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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91화 (191/510)

00191 IF 루트: 프린세스 디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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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최악이다.

지난 열두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최악인 부분이었다고 자신한다. 아무래도 나의 인생은 이미 한번 끝나버린 것 같지만 알 게 뭔가.

눈을 뜨자마자 왠 물속에 빠졌다.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쳐 빠져나왔더니, 그 다음에는 고문특급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나는 고문당했다. 이쪽이 사정사정해서 제발 봐달라고, 용서해달라고, 하다못해 왜 날 찢고 째는 것인지 알려주라 빌어도 사람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범행을 뒤에서 지원한 사람이 누구냐!”

“지난 수요일에 네놈은 에르시 부장과 만났다. 틀림없는가?”

도무지 알아먹지 못할 헛소리만 남발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의 생존본능은 절대로 '예' 혹은 '아니오'를 말해서는 안 된다며 맹렬하게 경고했다. 뭐라고 확실하게 대답하는 순간 내 목숨이 정말로 끝장날 것 같았다. 나는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했고, 녀석들은 무조건 고문해왔다.

놀라운 점은 그거였다. 포션이었다. 뭔가 퍼런 액체가 흐르더니 상처가 죄다 회복했다. 나는 그쯤에서 완전히 별세계에 떨어져버렸음을 깨달았다. 죽기 전에 비너스빤스와 나눈 채팅, 거기에다 포션이 존재하는 세계…….

결정타는 요한나 황녀였다. 그녀는 다짜고짜 감옥에 쳐들어오더니 나를 데려갔다. 상당히 막무가내로 행동했는지 간수들이랑 대판 싸운 모양이었다.

여기서 모양이었다, 라고 말한 까닭은 당시에 내가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심문이 고통스러운 나머지 나는 혼절해버렸다.

요한나 황녀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십중팔구 죽었겠지……고문을 버티다 못해 에르시 부장이고 나발이고 전부 예, 예, 하고 대답했을 테고 나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죄목이 붙어 능지처참 당했을 거다. 황녀 전하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몸은 좀 괜찮아졌는가?”

침실에서 쉬고 있자니 세바스찬이 들어왔다. 이 사람 역시 나의 은인이었다. 명령한 것은 요한나 황녀였어도 실제로 간수들을 회유한 자는 세바스찬이라고 들었다. 여기 침실을 수배해준 것도 그였다.

“예, 세바스찬 님께서 보살펴주신 덕분입니다.”

“무얼. 나는 황녀 전하의 명령에 따를 뿐일세.”

세바스찬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제국의 일급 시종이었으며, 나는 연고 따윈 아무것도 없는 이방인이었다. 신분상에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세바스찬은 나에게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 남자가 어느 정도의 인격자인지 짐작할 만했다.

“자네에겐 미안한 일이네만…….”

“문제가 발생했군요.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재빨리 말하자 세바스찬이 살짝 놀라워했다.

“침착하군. 불과 한 시간 전에 감옥을 빠져나온 것에 비해서.”

내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사정은 모르겠어도 고문형에 처한 자를 일국의 황녀가 독단적으로 빼돌렸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리 없었다. 포션이라는 기물 덕분에 체력은 회복했다. 남은 것은 정신적인 각오뿐이었다.

“맹수의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훌륭한 태도일세. 그래,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까…….”

세바스찬은 나에게 현재 황궁의 상황을 얘기해주었다. 설명이 간략하고 선명해서 알아듣기 쉬웠다. 정말이지, 날 고문한 새끼들이 반의 반만 세바스찬을 닮았어도 기꺼이 자백했을 것이다.

“대충 그렇게 되었네. 시녀장과 근위대장이 한 목소리로 요한나 황녀 전하를 성토하고 있다네.”

세바스찬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도 황녀 전하께선 시녀장을 만나고 계시지. 막무가내로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터인데 걱정이로군.”

“그렇군요.”

자존심이 걸린 부서들과 철없는 공주님. 확실히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하물며 나의 입지는 더더욱 위태로웠다.

그렇지만, 내명부와 근위대인가…….

“세바스찬 님. 혹시 전하들 중에 특별히 내명부와 친밀하신 분이 계십니까?”

