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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90화 (190/510)
  • 00190 IF 루트: 프린세스 디펜스  =========================================================================

    그날 궁전은 요상하게 소란스러웠다.

    하인들이 평소보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가 하면, 하녀들은 틈만 나면 서로 모여서 속닥거렸다.

    궁전 전체가 긴장감으로 들썩거렸다. 이 복도에서도 속닥속닥. 저 복도에서도 소곤소곤. 언제나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것을 자랑으로 삼는 이곳 합스부르크 황궁이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세바스찬.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 요한나 전하…….”

    초로의 남성이 아차 했다. 남자는 수십 년 동안 황궁에서 일해왔으므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런 일류 시종조차도 눈앞의 꼬마 황녀님에 대해서는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앗, 그 표정을 보니까 정말로 뭐가 있었구나!”

    은색의 롤빵머리가 아리따운 여자애가 껑충 뛰었다.

    “틀림없어! 백이면 백, 천이면 천이야!”

    “무슨 섭섭한 말씀을. 소인이 어떤 표정을 지었길래 틀림없다는 것인지요?”

    “헤헹. 시치미떼봤자 이미 물잔은 엎어졌어, 세바스찬.”

    여자애가 검지손가락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세바스찬이 아무리 여기 궁전에서 삼십칠 년씩이나 근무해온 시종 중의 시종이라 할지라도 작은 버릇이 하나 있거든. 세바스찬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허리를 아주 약간 앞으로 굽혀.”

    “헉, 정말입니까?”

    남자가 대경실색했다. 큰일이지 않은가!

    궁전의 베테랑 시종은 공식적인 업무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인 업무, 즉 황제나 황자의 밀명을 받아서 움직이는 경우가 꽤나 잦았다. 자기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눈앞의 어린 황녀님이 지적한 대로 그런 버릇이 있다면……자기도 모르는 사이 몇 명의 귀족들한테 정보를 들켜버렸을지 몰랐다!

    “당연히 구라지. 바보 멍청이 세바스찬. 그걸 믿었어?”

    “…….”

    “아무렴 지엄한 황궁 내무부에서 그런 치명적인 습관이 있는 남자를 일급 시종으로 승진시켰을 리가 없잖아. 변변찮은 남작가에서 사남(四男), 거기에 서출이라서 제대로 된 연줄 하나 없는 세바스찬을 말이야.”

    여자애가 헤벌레 웃었다.

    “달리 말해 세바스찬은 그만큼 자기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성장했다는 거야. 뇌물이랑 연줄이 판치는 여기 황궁에서 세바스찬만큼 자수성가한 남자가 또 없어요. 대단해, 진짜로 대단해.”

    “가, 감사합니다……황녀 전하.”

    “그렇지? 감사하지?”

    남자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예.”

    “감사해서 막막 전하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것 같지? 그치?”

    “예, 예이……물론입니다. 소인은 언제나 황가를 위해 투신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여자애가 감탄했다.

    “캬아. 우리 세바스찬의 충심은 내가 진즉에 알아봤어. 그러니까 합스부르크 내무부의 자랑이요 양심인 세바스찬. 남작가의 사남에다 서자였으면서도 독보적인 성실함과 재기발랄함으로 취업에 성공한 세바스찬 나으리.”

    여자애는 자기보다 키가 두 배 커다란 남자를 붙잡더니 웬 아저씨마냥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얼른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해봐. 집사장한테 오늘 세바스찬이 황녀 전하 앞에서 얼마나 꼴불견이었는지 꼰질르지는 않을 테니까. 흐흐.”

    “…….”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

    서부의 프랑크 제국, 동부의 아나톨리아 제국과 더불어 인간계를 호령하는 절대강국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2황녀이자 황궁에서 근무하는 수백 명의 하인과 하녀에게 '공포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열네 살의 아가씨였다.

    결국 베테랑 시종인 세바스찬이 항복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와아! 해냈다! 세바스찬을 물리쳤다――!”

    요한나 황녀가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세바스찬이 쓰게 웃었다. 요한나 황녀 전하는 분명히 막무가내에다 말괄량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워할 수 없는 귀여움이 넘쳐났다. 상대방을 저절로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매력이라고 할까.

    하인들과 하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요한나 황녀에게 시달리면서도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까닭도 그것이겠지. 이런 면에서 요한나 황녀는 그녀의 여동생, 즉 엘리자베트 제3황녀와 무척 달랐다. 엘리자베트 전하는 천재로 이름났지만 어쩐지 다가가기 어려웠다…….

