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87화 (187/510)
  • 00187 순례의 길  =========================================================================

    *  *  *

    어느 나라가 단 한번도 타국과 원한을 쌓은 적이 없겠는가?

    어느 나라가 단 한번이라도 타국의 제왕을, 귀족을, 더 나아가 국민 자체를 증오해본 적이 없겠는가. 여러 국가가 비집어 살아가는 대륙에서 은원(恩怨)이란 새삼스럽지 않았다.

    프랑크 제국과 브르타뉴 왕국, 두 국가는 단순히 한번의 원한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아예 원과 한을 대대로 쌓아올려 앙숙이 되어버렸다. 프랑크 제국이 다른 국가들과 싸울 때면 어김없이 그 배후에 브르타뉴 왕국이 전쟁을 획책하고 있었다. 프랑크는 브르타뉴를 증오했다.

    그렇기에.

    “이거 보시게, 자클린 성녀. 황제가 나에게 연애편지를 보내왔어.”

    브르타뉴의 여왕 앙리에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말에 올라탄 채로 편지를 읽더니 한바탕 파안대소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여왕인 그녀는 자기 감정을 매우 솔직하게 표현했고, 주변 신하들은 이런 앙리에타를 매력적이라 여겼다.

    “호오. 그거 흥미롭습니다.”

    자클린 롱그위, 아테네 여신의 성녀가 편지를 넘겨받았다.

    “어디, 황제 폐하의 연서를 소신이 일독해볼까요…….”

    성녀는 멋들어지게 꼬불꼬불 늘어트린 옆머리를 오른손으로 매만지면서 편지를 큰소리로 읽었다. 즉, 자클린 성녀는 자그마치 제국의 황제가 보내온 서신을 무례하게도 '왼손'으로 잡고 있었다. 주위에는 열두 명의 대귀족이 기마에 올라타 있었지만 아무도 성녀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여왕이여! 최근에 발칙한 난동자들이 본인의 제국과 여왕의 왕국에 질나쁜 소란을 벌이고 있을 때……이런. 발칙한 난동자들이라는군요. 후후, 누가 많이 섭섭해하겠습니다.”

    “하하하!”

    사람들이 껄껄 웃었다. 프랑크의 황제에게 발칙한 난동자란 다름 아니라 자기 어머니였다. 이 편지가 외교적이고 공식적인 문서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황제는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자클린 성녀가 목청을 가다듬고 재차 서신을 읽었다.

    “……질나쁜 소란을 벌이고 있을 때, 여왕은 본인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그때 여왕은 단호하게 본인의 편을 들어주었다. 비록 난동자들이 갖가지 입에 발린 명분을 떠들어대고 있으나, 결국 난동자들은 본인의 신하들과 황권을 좀먹고 있을 뿐더러, 본인의 재산을 강탈하고 이용하여 자기네의 재산으로 써먹고 있다고.”

    황제의 어투는 그가 소위 공화주의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드러냈다. 요컨대 공화주의자는 황권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제국의 재산을 갉아먹는 좀도둑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난동꾼들이 본색을 드러내어 제국을 차지하려 드니, 실로 고슴도치가 뱀의 굴을 강탈하는 꼴이요, 강도가 집주인 행세를 하는 격이라. 본인은 참담한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역적과 간신뿐이라, 암흑과 같은 심장에 암흑을 끼얹고 있다.”

    “흐응, 황제 폐하께선 별로 좋은 문필가가 되지는 못하겠어.”

    앙리에타 여왕이 피식 웃었다. 자클린 성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여인은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로 지내왔고, 신분과 직책을 내버려두고 때때로 남자들과 기분 좋은 한때를 보내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받은 연애편지를 헤아리면 사백 통이 훌쩍 뛰어넘으리라.

    “……그리하여 하늘 아래 오로지 본인과 여왕 둘 만이 친구로 남게 되었다. 지난 역사에서 비록 여신들께서 제국과 왕국을 대립하게 만드셨다 하나, 이제 본인과 여왕이 서로의 화합을 위해 동분서주하면 어찌 하늘이라고 무시하겠는가. 본인은 친구의 손길을 간절하게 바라노라…….”

    자클린 성녀가 서신을 갈무리했다.

    앙리에타 여왕은 편지를 도로 받아챙겼다. 그녀가 말머리를 뒤로 돌렸다. 여왕의 주변에는 열두 명의 대귀족이 가벼운 갑옷 차림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이것이 첫 번째 성벽으로 말하자면 내성(內城)이었다.

    주변에는 다시금 대귀족의 기사들이 둘러쌌다. 기사들은 높다란 창을 꼬나쥐었는데, 창대에 각각의 가문을 나타내는 깃발이 호기롭게 펄럭였다. 이것이 여왕의 두 번째 성벽이었다.

    다시 그 주변의 주변, 널따란 평원에는――물경 일만 명의 병사가 도열하고 있었다. 그들은 장교의 명령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줄을 섰다. 이것이 여왕의 세 번째 성벽으로, 어떠한 외적도 처참하게 분쇄시킬 외성(外城)이었다.

    “브르타뉴의 아들딸이여!”

    여왕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세 개의 성벽을 내려다보았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가 여왕의 목소리를 확장시켰다. 앙리에타의 패기 넘치는 목소리가 평원에 쩌렁쩌렁 울렸다.

    “오늘 우리는 제국을 넘는다. 침략자로서 넘는 것도 아니고, 약탈자로서 넘는 것도 아니며, 하물며 반역자로서 넘는 것도 아니다. 여기 프랑크의 우두머리가 우리의 진격을 인정하는 서신이 있노라!”

