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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93화 (193/510)
  • 00193 IF 루트: 프린세스 디펜스  =========================================================================

    *  *  *

    시종의 아침은 빠르다.

    새벽 다섯 시 무렵, 눈이 뜨자마자 벌떡 일어선다. 재빨리 움직인다. 의복을 정중하게 차려입는 데 대략 십오 분. 어젯밤에 먹다 남은 호밀빵을 깨작이면서 방문을 나선다.

    “어머나, 로리타 씨.”

    “로리타 씨. 좋은 아침이에요.”

    벌써 시녀들이 일어나서 나를 반기었다. 궁전 서쪽에는 시녀 전용의 방들이 있었는데, 그중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지내는 큰방이 있었다.

    “숙녀의 방에 너무 함부로 들어오는 거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아침마다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다보니 저절로 잠이 깨더군요”

    “깔깔깔.”

    시녀들이 작게 키득거렸다. 웃는 데도 격조가 있었다. 이들은 전원 귀족 가문의 삼녀나 사녀였다. 방이 꽤나 호화로워서 벽난로까지 있었는데, 바로 이 벽난로가 나의 관심사였다.

    밤새 벽난로에 뜨겁게 달구어진 돌멩이들. 이걸 집개로 들어서 나무통에 옮겼다. 금세 나무통 두 개가 돌멩이들로 가득 찼다. 내가 양손으로 나무통을 들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숙녀 여러분.”

    “잠깐만요. 저도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방문을 나서려는 데 어여쁜 시녀 한 명이 따라왔다. 이런, 최근에 이런 일이 많아졌다. 등 뒤에서도 “어머, 에리엘 대담해!”라든지 “어쩜 좋아!”라든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너희, 그런 거 아니야!”

    시녀가 뒤를 돌아보면서 빽 소리를 질렀다. 얼굴에는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가 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같이 가도 될까요, 하고 시선이 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가……내가 속으로 질려하면서 싱긋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에리엘 님. 에스코트를 할 순 없겠지만 기꺼이.”

    “……고마워요.”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궁전의 복도를 총총 걸어갔다. 등 뒤로 다른 시녀들이 놀려대는 소리가 또 울렸다. 휘파람까지 부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오늘 저녁쯤에는 에리엘 시녀와 나 사이의 염문이 황궁 전체에 퍼지리라.

    “로리타 님은 상냥하시네요. 도저히 평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워요.”

    “그건 약간 편견이 섞인 견해입니다, 에리엘 님. 저보다 예의바른 평민은 세상에 넘쳐납니다.”

    “그런가요? 저는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걸요.”

    에리엘이 귀엽게 웃었다.

    이것도 데이트라고 해야 할까. 합스부르크의 황궁은 무척 넓었고, 인적이 드문 곳 따위는 넘쳐흘렀다. 서로 마음이 맞는 시종들끼리 '즐거운 한밤'을 보내는 것쯤이야 비일비재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에서 두 남녀가 몰래 섹스한다라……. 분에 넘치는 호화라고 해야 할련지.

    “오늘 아침은 다행히 따뜻하네요. 약간 더운걸요.”

    하고 에리엘이 슬쩍 목깃을 잡고 흔들었다. 노골적인 섹스 어필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뗐다.

    “그렇습니까? 하긴 여성 분들은 저희보다 옷이 두껍지요. 여름에는 얼마나 더울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시녀 여러분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됩니다.”

    “……아뇨, 저희는 그래도 힘을 덜 쓰는걸요.”

    에리엘이 약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지 마라. 꼭 내가 나쁜 짓을 저지른 것 같잖냐.

    그래도 이 시녀는 얌전한 편이었다. 대놓고 오늘밤을 같이 보내자고 추파를 던져온 여자도 있었다. 으이구, 루돌프 황태자이니 엘리자베트 황녀이니 궁정대신들이니 신경 쓸 게 많은 판국에 스트레스만 쌓여간다.

    딱히 섹스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의도가 너무 빤해서 꺼리는 거다.

    황제 폐하께 성을 하사받고, 순식간에 요한나 전하의 전속으로 발탁된 평민. 수도에서 최근 유행하는 음유시인극의 주연. 묘령의 여성들에게 이처럼 군침이 도는 사냥감은 없겠지. “나 그 남자랑 잤어!”라는 한 마디의 말만 있어도 일약 궁내부 최고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말하자면 버블경제이다. 내 원래 가치 이상의 거뿜이 신나게 부풀어오르고 있다.

    어처구니없다.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것은 벌써 그 자체로 위험하다. 한때의 쾌락을 쫓겠다고 내가 위험부담을 감수할 리 없지 않은가?

    나의 취향은 그거다. 인기라든지 소문이라든지, 그런 것에 초연한 여자가 좋다. “소문 따위 알 게 뭐야. 꺼져! 그것보다 너, 마음에 든다. 잠깐 좆대가리 좀 세워봐!” 하고 똑바르게 자기 길을 향해 질주하는 여성이 매력적이다. 스스로도 이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하지만 뭐 어쩔 텐가.