    “혹여라도 다른 누구한테 말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전하?”

    “응, 좋아. 세바스찬의 양심과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

    “……어째서 전하의 양심과 명예가 아니라 소인의 양심과 명예인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쯔쯧. 사내대장부가 시시한 일에 신경 쓰지 마.”

    세바스찬이 한숨을 푸욱 쉬었다.

    “어젯밤, 황궁에 침입한 남자가 발견되었습니다.”

    “뭐, 여기에!?”

    황녀가 깜짝 놀라서 개구리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예상한 그대로 소란스러운 반응이어서 세바스찬은 웃음이 나왔다.

    “흠. 흠. 그렇습니다. 어제 새벽에 황궁 서쪽의 연못에서 무언가가 빠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하녀가 소리를 들었지요. 그녀가 대경실색해서 경비병들을 불러들여 연못에 가봤더니, 웬 젊은 남자 한 명이 연못에 빠져 있더라지 뭡니까.”

    “대, 대박……겨우 혼자서 황궁의 방벽을 뚫은 거야? 수천 개의 경비마법과 수백 명의 근위병을 피해서?”

    세바스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난리가 난 것입니다. 혹시 황궁이 자랑하는 절대방벽에 구멍이 뚫린 것 아닌가 하고요. 더군다나, 이건 아직 하녀들 사이에 퍼지지 않은 비밀입니다만…….”

    그는 황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놀랍게도 연못에 떨어진 남자는 검의 주인도, 마법사도, 하물며 암살자도 아니라고 합니다. 마나 적성이 완전히 꽝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무력이나 마력을 하나도 쓰지 않은 채 합스부르크 황궁의 절대방벽을 넘어온 것입니다!”

    요한나 황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긴 무서워할 만도 하지, 라고 세바스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공포의 지배자'일지라도 그 본질은 온실에서 키워진 열네 살 소녀였다. 무력도 마력도 평범한 인간이 하마터면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을지도 몰랐다는 사실은 제법 큰 충격으로 느껴졌으리라.

    그렇지만 세바스찬의 추측은 순전히 지레짐작에 불과했다.

    “대단해――!”

    황녀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목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궁전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복도 끝을 지나가던 하녀가 깜짝 놀라서 이쪽을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건 말건, 소녀는 마치 황궁의 예법을 전부 까먹은 것처럼 오도방정을 떨었다. 세바스찬이 당황해서 소녀를 말렸다.

    “저, 전하?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대체 왜…….”

    “대단해! 오러도 쓰지 못하고 마법도 외지 못하는, 진짜로 평범한 남자가 여기 코앞까지 넘어오다니 대단해! 옛날 이야기 같아서 대단해! 영웅이 될 뻔해서 대단해! 정말로 대단해!”

    “전하, 목소리……제발 목소리를.”

    요한나 황녀가 흥분에 찬 함성을 뚝 그쳤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그때, 정체모를 오한이 세바스찬의 등줄기를 짧게 스쳐갔다. 언제 어린애처럼 굴었냐는 듯 눈앞의 소녀는 매섭게 시종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왕의 피. 태어났을 때부터 인간들을 부리고 다스린 자만이 가지는 위엄이 그곳에 있었다.

    세바스찬은 아까 전과 다른 의미로 이마에 땀이 맺혔다. 혹시――자신이 너무 주제넘게 충고한 것이었는가? 눈앞의 여자애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 그런 자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는가?

    맹수와 같은 시선에 세바스찬의 심장이 조일 즈음해서 황녀가 입술을 열었다.

    “어디인지 불어, 세바스찬.”

    “……예?”

    “연못의 영웅 말이야. 어디 감옥에 처박았을 거잖아. 거기가 어디인지 얌전히 불어.”

    세바스찬의 입구멍이 경악으로 인해 떠억 벌어졌다.

    “서, 설마 황녀 전하. 침입자를 만나뵈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설마가 아니라 당연히 그럴 속셈이야. 세상에 이렇게 재미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내가 모른 척하고 넘겨버리는 게 말이나 돼? 반드시 만나야겠어.”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전하!”

    세바스찬이 주저하지 않고 궁전의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 침입자는 궁성의 폭탄과 같은 사안이옵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는 나의 폭탄이 되어버렸지.”

