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6 순례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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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혼돈이 있었다……이곳 세계의 신화는 그렇게 말한다.
혼돈 도가니에서 모든 것이 태어났다. 그렇다면 혼돈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신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허나, 수많은 신을 모시는 여기 세계에서도 혼돈이라는 이름의 신만큼은 없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차피 나는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니다. 그냥 낳아졌다. 세계도 똑같지 않은가. 세계 자신도 결코 태어나기를 원해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마치 예정에 없는 아이를 배어버린 섹스 파트너가 「어라, 생겨나버렸어. 헤헤」라고 남자친구에게 고백하듯이, 어쩌다보니 생겨났다.
차이점이라면 인간과 다르게 세계엔 피임약 따위가 없었다는 것이겠지.
만약 이 사생아가 세상에 온갖 저주를, 고통, 질병, 전쟁, 죽음을 뿌려댈 것임을 누가 미리 알았기라도 한다면――세계에게도 산부인과 의사가 있어 「지워버립시다, 정말로, 진지하고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하고 말해줄 수만 있었다면. 그리하여 산부인과 의사가 사생아로서의 세계에게 「좋다!」 혹은 「나쁘다!」라고 말해줄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멋졌겠는가.
그러나 여기 신화에는 의사가 없는 것이다.
세계가 탄생해도 좋을지 나쁠지 말해줄, 산파로서의 조물주가 전혀 없다. 태초에는 혼돈만이 있었다……세계는 지멋대로 태어나버렸다.
따라서, 세계가 탄생해서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영원히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지극히 전투적인 신화가 아니고 뭔가.
신들이 건강하고 영웅들이 일어선다면 그때 세계는 「좋다」.
마왕들이 들끓으며 몬스터들이 대지를 휩쓴다면 그때 세계는 「나쁘다」.
세계가 태어나서 좋았는지 나빴는지, 사람들은 처음부터 결정할 수 없다. 영웅들과 마왕들은 항상 싸워가며 결정해야만 한다. 지금의 시대가 좋은지 아니면 나쁜지.
“그렇다면 백성들이여, 묻노라니.”
내가 말에 올라탄 채로 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장에 프랑크가 악(惡)에 물들었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전염병이 창궐하며 길거리마다 사신이 음산하게 웃어대는구나. 프랑크의 백성들이여, 정말로 들리지 않았는가? 그대들의 귀에 사신들은 가장 창백하게 속삭이지 않았던가.――이제 죽을 시간이다, 필멸자여. 이제는 고통밖에 남지 않았다.”
정말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말했다. 나의 연기는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다. 도시광장에 모인 육백 명의 사람들, 순진무구한 백성들이 공포에 떠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여자가 짧게 비명을 지르면서 혼절했다. 나는 지금 검은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사신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아, 이 시대 사람들은 정말이지 연설해주는 보람이 넘쳐났다.
“식량은 떨어져가고 가족들은 죽어간다. 일초일초가 고난이요 고통이다. 서쪽에서는 브르타뉴 군대가 그나마 남은 식량을 약탈하며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백성들이여. 프랑크는 전례없는 악에 물들어 있다. 내 재차 묻노라니, 그대들은 어찌해야 마땅한가?”
“브르타뉴 놈들을 깨부숩시다!”
광장 한가운데서 남자 한 명이 소리쳤다. 그러자 수백 명이 벌떡 일어나면서 고함을 질렀다.
“쳐죽여라! 놈들이 우리를 약탈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자!”
“더 이상 세금을 낼 수 없다! 호밀 한 톨도 바칠 수 없다!”
“세금을 거둘 것이면 흑색 허브부터 풀어라――!”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 가리지 않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과격하게 주먹을 흔들었다. 거친 농사로 인하여 단단해진 팔뚝이 구릿빛으로 번들거렸다.
“그렇다! 그대들은 프랑크를 악으로부터 구원할 의무가 있다!”
목소리를 드높였다. 노호와 같은 고함을 뚫고, 마법의 도움을 받아 목소리는 광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태초에 최초의 남자가 밭을 갈고 최초의 여자가 길쌈할 때, 누가 귀족이었던가! 태초부터 모든 인간은 본래 평등하게 태어났으니, 그대들 역시 악을 물리치고 프랑크를 구원할 힘이 있노라! 프랑크의 위대한 신민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나는 두 손을 불끈 쥐어잡았다.
