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92화 (192/510)
  • 00192 IF 루트: 프린세스 디펜스  =========================================================================

    *  *  *

    황제가 노발대발했다. 원래 현 합스부르크의 지존은 정무에 관심이 없고 별궁에 틀어박혀 유흥만 일삼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자기 신변에 위험이 미칠 뻔하자 분노한 것일까. 드물게도 별궁으로 시종장과 집사장을 불러들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네놈들이 감히 지존의 옥체를 손상시킬 생각이냐!” 하고 시계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옹졸하다고 해야 할지, 기막히다고 해야 할지, 원. 저런 아비의 핏줄에서 엘리자베트 같은 위인이 용케도 태어났다.

    그렇지만 제왕은 제왕. 내명부와 근위대는 황제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유력한 황위계승자들을 섭외한 것이 그 일환이었다.

    황제의 분노에 황위계승전까지. 황궁은 빠른 속도로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향해갔다.

    여기에 단 하루만 있었다면 궁정대신들까지 끼어들었겠지. 제국 자체가 요동쳤을 거다. 그러나 사건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끝났다.

    “이번 사건에서 소위 침입자는 제가 후원한 인물입니다.”

    요한나 폰 합스부루크 황녀가 폭로했다.

    가라사대, 최근 들어 황궁의 전체적인 경비가 약화된 것 같아서 돌파를 시험해봤다고.

    당연히 난리가 났다. 일국의 황녀가 무슨 얼빠진 짓을 벌였는가, 아무리 말괄량이로 소문난 제2황녀라 할지라도 황실의 일원으로서 자각이 부족한 것 아닌가……그러자 공식적으로 준비된 석상에서 요한나 황녀가 발표했다.

    “저는 설령 황실에 위기가 닥치더라도, 궁내부의 모든 신민이 합심하여 사태에 대처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침입자로 하여금 일부러 연못에 빠지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태가 터져도 궁내부에선 누구 책임이느냐를 두고 싸울 뿐이었습니다…….”

    열네 살의 아름다운 황녀가 눈물을 흘렸다.

    “저희 제국은 수많은 위험에 겪을 때마다 일치단결하여 극복했다고 배웠습니다. 과거의 영광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저는, 이런 일이 될 줄 몰랐습니다…….”

    사태가 순식간에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궁정대신들은 곧바로 태세를 전환하여 “황실이 위험에 처했는데 무슨 짓거리냐!”, “책임 떠넘기기에 혈안이 되어 본분을 잊어버리다니!”, “장난하지 마라!” 하고 궁내부를 질타했다.

    어차피 내명부든 근위대든 황실의 측근. 내명부와 근위대의 위축은 황권의 약화이고, 황권의 약화는 곧 신권의 강화이다.

    게다가 차기 황제인 루돌프와 엘리자베트에게 경고까지 줄 수 있다. 대신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비추었겠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내명부와 근위대도 파워게임을 계속할 수 없었다. 시녀장과 근위대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가겠다고 말했다.

    오직 황제만이 사의를 막을 수 있으나 명분이 없었다. 황제 본인이 격분하여 벌어진 일 아닌가? 이제 와서 말을 되돌릴 수 없다. 체면 이전에 권위가 문제된다. 궁정대신들은 손도 쓰지 않고 코를 풀어버린 기분이겠지.

    철없는 황녀와 우둔한 황제가 만들어낸 참극.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될 예정이었으나……요한나 황녀가 공식석상에서 다시 한번 발표했다.

    “소녀는 시녀장과 근위대장이 물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두 분이 과오를 깨달았다면 이제야말로 서로 협력하여 대처할 때가 아닌가요? 소녀는 제국의 신하들을 믿습니다.”

    지난 번 발표가 원투 펀치였다면 이번엔 어퍼컷.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명령했다.

    “당사자인 황녀의 마음씨가 실로 갸륵하니 어찌 신들이라고 감복하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비록 실수했으나, 제국의 명예를 다시 회복할 기회도 오로지 그대들에게만 있도다. 필사의 각오로 임하라.”

    근위대장과 시녀장, 궁내부의 실세는 그날로 요한나 황녀를 찾아가 감사의 말을 올렸다.

    전형적인 병 주고 약 주기였지만 어쩌겠는가? 마음속에서 울분이 터지든 말든 얼굴로는 감복해야지. 그들은 나한테까지 사죄했다. 빌어먹을 년놈들, 꼴 좋다!