    황녀가 기세에서 지지 않고 말했다.

    “그 남자를 보지 못하면 내가 먼저 폭발해버릴 거야. 세바스찬, 내가 폭발하는 그날이 바로 합스부르크가 멸망하는 날인 줄 알아.”

    “전하. 황제 폐하께서도 이번 사건에 분노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중대한 일에 혹여 황녀 전하가 단지 호기심만으로 다가가신다면, 이는 작게는 궁정인들의 신뢰를 잃어버릴 것이요, 크게는 황제 폐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요한나 황녀가 침묵했다. 그녀는 한동안 조용히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끝을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성실하고 충심이 갸륵한 나의 세바스찬. 미안하지만, 이건 오히려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내가 나서야 하는 문제야.”

    “……네?”

    “흐흥. 하나는 생각하는 주제에 둘은 생각 못하는구나.”

    황녀가 코로 웃었다.

    “잘 봐, 세바스찬이 그랬잖아. 연못의 영웅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하녀였다고. 하녀는 곧바로 경비병들을 불렀고.”

    “그렇습니다. 헌데, 무엇이 문제이옵니까?”

    “더 들어봐. 지금 누군가가 황궁에 침입했어. 그것도 엄청나게 무능력한 평민이야……도대체 누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

    요한나 황녀가 왼쪽 손가락들을 펼치더니 하나씩 접었다.

    “제도(帝都)의 치안경비대? 집단범이 아니라 단독범이 저지른 소행이니까, 경비대가 제대로 일하지 않아 치안이 나빠진 탓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탈락. 황궁에 삼천육백팔십 개의 경비마법을 아로새긴 마탑(魔塔)? 그럼 존귀한 마법사들이 한낱 무능력한 평민보다 못하다고 발표해야 하는데, 그런 귀찮은 분쟁을 일으킬 순 없지. 탈락.”

    어머나, 하고 열네 살의 황녀가 연극조로 말했다.

    “외부에 문제가 없으니 그러면 어디에 문제가 있겠어?”

    아, 하고 세바스찬이 탄성을 질렀다.

    “내부……내부의 동조자가 있다고 몰고 가겠군요, 전하!”

    “바로 그거야. 바보 멍청이 세바스찬.”

    요한나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내명부와 황궁 근위대 사이에 피 튀기는 신경전이 벌어지는 거야. 하필 처음에 목격한 하녀가 자기 상관에 보고하지 않고 경비병부터 찾은 바람에 문제가 꼬였어. 내명부의 하녀들이 알아서 처리했다면, 순조롭게 경비병들한테 책임을 떠넘길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연못의 남자를 감금하는 데 있어 내명부와 근위대가 절반씩 공로를 차지했습니다……즉, 어느 누구도 한쪽에 책임을 전가할 수 없게 되었군요!”

    “흐흐. 잘못하다가는 시녀장이나 근위대장의 목이 날아가버릴 판이지.”

    세바스찬은 이제서야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황제는 틀림없이 분노하고 있었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지도 몰랐다…….

    “장담하는데 지금쯤 연못의 영웅은 초죽음을 당했을걸. 내명부랑 근위대가 번갈아서 밤새도록 고문을 때렸을 거야. 누가 내부의 동조자였는지 얼른 토해내라면서. 쯧쯧……에르시 근위부대장이 어쩐지 오늘 아침훈련에 보이지 않더니만. 뭐, 이럴 때 내가 나서줘야지 또 누가 나서주겠누.”

    요한나 황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전하?”

    “응, 궁금해?”

    “예이.”

    황녀가 씨익 웃었다.

    “궁금하면 잠자코 내 영웅님이 어디 계신지나 불어. 공포의 지배자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주실 테니까.”

    “하아, 근속 삼십칠 년 만에 이런 난리에 휘말릴 줄은…….”

    성실한 시종은 울상을 지었다.

    황녀가 개의치 않고 시종의 등을 떠밀었다. 세바스찬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참. 우리 영웅님 이름은 어떻게 되신대?”

    “이제는 내 영웅님이 아니라 우리 영웅님입니까……알겠습니다. 음, 그것이 상당히 특이한 이름이더군요. 어느 나라의 이름인지 저로서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응? 무슨 이름이길래?”

    세바스찬이 머릿속으로 지하 감옥의 지도를 떠올리면서 대답했다.

    “로리타라고 하더군요. 황녀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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