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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94화 (194/510)
  • 00194 IF 루트: 프린세스 디펜스  =========================================================================

    사냥회 당일. 다행히 날씨가 화창했다.

    대사냥회는 사실상 황녀 전하가 합스부르크의 정계(政界)에 데뷔하는 자리였다. 세바스찬과 나는 최고의 무대를 바랐다. 하늘이 우중충하기라도 했으면 사냥회의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거다.

    귀족들이 제도의 숲에 모여들었다. 주최자인 요한나 전하에게 귀족들이 차례로 인사했다. 첫 번째 차례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황태자인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였다.

    “날씨가 좋구나, 동생아. 축하한다.”

    루돌프 황태자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척 봐도 기분이 안 좋아보였다. 거긴 네가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이다, 하고 눈동자가 맹렬하게 말하고 있었다.

    조금 바보스럽다. 축하한다니? 뭘 축하한다는 것인가. 날씨가 좋은 것을? 꼭 날씨가 안 좋기를 원했다는 식으로 들린다. 그렇게 속이 좁아서야 황태자 노릇이나 하겠는가. 속이 좁더라도 주위에 드러내지 않는 정도의 요령은 발휘해라.

    “그러는 오라버니는 기분이 안 좋아보이네. 혹시 몸이라도 편찮아?”

    “…….”

    루돌프 황태자가 잠시 침묵했다. 황태자는 어투가 직설적이었지만, 우리 황녀 전하는 상상을 초월하여 직설적이었다. 말문이 막혔겠지.

    안 됐습니다, 루돌프 황태자 전하. 우리 전하는 조금 파천황입니다. 평소에 관심이 없던 여동생이라서 성격도 몰랐겠지요. 무지가 화살이 되어 돌아오는 겁니다. 안타깝지만 감내하십시오.

    “……아니, 아픈 곳은 없다. 걱정해주어서 고맙다.”

    “다행이네! 혹시라도 몸이 아프면 언제든지 말해.”

    요한나 전하가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나도 이거 준비하느라 지금 몸상태가 말이 아니야. 이런 걸 두 번이나 개최했다니, 오라버니가 대단한 줄 내가 며칠 전에서야 깨달았다니까.”

    “……고맙군. 너도 몸이 건강하기를 바란다.”

    루돌프 황태자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저건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 심정은 저도 십분 이해합니다, 황태자 전하. 저도 세바스찬도 자주 그러거든요.

    황태자 전하는 결국 반쯤 도망치듯이 걸어갔다. 주변에서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누가 보아도 첫 라운드에선 요한나 전하가 승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요한나 전하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정체불명……귀족들은 낯선 황녀의 부각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최상위 귀족들의 인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풍문으로 전해듣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전하!”

    “응, 고마워. 베스트팔렌 변경백. 경의 외모에 대한 풍문은 아직 들은 적 없지만, 만약 풍문이 있었다면 나도 똑같은 말을 돌려줬을 거야.”

    “음? 하핫, 감사합니다.”

    대체로 귀족들은 요한나 전하의 접대에 만족했다.

    전하는 천성적으로 가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갓난아기부터 배운 예의범절이 몸짓에 스며들어 있었으나, 본인 자체는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묘한 밸런스가 있었다.

    “오십 평생에 황녀 전하께 외모를 칭찬받다니 오래 살고도 볼 일이군요.”

    “그거 안타깝네. 백작 나이가 지금보다 딱 절반이었다면 고백했을 텐데.”

    “흐하하핫!”

    요한나 전하는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 너스레에 주변의 귀족들이 웃었다.

    무엇보다도 요한나 전하에겐 재치가 있었다. 억지로 쥐어짜낸 재치가 아니라 척수반사적으로 그냥 튀어나가는 재치가. 여기 모인 절대다수의 귀족이 요한나 전하를 처음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빠른 속도로 어린 황녀에게 호감을 가졌다.

    숨은 진주. 아마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똑같은 단어가 떠오르고 있겠지.

    “크흐. 황녀 전하께 고백받을 기회를 놓치다니, 이거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베스트팔렌 변경백이 소리쳤다.

    “어이, 프리츠! 보았는가. 내가 이렇게 잘 나가는 양반이라 이거야!”

    “이 친구가 황녀 전하 앞에서 아주 원숭이가 되게 생겼군.”

    다음 순번을 기다리던 노신사가 고개를 저었다. 듬직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남자가 황녀 전하 앞으로 와서 허리를 굽혔다. 공손한 인사였으나 그마저도 노인이 타고난 위압감을 가리지 못했다.