“행군하라! 돌격하라! 이제, 드디어 우리에게 신들께서 정하신 때가 도래했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비로소 그대들은 억압의 굴레를 벗고 자유를 되찾아, 오롯이 스스로 이 프랑크의 대지에 신성한 국가를 세울 수 있으리라!”
수백의 시민이 짐승처럼 포효했다. 미리 계획한 대로 광장 한켠에서 드워프 용병들이 무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단창, 장창, 검, 사람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것이나 쥐어잡았다.
열광을 뛰어넘어 광기가 도시에 불타올랐다. 손에 무기가 있느냐 없느냐는 거대한 차이를 낳았다. 칼끝은 무언가를 정확하게 가리킬 수 있으므로.
“영주관으로 향하자! 흑색 허브를 되찾자!”
“무기고로 쳐들어간다! 친구들이여, 프랑크를 위해 봉기하라!”
“신의 영광을 위해 일어서라!”
선동가들이 소리치자 오백 명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우르르 몰려갔다. 그들은 도시의 골목과 골목을 돌아다니며 동료와 가족을 불러모았고, 오백은 순식간에 천으로 불어나 도시 저편의 영주관으로 진격했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난쟁이 용병들과 합류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하.”
용병단장인 자크리가 처억, 하고 군례를 올렸다.
“아아. 무기는 정확히 이백을 나누어주었는가?”
“예. 창과 도끼, 검을 위주로 배분했나이다.”
“시민들이 무기고를 열어재끼면 여유분을 다시 보충하도록.”
프랑크 전역에 무법지대를 만드는 계획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마왕 레라지에가 영지를 침입한다. 영주는 겁에 질려 우리 용병단을 고용한다. 그 다음에는 일방적으로 짜고 치는 고스톱…… 영주군의 작전과 배치를 레라지에한테 전부 알려주어, 간단하게 영주군을 괴멸시킨다.
그렇게 전멸한 영주군을 구원하는 입장이 바로 용병단이다.
우리 양날도끼 용병단은 '치열하게' 마왕군과 격돌하여 '간신히' 적을 몰아낸다. 자그마치 영주가 전사할 정도로 치열했던 싸움이다. 백성들 입장에선 이제 영락없이 몬스터한테 잡아먹히겠구나, 하고 두려워하는데 용병단이 구해준 것이다.
물론,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비단 백성뿐만이 아니다.
“와아! 사제님, 사제님! 정말 대단해요!”
루크가 달려와서 나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꼬마 남자애는 완전히 영웅이라도 보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루크. 오늘도 열심히 공부했니?”
오는 미소가 고운데 가는 미소가 곱지 않을 리 없었다. 나 또한 상냥하게 웃으면서 루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크는 쑥스러운 듯 뺨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도 새벽부터 점심까지 검술을 익혔습니다!”
“루크는 정말로 성실하구나. 여신께서는 성실함을 사랑하신단다. 하지만, 루크.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구나.”
내가 엄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검술은 검술이고 글쓰기 연습은 글쓰기 연습이지. 오늘 하루의 공부를 분명히 채웠겠지?”
“아……그게. 아직. 헤헤헤.”
“으이구, 요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 같으니라고.”
루크의 앞머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아프지도 않을 것인데 루크는 엄살을 피우면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참고로 루크의 교육은 용병단장 자크리가 무술을, 암살대장 제레미가 교양을 맡고 있었다.
“사제님! 남자로 태어났으면 글이야 자기 이름 쓸 줄만 알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저도 얼른 한 사람 몫의 군인이 되어서 아르테미스 여신님과 프랑크를 위해 싸우고 싶어요!”
“어휴. 어디서 들은 것은 많아서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내가 녀석의 뺨을 잡아서 쭈욱 늘렸다. 루크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신음했다.
“으브, 어, 바흐으.”
“듣거라. 공부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속기 쉽고, 생각만 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위태롭기 마련이다. 너가 당장이야 여신을 위해 봉사한다 말하고 있지만, 정말로 여신을 위해 봉사하는 게 옳은지 그른지 어찌 알겠느냐?”
“…….”
