질적인 측면에서 압도적이다. 이것이 우리 브르타뉴가 적에 비해서 '두 배' 앞서는 까닭이다.”
여왕은 자아, 하고 손가락 두 개를 접었다.
“적군은 비록 모여있다 한들 여전히 황명에 반항한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고 있다. 우리가 전투를 꺼리는 만큼이나 저들도 전투를 꺼리고 있다. 지금쯤 적군의 수뇌부는 공세를 퍼부어야 한다는 입장과 그저 시간을 끌어보자는 입장으로 나뉘었을 터.――적은 현재 두 쪽으로 나뉘어 있다. 고로.”
앙리에타 여왕이 나머지 두 개의 손가락을 접었다.
“저들은 전력이 두 쪽으로 나뉜 상황에서 두 배나 강력한 우리와 맞서야 한다. 우리가 제국군보다 네 배 유리하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다. 제군들! 우리는 하나로 단결되었으며 저들은 분열되어 있다.”
귀족들이 말없이 여왕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여왕의 패기 넘치는 목소리에 빨려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에 반하는 세력들이 점차 뭉칠 터. 황명에 거스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귀족들이 대다수인 지금이야말로 기회이다!”
여왕이 탁자를 쿵, 하고 내려쳤다.
“때마침 적군에 몽모렌시, 기즈, 생-드레가 끼지 않았는가! 황태후파의 수령들이다. 그놈들만 없애버리면 황태후파의 중심이 크게 약해진다. 제군들, 여신들께서 우리에게 만찬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앙리에타 여왕이 웃었다.
“기사들에게 전하라. 내일 새벽, 신들께서 우리 브르타뉴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준비하셨노라고. 적들은 비명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돼지처럼 죽는다.”
* * *
제국군은 참패했다.
본래 전술의 기본은 이러하다. 중앙에 보병을 배치하고, 양익에 기병을 배치한다. 보병이 견실하게 중앙을 압도하는 가운데, 양익의 기병이 적을 둘러싼다. 그런데 앙리에타 여왕은 절대다수의 기병을 '중앙'에 배치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수백의 기사와 수천의 기병이 쇄도했다.
프랑크군은 깜짝 놀랐다. 서둘러 병사를 준비하여 우선 이천 명의 기병을 출격시켰다. 이천 명이면 기병을 거의 총동원한 것이었다. 약간이라도 시간을 벌어주리라 기대했으리라.
기병대와 기병대의 대결은 고작 한 번의 격돌로 끝났다. 앙리에타 여왕이 이끄는 기병은 문자 그대로 프랑크군을 갈아버렸다.
프랑크군은 혼비백산해서 패주. 기병들이 도망치면서 뒤에 있는 아군까지 말발굽에 치어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총사령관 몽모렌시 후작은 어떻게든 대열을 유지시키기 위해, 일흔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전방에서 분투했다. 그러나 전열이 복구되기 이전에 브르타뉴 기사의 칼날에 몽모렌시 원수의 가슴이 꿰뚫렸다.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총사령관이 전사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병의 패퇴에 사기가 낮아진 프랑크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이런 기회를 놓칠 앙리에타 여왕이 아니었다.
브르타뉴군은 그대로 적의 중앙을 양단해버렸다. 프랑크군은 속수무책으로 갈라져버렸고, 좌익과 우익이 각개격파 당하기에 이르렀다…….
전투 결과.
“프랑크군은 오천 명의 사상자에 육천 명의 포로……반면에 브르타뉴군은 겨우 사백 명 남짓의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끔찍한 결과로군.”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과연 던전 어택에서 철혈재상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이끌고 대륙통일을 넘본 군주다웠다. 틀림없이 쉽지 않은 상대가 될 거다.
============================ 작품 후기 ============================
단탈리안의 데뷔전이 되었던 <검은 산맥> 전역.
전투가 끝나고 치하하러 온 바르바토스가 선봉장 제파르를 놀리는 장면이 있지요. '멋모르고 기사단에 닥돌해서 병력을 말아먹은 꼬맹이'라고. 이때 마왕 제파르의 병력을 순삭해버린 기사단이 바로 브르타뉴의 기사단이었다, 라고 언급되었습니다.
브르타뉴 왕국은 튜튼 왕국과 함께 작중 최강의 기사단들을 자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