    “그러고보니, 요한나 전하께서는 단 과자를 좋아하신다고요?”

    “맞습니다. 항상 저를 닥달해서 과자를 구해오라 하시지요. 곤란합니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참고로 내 마음속에서 요한나 전하는 완전히 여동생이 되어 있다. 과자가 먹고 싶어! 스파이제아이즈(Speiseeis)가 먹고 싶어! 하고 시도때도 없이 졸라댄다.

    단 것만 먹으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면 아예 방바닥을 굴러버린다. 이건 수사학이 아니다. 말 그대로 온몸으로 장렬하게 바닥을 구른다. “과자! 과자! 과자!”라고 울부짖으면서. 진짜 사람을 미치게 하는 짓이다. 입맛도 행동도 영락없이 꼬맹이다!

    본래 주방에서 과자를 가져오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나의 입장이 좋지 않다. 벼락출세한 녀석, 그렇게 평가받고 있다. 주방의 하인들한테 사정사정해야 그날의 과자를 확보한다.

    피로한 발을 이끌고 과자를 전하에게 내밀면……요한나 황녀 전하는 마치 꽃이 피는 것처럼 활짝 웃고는.

    “고마워, 로리타!”

    하고 내 몸을 껴안는다.

    우리 황녀 전하께선 아무 사람이나 껴안는다. 노인이든 천민이든 상관없이 정말로 원한다면 부둥킬 수 있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건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하의 미소가 보이는 방사선상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피격당하여 침몰한다. 세바스찬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용서하고, 전하는 행복해진다. 결국 다음번에 또 다시 전하의 억지에 말려든다…….

    “이렇게 말하면 불경하겠지만, 요한나 전하께선 귀여우시니까요.”

    “예. 전하께는 아무래도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맞아, 묘하게 매력이 있는 분이시지. 나의 주인님은. 그래서 더더욱 내버려둘 수 없다…….

    “제가 시내에 좋은 과자가게를 알고 있어요. 소개해드릴까요?”

    “시내에 말입니까?”

    “주방 하인들이 로리타 님한테 못살게 군다고 들었어요.”

    과연, 배려해준다는 명목인가. 데쉬에 실패했다고 해서 간단히 물러나는 여자가 아니었는가.

    에리엘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전속 시종인 로리타 님이 계속해서 주방 하인들한테 고개를 숙여서야……시종의 얼굴은 곧 주인의 얼굴. 그렇지요?”

    배려에다가 하인의 의무까지. 이래서야 거절할 명분이 없다. 상대방은 어떻게든 나한테 빚을 만들어두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선 물러서야 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미처 그걸 생각하지 못했군요. 아직 여러모로 미숙합니다. 앞으로도 지도편달, 모쪼록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얼요. 서로 함께 고생하는 처지인걸요.”

    잠시 뒤 우리는 요한나 전하의 별실에 도착했다. 문앞에 당도하자 에리엘이 그럼 저는 이만, 하고 총총걸음으로 떠나갔다. 승리자의 발걸음이었다.

    “후우.”

    이제 알겠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궁전은 마경(魔境)이다. 황태자와 엘리자베트뿐만이 아니다. 손쉬운 상대가 한 명도 없다……정말로.

    내가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전하. 디펜소르입니다. 기침하셨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반복해도 여전했다. 이것도 익숙한 일이었다. 스무 번 가까이 노크를 하자, 그제서야 문 너머로 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대충 들어오라는 말인 것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방문을 열었다.

    온통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방에 붉고 두터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값비싼 채광창에서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내 볼품없는 숙실과 천양지차였다. 뭐, 당연하지만.

    “우으으응……로리타아……?”

    방의 주인인 요한나 전하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울렸다.

    이불이 구석에 밀리다 못해 침대 옆바닥에 떨어졌는데, 그 탓에 나는 황녀 전하의 잠옷차림을 그대로 구경하는 영광을 누렸다. 옷 사이로 종아리며 뱃살이며 훤하게 드러났다. 이것도 익숙하지만.

    “예, 디펜소르입니다. 전하. 간밤에 평안하셨는지요?”

    “느으으……태야앙……태양을 가려줘어어…….”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나는 나무통을 내려놓고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커튼을 활짝 열어재꼈다. 아직 아침이지만 제법 햇빛이 뚜렷하게 들어왔다. 제국에서 제일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 궁전, 거기에서 제일 좋은 곳에 자리잡은 황녀의 별실다웠다.

    “그어, 우워어어어……!”

    요한나 전하가 좀비처럼 신음했다. 그냥 내버려두자.

    나는 방 한가운데의 욕조로 향했다. 새하얀 욕조는 이래봬도 전하의 침실에서 가장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목욕물에 독극물이 있을 경우 자동으로 발견해서 정화했다. 덕분에 굳이 매일 아침마다 물을 퍼나를 필요가 없었다.

    ─ 퐁, 퐁, 퐁.