    “처음 존안을 뵙습니다, 전하.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입니다.”

    내가 아, 하고 조용히 감탄했다.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그는 게임에서 매우 특이한 인물에 속했다.

    용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용사를 적대하지도 않았다.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어디까지나 인류의 사명을 강조했다.

    인류는 어디까지나 인류로서 싸워야지 용사라는 한 개인한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설령 마왕군에 승리할지라도 인류는 영웅주의라는 전염병에 걸려버린다…….

    변경백들은 마지막까지 인류의 긍지를 보여주겠다며 출격했다. 용사가 아니어도 인류는 마왕군에 대항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결국 변경백들의 군대는 패배했지만 역사상 최초로 검은 산맥 너머로 진군했다.

    요한나 전하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환영해요, 긍지 높은 북방의 사자. 그대에 대해서는 나도 몇 번이나 들었어.”

    긍지 높은 북방의 사자……. 전하가 말한 그대로였다. 프린츠 폰 로젠베르크를 표현하는 데 그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으리라.

    당사자인 변경백도 놀랐는지 눈이 약간 커졌다. 곧이어 얇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이제 살아간다기보다 죽어간다는 말이 어울리는 노인입니다. 소인에게 과분한 영광을 선물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변경백이? 푸하하, 그럴 리가. 변경백이 죽어가는 거라면 세상에 죽어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얼마 없을걸.”

    요한나 전하가 키득거렸다. 아슬아슬하게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것을 베스트팔렌 변경백과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흥미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리지만 삶이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도리어 죽음으로써 증명되는 삶도 있겠지.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 내가 그대를 환영한다고 말한 건 공치사가 아니야.”

    “……황공하옵니다, 전하.”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까 전에 허리를 숙인 것과 분위기가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진심이 느껴졌다.

    “소신을 기억해주시는 분께서 이 황도에 계시다면, 저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그것만으로 기쁜 마음을 갖고 북방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하여간 네놈은 너무 딱딱해.”

    베스트팔렌 변경백이 끼어들었다.

    “거 황녀 전하 앞에서 왜 이리 진지한가. 그러니까 나보다 인기가 없는걸세, 이 양반아.”

    “……후,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하지 못한다더니. 자네가 나한테 마리엔부르크에서 온 그 영애를 빼앗긴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아, 아니! 그 사건은 언급하지 않기로 약조했잖는가!”

    베스트팔렌 변경백이 허둥지둥거렸다. 그러자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미소를 지었다. 악동처럼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던전 어택>에서 변경백의 진중하고 차분한 모습만 구경한 나로서는 놀랐지만, 전혀 인상이 어색하지 않았다.

    “황녀 전하. 송구하옵니다만, 만에 하나 저희 두 사람의 나이가 절반이었더라도 전하께서는 결코 베스트팔렌 경에게 고백하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헤에. 그건 흥미가 깊은걸. 왜 그렇지?”

    “바로 소신이 전하께 먼저 고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신이 베스트팔렌 경에게 약탈한 아가씨가 총 일곱 명이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요한나 전하가 소리높여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는 전염병이 있어 근처의 귀족들도 다함께 웃어재꼈다. 졸지에 아가씨들을 빼앗긴 남자가 되어버린 베스트팔렌 변경백만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아닙니다! 전하! 사실무근입니다.”

    “호오. 나의 친우여, 감히 황녀 전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셈인가. 뭣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일곱 처자의 이름을 자네에게 속삭여줄 수도 있네마는.”

    “이……일곱 명이 아니라 여섯 명이야!”

    베스트팔렌 변경백이 노호를 터트렸다.

    이곳이 전쟁터였다면 산천초목이 떨었겠지. 아쉽게도 여긴 사냥터였다. 귀족들은 빵 터져서 더 크게 웃었다. 본래 적대적일 터인 변경백과 궁정귀족 사이에 온화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흡족했다. 지금까지 데뷔는 더없이 성공적이었다. 자아, 앞으로는 어떻게 흘러갈까…….

    군복을 입은 엘리자베트 황녀가 걸어왔다.

    머리카락은, 요한나 전하와 똑같은 은빛. 다만 요한나 전하와 다르게 엘리자베트 황녀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다. 절도 있는 걸음에 맞추어서 은발이 찰랑거렸다.

    변경백들의 차례가 끝난 다음이 엘리자베트 제3황녀였다.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에바트리에 백작의 작위를 갖고 있었다. 황궁의 무도회나 행사의 주최자가 아닌 이상, 순번상 백작 취급을 받았다.