“음. 아무래도 루돌프 황태자 전하께서 내명부에 가까우시지.”

본래 내명부, 시녀들을 총괄하는 사람은 황궁에서 가장 존귀한 여성인 황후였다. 루돌프 황태자는 황후의 적자.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 비해서 내명부에 가까웠다.

“그럼, 근위대에서 지지하는 전하도 혹시 따로 계십니까?”

“아아. 근위대원들은 대체로 엘리자베트 황녀 전하를 지지한다네. 몇 백 년을 통틀어서 가장 무예에 정통한 전하이시니 말일세.”

그리고 기사도를 숭상하는 근위병들은 사상 최고의 천재 엘리자베트를 지지했다. 나는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했다.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 분명히 엘리자베트의 언니가 그런 이름이었다.

<던전 어택>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는 게임이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죽어 있다.

사인은 자살. 황태자와 황자, 그러니까 친오빠들이 수 년에 걸쳐서 윤간하자 견디다 못해 목을 맸다. 사실상 타살이라 보아도 무방하겠지…….

좋게 말하면 희생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패배자이다.

세바스찬에게 간단하게 얘기를 들었을 뿐이지만, 이곳이 권력투쟁의 지옥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런 장소에서 약하다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아니, 그런 지옥에서 살아남았기에 엘리자베트 황녀는 던전 어택에서 승자가 된 것이다. 강자가 미덕이고 약자는 죄악.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는 약자에 속했다.

냉정하게 보자면 결국 대단치 않은 인물. 대륙을 일통하고 마왕을 토벌한 저 미래의 엘리자베트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존재……그렇지만, 바로 그 사람이 나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세바스찬 님. 제가 황녀 전하를 배알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무언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가?”

내 목소리에서 단단한 자신감을 느낀 것일까. 세바스찬이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왜 구해주었느냐 따위를 질문하느라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아서 높이 평가한 것인지 몰랐다.

“예. 상당히 위협적인 상황입니다만, 놈들에게 크게 한방 먹여줄지 모릅니다.”

그렇다.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나를 구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정해져 있다…….

잠시 뒤, 세바스찬은 나를 대동하고 황녀의 접견실에 갔다. 제2황녀의 직위라는 것이 별로 대단하지 않은지 접견실도 조그마했다. 세바스찬이 정중하게 방문을 두들겼다.

“전하, 세바스찬입니다.”

“들어와.”

문 너머에서 명백히 심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능하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득 불안해졌다. 그리고 나의 불안함은 방물을 열자마자 현실로 드러났다.

은색의 롤빵머리가 인상적인 소녀가 호화로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앉았다고 표현해야 할까, 그냥 몸을 파묻었다. '지금 무척 지루하다'라는 오오라를 내풍기고 있었다.

“와아아! 벌써 깨어났네!”

그런데 이쪽을 바라보자 별안간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 아닌가. 잘은 모르겠지만 제국의 황녀치고는 상당히 몸가짐이 어리숙해보였다. 솔직히 첫인상은 꽝이었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무릎을 굽혔다.

“삼가 존안을 처음 뵙겠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아름다운 명예이시여.”

“응, 그래. 내 존안이 조금 잘났긴 하지.”

소녀가 헤프게 웃으면서 자랑했다.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첫인상이 그나마 나은 편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아, 여기로 가까이 다가와봐! 난 너에게 무척 관심이 많거든. 그래, 어떻게 황궁의 절대방벽을 뚫었지? 정말로 무술도 마법도 하나도 모르는 평민이야? 목적은 뭐고? 수단은? 정말로 내부에 동조자가 있었어?”

요한나 전하가 속사포로 질문을 쏟아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자, 옆에서 세바스찬이 지원사격을 해주었다.

“황녀 전하. 그는 고문실에서 빠져나온 지 이제 한 시간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으응? 흐음. 그것도 그렇지만.”

요한나 전하는 자신의 옆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우리에겐 별로 시간이 없는데. 기껏해야 두 시간 정도일까. 두 시간 뒤에는, 그래. 이름이 로리타라고 했지? 로리타는 내명부든 근위대든 아님 둘 다든 어디로 끌려갈 거야.”