뺨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루크는 자기 볼을 매만지면서 눈썹을 쨍그렸다.
“여신님께선 언제나 항상 옳으시지 않나요?”
“그렇다면 왜 여신은 언제나 항상 옳으냐?”
“그야……여신님이니까? 어라? ……으응?”
루크가 오른쪽 왼쪽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허허. 그러니 루크 너는 여신이 왜 옳은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여신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거로구나.”
“뭐, 뭔가 이상해요, 사제님!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상해요!”
“그러니까 공부하라는 거다. 요 천방지축아.”
녀석에게 꿀밤을 한 방 더 먹였다. 이번에는 조금 강하게.
“으으으!”
루크가 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꼭 똥 마려운 강아지가 주인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뭐, 너무 분해하지 마라. 이래 봬도 내가 말빨 하나로 여기까지 먹고 살아온 놈이란다. 세상물정 모르는 화전민 꼬마한테 당해서야 진즉에 혀 깨물고 자살해야지 않겠냐.
“자아, 해가 넘어가고 있다. 얼른 제레미 선생님한테 가서 배우거라.”
“아, 그러니까 그게……하아아. 알겠어요. 배우면 되잖아요, 배우면…….”
루크가 미역처럼 어깨를 추욱 늘어트리고 걸어갔다.
딱히 공부를 싫어해서 저러는 것은 아니다. 당장 눈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영웅적인 연설이 오가며, 봉기가 일어난다. 소년에게는 매순간이 역사적으로 느껴지리라. 그런 흐름에 끼어들지 못하고 고대제국어나 고대공화국어 따위를 배우니 몸이 따분하고 간지러워 견딜 수 없겠지.
뭐,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제레미가 얌전히 공부만 시키지 않는다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해서 종류가 퍽 다른 '공부'를 시켜준다는 것이다.
루크가 멀리 여관집으로 향했다. 용병들도 차례차례 여관에 들어갔다. 나는 등을 돌리면서 말했다.
“정말 순수하고 착한 아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
데이지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 화전촌에서 나를 상대로 따박따박 맞서던 여자아이의 눈초리는 많이 죽어 있었다. 최근 들어 눈이 흐리멍덩해지는 경우가 잦아졌다.
“루크가 오빠여서 자랑스럽겠군. 물론, 루크도 네가 여동생이어서 자랑스럽겠지. 매일 저녁마다 정분을 나누는 사이인데 아무렴. 남매도 보통 남매 사이가 아니야.”
내가 키득거렸다. 그제야 데이지의 눈빛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버님은 루크를 속이고 있어요. 광장에서 연설한 것도 전부 거짓말입니다.”
데이지는 구태여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고집했다.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이대로 굳어버리면 나에게 일말의 방심이라도 생겨나리라 노리는 것이었다.
“흐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버님이 거짓말을 할 때는 거짓말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님은 당신의 진심을 말씀하실 때 결코 연설조가 되지 않습니다. 방금 광장에서, 아버님은 틀림없이 거짓만을 말했습니다.”
“직감이라! 그거 대단한 재능이로군.”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때, 데이지가 어깨를 들썩였다.
“……읏.”
오늘도 시작했다.
슬라임 오나홀을 이용한 고문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목적은 데이지의 정신력을 갉아먹는 것.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지금쯤 여관방에선 제레미가 루크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겠지.
‘너희 남매는 우리로부터 떨어질 수 없어져야 한다.’
루크는 정신적으로는 나에게 종속되고, 육체적으로는 제레미한테 묶인다. 그렇게 나는 차근차근 미래의 용사를 옭아매고 있었다.
데이지가 양팔로 몸을 감싸며 간신히 쾌락을 견뎌내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순전히 나의 악취미로, 내가 지켜볼 경우 데이지가 더더욱 수치스러워한다는 이유 때문이다――프랑크 전역의 지도를 머릿속에서 그렸다.
‘슬슬 폭발할 기점이 되었어.’
멀리 영주관이 있는 방향에선 성난 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인들이 격렬하게 반항하겠지. 시민들에게는 무기가 있다. 찌르는 것은 무척 간단하다.
서부는 브르타뉴군에 엉망으로 되어갔으며, 북부는 마왕 레라지에와 나로 인하여 무법지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폭발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