    졸지에 궁정대신들만 닭 쫓던 개가 되었다.

    대신들은 내부불화를 명목으로 궁내부를 공격했었다. 이제 와서 근위대장과 시녀장의 협력에 초를 칠 수는 없다. 도리어 대신들이 내부불화를 불러일으키는 꼴이니 말이다. 결국 근위대장과 시녀장은 1년의 감봉형에 처해졌을 뿐이다.

    대신들은 울상을 지었다. 별 도리가 없었다. 그 정도 성과에 만족하고 물러설 수밖에. 사건은 정리되어 외부에 발표되었으며, 사람들은 황제 폐하의 은덕과 황녀 전하의 심성을 찬양했다…….

    “최근에는 음유시인들까지 가세했습니다.”

    세바스찬이 전해주었다.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제국의 명예를 울부짖는 장면이 가장 인기라고 하더군요.”

    “푸하하하!”

    요한나 황녀가 폭소했다. 방바닥을 이리저리 뒹굴면서 배를 붙잡고 웃었다. 어찌나 요란하게 굴렀는지 치맛자락이 헝클어져 하얀 허벅지까지 드러났다. 세바스찬이 흠흠, 하고 헛기침했다.

    이것이 '제국을 위해 눈물 흘린 황녀',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 제2황녀의 실체……. 진실이란 참 무서운 법이지.

    “전하, 아무리 그래도 예법이 아닙니다.”

    “뭐, 세바스찬 님. 괜찮지 않겠습니까?”

    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끼어들었다.

    “일이 완전히 일단락된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마음껏 웃고 싶으시겠지요. 오늘만큼은 전하의 웃음소리가 저희에게도 포상일 것입니다.”

    “흐음.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오늘만큼은 넘어가지.”

    세바스찬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저씨, 성실하고 깐깐한 사람이긴 한데 묘하게 무른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매력적이지만.

    얼마 전, 세바스찬은 아예 요한나 전하의 집사로 전속되었다. 황녀의 최측근으로 발탁된 것이니 승진이었다.

    ‘명목상의 승진이지만 말이야.’

    세바스찬은 나를 감옥에서 빼내는 과정에 개입했다. 비록 이번 사건이 미담으로 끝났다고는 하나, 권한을 뛰어넘어 행동한 시종에게는 일종의 제재가 필요했다. 그런 것이다. 사실상 출세경쟁에서 탈락했다고 보아도 좋겠지.

    그러나 세바스찬은 단 한번도 나에게 아쉬운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아저씨에겐 감사한 일뿐이다. 과연, 평생을 걸치더라도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련지 어떨지…….

    “그래.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로리타밖에 없다니까!”

    “전하. 소인은 오늘만큼은, 이라고 확실히 말씀드렸습니다.”

    “아아아―, 어째서 내 주변에는 샌님인 시종밖에 없을까.”

    요한나 전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여전히 방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꼭 버릇 없는 여동생을 돌보는 느낌이라서 저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참고로 나는 요한나 전하 전속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황제가, 이런. 이게 아니지……황제 폐하께서는 전하의 재치에 크게 흡족하셨다. 황제께선 일련의 사건이 연극임을 알고 계셨다. 요한나 전하가 발표를 터트리기 전에 전부 계획을 말씀드렸으니까.

    폐하께선 요한나 전하와 일대일 독담하며 무엇이든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노라고 말씀하셨다. 그 자리에서 전하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말했다.

    “로리타를 제 전속 시종으로 삼아주세요, 아바마마.”

    “가납하노라. 평민 로리타에게 황실을 지키라는 의미에서 디펜소르의 성을 하사한다.”

    그리하여 나는 로리타 디펜소르가 되었다.

    귀족은 아니어도 지엄한 황제 폐하께서 성을 내려주신 것이다. 반쯤 귀족으로 취급받았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지하감옥에서 모질게 고문을 당했으니 뭐, 엄청 출세했다고 기뻐해야 할까……. 우리 황녀 전하 만만세다.

    “참, 아바마마가 나한테 일을 하나 맡겼어.”

    “일이라니요?”

    요한나 전하가 벌떡 일어서서 드레스를 손으로 털었다.

    “올해 열리는 대사냥회를 나보고 준비하고 주관하라던데. 어지간히도 내가 귀여웠나봐, 아바마마.”

    “대사냥회!”