    밤새도록 달궈진 돌멩이를 욕조에 넣었다. 모락모락 수증기가 일어났다. 내 하루일과는 이처럼 요한나 전하의 목욕물을 데우는 걸로 시작했다.

    “태양, 태양이……감히 본녀를 죽이려 들고 있다아아. 로리타, 태양을 물리쳐줘……!”

    “곤란하군요. 제아무리 저라도 아폴론 신을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전하, 어젯밤은 무엇 때문에 늦게 주무셨는지요?”

    “요새 프랑크에서 유행하는 서사시를 읽다가…….”

    쉽게 말해 소설책을 읽다가 밤을 꼬박 샜다는 얘기이다.

    내가 피식 웃으면서 욕조물에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했다. 음, 딱 적당하게 뜨거워졌다.

    전하의 침실에도 벽난로가 있었다면 수고를 덜었겠지만. 여태껏 황실에서 찬밥신세를 받아온 전하여도 침실만큼은 최고급이었다. 여긴 방 자체가 하나의 마법 아티팩트여서 온도 조절이 전부 이루어졌다.

    방금 문안에 들어온 것도 그러하다. 만약 내가 아니라 다른 시종이 들어왔다면 그 순간 혼절했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황금을 쏟아부어 방을 만들었을지, 상상하기만 해도 아연해지는군…….

    “전하, 다 준비되었습니다. 아침 목욕 시간입니다.”

    “어째서 사람은 매일 씻을 필요가 있는 거야아……? 들에서 살아가는 동물은 며칠이든 안 씻잖아. 인간이란, 잘못되어 있어……세상은 불합리해애…….”

    “인간이 동물과 다르고자 발버둥치기 때문이겠지요. 자아, 전하.”

    결국 침대에 가서 직접 전하를 일으켰다.

    요한나 전하가 비틀비틀거리며 욕조로 향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잠옷용 원피스가 흘러내렸다. 소녀의 여리고 하얀 몸이 드러났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욕조에 발끝부터 집어넣었다.

    “하아아아―.”

    온몸을 담그고 요한나 전하가 기분 좋게 한숨을 토했다. 전하는 양손으로 어푸어푸 얼굴을 씻었다. 꼭 어린 고양이 같았다.

    전하가 잔뜩 풀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어쩌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건지도 몰라.”

    “아직 열네 살이신데 삶의 의미를 찾으시다니 역시 전하입니다.”

    나는 욕조 옆바닥에 앉았다. 전하의 오른팔을 잡아 정성스럽게 꽃향기 향유를 발랐다. 향유에 소녀의 살결이 투명하게 매끈해졌다.

    “으응? 칭찬하는 거야?”

    “물론입니다, 전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우시고 현명하신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 전하. 소인이 어찌 칭찬 이외에 다른 말을 입에 담을 수나 있겠습니까?”

    “그렇지? 하하하. 난 역시 대단하다니까.”

    “자아, 전하. 이제 왼팔을.”

    요한나 전하가 얌전하게 왼팔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귀여워라.

    당연하지만, 귀엽다는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열네 살 꼬맹이의 속살을 관람한들 뭐 다른 생각이 생기겠는가?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인간이었다. 애당초 그런 낌새가 있었다면 전하가 나를 발탁하지도 않았겠지.

    “사흘 뒤가 드디어 대사냥회입니다. 전하, 준비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맞아! 진짜 고생했대두. 으으, 아바마마가 부탁해도 다시는 맡지 않을 거야.”

    요한나 전하가 욕실물에 잠겨 부르르 떨었다. 치가 떨리는 모양이었다. 사실 요한나 전하는 계획만 짰다. 실질적인 교섭과 준비는 세바스찬이 다 했다.

    “다시는, 절대 다시는 이런 일은 사양일세!”

    바로 어젯밤에 세바스찬이 절규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세바스찬은 요 몇 주일 사이에 머리카락이 부쩍 빠졌다. 그나마 내가 옆에서 조력했으나 실무적인 부분에선 아직 초보자. 별 도움이 안 되었다. 불쌍한 세바스찬 아저씨……안 그래도 머리카락이 부족하다며 걱정하던데.

    “앞으로 사흘만 더 참으시면 됩니다. 딱 사흘이요.”

    “으윽, 사흘……. 사흘…….”

    머리를 감기고 거기에도 향유를 바른다.

    요한나 전하가 욕조에서 나왔다. 물기를 머금은 살결을 내가 최고급 수건으로 닦았다. 머리까지 말리면 완벽. 이 다음부터는 치장 전문 시녀들에게 맡길 차례였다.

    내가 막 뽀송뽀송해진 요한나 전하에게 천옷을 둘렀다.

    “하지만 전하께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음.”

    하얀 천옷을 망토처럼 펄럭이며 요한나 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나는 대단하니까. 로리타, 행여라도 날 쫓아오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이를 말씀입니까, 나의 주인이시여.”

    내가 가슴에 손을 올리면서 허리를 숙였다. 창밖에선 이제 환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요한나 전하의 은빛 머리카락이 빛났다.

    ============================ 작품 후기 ============================

    렛츠 연참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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