    “오랜만입니다, 언니.”

    “응, 엘리자베트! 오랜만이야. 거의 이 년만인가?”

    “그쯤 되었군요. 자매끼리도 얼굴을 보기 어려웠으니, 새삼스레 시절이 다망함을 느낍니다.”

    엘리자베트 황녀가 미소를 지었다. 도저히 열세 살이라곤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절제된 미소였다. 하긴 요한나 전하도 이따금씩 나이에 맞지 않는 통찰력을 보여주곤 했다. 어찌 되어먹은 핏줄인지…….

    “맏언니의 장례식이었지요. 그분께서 살아계셨다면 지금 언니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많이 기뻐하셨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요한나 전하의 표정이 멈칫했다.

    주변이 싸늘해졌다.

    말 자체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허나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일찍이 제 나름대로 후계경쟁을 물리치고 당주직에 올라섰다. 황녀의 저의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어수룩한 자는 없었다.

    작년 말에서 올해 초, 두 명의 황자가 연달아 죽었다. 제3황자와 제4황자. 저마다 병으로, 사고로 인해 죽었다고 전해지나……일각에선 엘리자베트 황녀가 암살을 획책한 거 아니냐고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런 엘리자베트가 예전에 의문사 당한 제1황녀를 언급했다. 그녀는 요한나 전하에게 경고한 것이다. 왜 나대고 있는가. 당신도 맏언니처럼 죽고 싶은가.

    엘리자베트 황녀는 미소를 지었다. 마치 정말로 여동생이 친언니에게 다정히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아직 우리 가족에 오라버니들과 언니가 남아서 다행입니다. 물론, 아바마마께서도 건재하시지요. 작은 가족이나마 화목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

    요한나 전하의 숫제 얼굴이 창백해졌다. 바로 옆에 서 있는 내 눈에는 보였다. 어깨까지 자그맣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아주 살짝 요한나 전하와 엘리자베트 황녀 사이에 끼어들어, 미리 준비한 포도주잔을 요한나 전하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요한나 전하가 내쪽을 쳐다보았다.

    짧게 시선이 오고갔다.

    그걸로 충분했다. 요한나 전하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녀는 와인잔을 받아들었다. 어깨가 떨리는 것도 멈추었다.

    나는 말없이 제자리로 물러섰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인이 평범하게 음료수를 올려바친 것에 불과했다.

    “맞아, 엘리자베트. 우리 가족에는 불행한 일이 너무 많았어. 로베르트의 죽음은 특히 충격이었지……여신께서 우리 가족의 영혼을 굽어 살피시기를.”

    나는 또 한 잔의 포도주를 준비해서 이번엔 엘리자베트 황녀에게 올렸다. 엘리자베트 황녀가 차분하게 와인잔을 넘겨받았다. 이로써 요한나 전하에게 포도주를 바쳤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되겠지.

    “…….”

    순간, 황녀의 푸른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싸늘한 무언가가 등줄기를 핥고 지나갔다. 아주 잠깐이었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 언니. 여신께서 우리 가족을 굽어 살피시기를.”

    쨍그랑, 하고 두 자매가 와인잔을 부딪쳤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DaysofDoom// 예압, 첫코.

    수천천사//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오해입니다. 정말이에요.

    할레데임// 본작으로 키우면 두 작품을 동시에 연재하게 되어 제가 죽어버립니다.

    NineBreaker// 더블연재=죽음, 이라고 제 머릿속 사전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ㅅㅅㅅㅅㅅㅅㅅㅅ// 죄송합니다. 딴길로 샜는데 생각보다 재밌네요.(...) 다음편에 얼른 끝내고 본편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곰상아들// 예압, 세이프.

    fewfqew// 놀랍게도 이곳에서 주인공은 꽤 성실합니다!

    시크리트으// 장담컨대 아마도 시크리트으 님은 모든 독자 여러분을 통틀어서 가장 열렬히 베드엔딩을 바라는 분일 겁니다.(...)

    어둠을헤매는자// 내일 끝낼 예정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은 두 편 연참했으니 용서해주시길...

    katrias// 말씀이 너무나 난해하여 저로서는 알아듣기 어렵군요!

    쓰다보니 재밌어서 다음편에 끝날 예정이 되었습니다.(...) 아니, 원래대로라면 193편에서 대사냥회가 끝나고 외전도 끝날 계획이었습니다만...

    요한나가 생각보다 귀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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