    세바스찬이 놀랐다. 반응이 심상치 않아서 내가 물었다.

    “실례지만, 세바스찬 님. 대사냥회가 무엇입니까?”

    “사 년에 한 번씩 변경백들이 모여서 여는 사냥대회라네. 황실과 변경백들의 단결을 공고히 해서 외부에 알리는 용도이지. 물론, 수도의 대소신료도 대거 참석하네.”

    변경백……그러니까 <던전 어택>의 폰 로젠베르크 같은 인물인가.

    대충 짐작이 간다. 합스부르크의 국경은 변경백들이 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최고의 군벌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절대로 가벼운 행사가 아니리라. 세바스찬 집사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대체로 대사냥회를 주관하는 인물은 차기 황제일세. 지금까지 루돌프 황태자 전하께서 맡으셨지. 그런 중요한 행사를 요한나 전하께서…….”

    “으으.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귀찮네.”

    반면에 요한나 전하는 그저 질색이라는 얼굴이었다.

    “사냥회 준비하려면 황궁의 하인이랑 경비대를 죄다 지휘해야 할 거 아냐. 하녀들 배치에서 병사들 배치까지……아, 저번에 시녀장이랑 근위대장한테 지워둔 빚을 이때 써먹어야겠다. 역시 난 천재야!”

    전하가 싱글벙글 웃었다.

    아무래도 요한나 전하는 실무 작업에만 관심이 가는 듯했다. 시녀의 우두머리들을 어떻게 중재하고 지휘할지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었다. 당연하게도, 하인들 사이에도 파벌은 존재했다. 그걸 다스려서 행사를 완성시키는 것도 대단히 커다란 일이었다.

    세바스찬과 나는 황녀 전하의 별실에서 빠져나왔다.

    우리는 복도를 걸어가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세바스찬 님. 전하께서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아아. 황태자 전하가 어떻게 생각하실지 걱정이야. 엘리자베트 전하도 문제로군.”

    세바스찬이 한숨을 쉬었다.

    “큰일이야. 후계 경쟁은 두 분 전하로 차근차근 좁혀지고 있었네. 거기에 갑작스럽게 요한나 전하가 끼어들게 되었어. 지금까지 요한나 전하에겐 별다른 견제가 없었네만, 앞으로 어찌될 것인지…….”

    연못 사건은 단순한 미담이 아니다. 극소수만 아는 사실이지만,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갈려 있다.

    승자는 물론 요한나 전하이다.

    일단 내명부와 근위대에 빚을 만들었다. 각 부서의 탑이 감봉형에 처해졌긴 했도, 만약 서로가 끝장을 볼 때까지 치달았다면 어느 한쪽은 아예 파멸해버렸을 터이다. 누구도 치킨런은 바라지 않는다. 적절하게 중재해준 황녀 전하에게 은혜를 느끼겠지.

    다음으로 황제 폐하의 호의를 샀고, 제도 시민들의 인기까지 얻었다. 궁정대신들은 약간 불만족스럽긴 해도 약간이나마 궁내부에 타격을 입혔다. 아직까지 요한나 황녀 전하와 척을 질 일이 없다.

    패배자는 루돌프 황태자와 엘리자베트 제3황녀.

    두 사람은 이번 기회에 후계경쟁에서 앞서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생뚱맞게,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습격을 당해버렸다. 그 둘에게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란 존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조커였다.

    기습은 뼈아팠다. 내명부와 근위대를 결국 구해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부서들의 분란을 뒤에서 획책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수하에게는 믿음을 잃었으며 잠재적 적들에겐 의심을 샀다. 손해밖에 보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들은 요한나 전하를 극도로 경계하겠지. 진심으로 나올 거다.

    특히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제3황녀는 요주의 인물이다. 그녀는 단순히 장래에 정적이 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남동생을 암살했다. 별로 인연이 없는 언니를 살해하는 데 망설일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요한나 전하는 아마 세상에서 제일 유능하고 위험할 사람에게 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걸 막아내는 것이야말로 나 로리타 디펜소르에게 내려진 사명이겠지…….

    “세바스찬 님. 그 두 분 전하와 관련해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으음?”

    “요한나 전하의 안위가 걸린 일입니다. 극히 중요합니다.”

    기껏해야 범재에 불과한 내가 천재인 엘리자베트를 막는다.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권력싸움에서 패배한 요한나 전하에게 남는 미래란 간살(姦殺)뿐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