고작 두 시간……식도가 껄끄러웠다. 누군가가 뒤에서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요한나 전하가 미소를 지었다. 솔직한 미소였다.

“일단 미안하다고 말해둘게. 로리타, 미안해. 너는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나는 네 생명을 구해줄 수 없어. 그냥 죽는 시간을 세 시간 정도 뒤로 미루었을 뿐이야.”

“…….”

“하지만 적어도 너의 복수는 약간이나마 해줄 수 있어. 내가 너를 납치한 것 때문에 이제 궁내부(宮內部) 사람들은 물론이고 궁정귀족들까지 전부 이번 사건을 듣게 되었거든. 내명부나 근위대가 너를 처벌하면, 모든 사람이 네가 부당하게 희생당했다는 걸 알 거야.”

내명부와 근위대의 명성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약간이지만 복수이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라고, 눈앞의 황녀가 꾸밈없이 말했다.

“자아. 그러니까 우리에겐 친해질 시간이 별로 없어. 나는 내가 궁금한 것부터 들어야겠어. 어떻게 이곳을, 오고 싶어도 평범한 사람은 결코 도착하지 못하고, 나가고 싶어도 결코 탈출할 수 없는 이곳에 와버렸어?”

“황녀 전하.”

내가 길게 읍했다.

“전하께선 틀림없이 소인의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응?”

요한나 전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잠깐만. 지금 나한테 아부해도 정말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시간낭비야.”

“소인에게 방도가 있다면 어떻습니까?”

“헤에.”

황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 기꺼이 흥미를 가져줄게. 하지만 로리타, 조심하는 게 좋아.”

여태까지 악동의 눈동자였다면 지금은……상대방을 시험하는 시선. 악의 없는 호기심이 사라지고 태어날 때부터 군림하는 자의 눈높이가 자리했다.

“만약 네가 그럴듯한 방도를 제시해주지 못하면 나는 너에게 가졌던 흥미까지 잃어버릴 테니까. 그건 너에게 보장되어 있던 두 시간마저 빼앗기는 것을 의미해. 너는 다시 그 지옥 같은 고문실로 돌아갈 거야.”

내가 머리를 조아렸다. 각오하는 바였다.

“소인이 고문받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시녀장과 근위부장이 고문실에 다녀갔습니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으나 간수장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알았지요.”

“흐응? 그게 뭐 어때서? 시녀장이나 근위부장이나 자존심이 걸린 문제야. 당연히 신경이 쓰이겠지.”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찾아왔다 해도 말입니까?”

요한나 전하의 얼굴에서 악의적인 표정이 사라졌다.

“……한 시간마다 한 번씩? 그건 너무 비정상적인걸.”

“예. 지나치게 초조해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젯밤에 연못에 침입자가 떨어졌다면서. 아직 반나절밖에 흐르지 않았다구. 근위대장과 시녀장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노심초사하는 이유가 뭐겠어?”

내가 판단하기에는 이러했다.

루돌프 태자는 내명부를 장악했다. 반면에 엘리자베트 제3황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무재(武材)를 보임으로써 근위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이 차기 황위를 두고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리라는 것은 정계에서 이미 자명한 사실이었다.

“즉, 이번 정쟁은 황위계승전의 전초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을 재촉하는 상급자가 있다……그런 말이구나. 그 상급자란 다름 아니라 루돌프랑 엘리자베트이고.”

요한나 전하가 침음을 삼켰다.

“루돌프랑 엘리자베트는 승부수에 나선 거야.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궁내(宮內)의 주인도 정해지겠어. 끄응, 이거 호기심 풀겠다 나섰다가 터무니없는 뱀의 꼬리를 밟아버렸는걸.”

“그것이 뱀의 꼬리가 아니라 머리라면 어떻겠습니까, 전하?”

“하아?”

요한나 전하가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당신께서는 나의 목숨을 구해주셨다. 친오빠들에게 강간당해서 자살하는 그런 미래를 막겠다. 설령, 그 결과 제국의 황태자와 미래의 절대군주를 적으로 돌려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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