    붉은 머리카락의 여왕이 손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그대들이 거리낄 것은 하늘 아래 어디에도 없노라. 때때로 망설임이 그대의 우악스러운 손을 풀어재끼리라. 의혹이 그대의 강력한 함성을 풀죽이리라. 그럼에도 브르타뉴의 아들딸이여! 나 앙리에타가 바로 그대들이 정의임을 보증하노라! 망설임 없이 적을 토벌하라. 의혹 없이 장교의 명령에 복종하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단결뿐이리니! 브르타뉴여――단결하라!”

    병사들이 환호성으로 그들의 아름답고 강력한 여왕에게 호응했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왕좌에 오르기 위해서 수많은 귀족과 타협해야만 했다. 그러나 기어코 그녀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귀족에게는 칼날을 내리쳤다.

    일만의 병사 중에 상당수는 여왕이 적도를 얼마나 무참하게 짓밟는지 두 눈으로 목격했다. 앙리에타를 전쟁의 여신이 지상에 현현한 자라고 믿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불타는 적발의 여왕을 경애했다.

    “단결하라! 단결하라!”

    “브르타뉴 만세!”

    “여왕 전하 만세――!”

    더 이상의 말은 필요없었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가 말머리를 정면으로 향했다.

    타박, 하고 앙리에타의 군마가 앞발을 움직였다. 여왕은 브르타뉴 왕국과 프랑크 제국의 경계선을 넘은 것이었다. 대지에 국경선은 그어져 있지 않았으나, 분명 지금 이 순간에 여왕은 제국의 땅을 밟았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곧이어 열두 대귀족이, 기사들이, 다음으로 수천 명이 국경을 넘었다. 성녀인 자클린 롱그위가 노래를 불렀다.

    “아아――.”

    성녀의 입술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성스럽고 우아하며, 그러면서도 강직했다. 마치 여전사의 자태와 같았다.

    아테네 여신에게 올리는 찬양가는 곧 군가였다. 마법의 힘을 빌려 노랫소리는 모든 병졸들의 머리 위에 울려퍼졌다. 여신이 그들을 축복하고 있었다…….

    브르타뉴 왕국군 구천 명.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의 영도 아래, 진군.

    *  *  *

    한바탕 레라지에와 신경전을 벌이고 돌아와서 나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생각보다 지쳐버린 모양이었다.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마차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다들 배려해준 것일까…….

    약간 멋쩍어서 슬그머니 마차에서 기어나왔더니, 그새 새로운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브르타뉴 왕국군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자크리가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약 일만 명의 브르타뉴군이 진격을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휘하에는 성녀까지 합류했더군요. 자클린 롱그위, 아테네 여신의 성녀입니다.”

    “이런 정치적 진흙탕에 끼어들다니 평범한 성녀 아가씨는 아니로군…….”

    롱그위 성녀는 <던전 어택>에서 적편으로 등장했다. 용사가 몸을 담근 합스부르크 제국에 브르타뉴 왕국이 맞서싸웠으니 당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라우라의 병력을 상대하느라 귀찮은데, 거기에 롱그위 성녀가 쉴 새 없이 버프를 쏟아부어 무진장 성가셨다.

    피똥 싸면서 겨우겨우 적 유닛을 거의 죽여놨더니 회복 마법을 걸어서 멀쩡하게 되돌려놓았지……어느 RPG에서나 성직자 유닛은 찢어죽일 사냥감 제1호였다. 여기서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아니, 더더욱 귀찮을 것이 틀림없었다.

    “후우.”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씻었다. 이러니 잠기운이 좀 달아났다.

    “성녀가 대동했다는 것은 브르타뉴에게 명분이 있음을 만천하에 떠벌리는 꼴인데.”

    “정보에 따르면 프랑크 황제가 직접 서한을 보냈다고 하는군요.”

    “멍청한 녀석, 황제나 되어서 스스로 외적을 불러들이다니.”

    그저 간단히 공화파를 인정해주면 될 일이었다. 황제의 자존심이 대국을 망쳤다.

    내가 비웃으며 가죽주머니에 담긴 식초물을 한 모금 마셨다.

    “설령 브르타뉴의 힘을 빌려 공화파를 압도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외세에 기대어서 성립된 황권이다. 아무도 진심으로 존중하지 않을 거야. 황제는 제 목을 자기가 졸라버렸어…….”

    심지어 공화파를 감싸주는 인물은 황태후, 자신의 어머니. 나라를 망하게 하는 김에 패륜까지 저지르는 셈이다. 역시 황제씩이나 되니까 1+1도 스케일이 다르다고 할까. 어찌되었든 황제의 이름은 역사서에 길이길이 암군(暗君)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예정대로 프랑크 북부를 순례한다.”

    “예.”

    아마도 앙리에타 여왕은 전쟁이 장기화되기를 기대하진 않을 거다.

    이득을 챙겨먹은 다음에 슬쩍 빠지기를 원하겠지. 왕당파가 승리하고 공화파가 몰락한다. 그 공로로 프랑크 제국의 변방을 약간 나눠먹는다든지, 기껏해야 그 정도가 앙리에타 여왕의 노림수이리라.

    하지만,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와도 나갈 때는 그럴 수 없다……나는 프랑크를 진창으로 만들어버릴 속셈이다. 어디 마음껏 사이 좋게 진흙탕을 뒹굴어보자,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그리고 전하, 보통이 아닙니다.”

    “누가 말인가?”

    “전하께서 제게 맡기신 남자애 말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루크의 일도 있었나.

    아직 레라지에의 일에 정신머리가 팔려 있었다. 잠기운이 덜 달아난 것이겠지. 고개를 흔들어서 남은 잠을 내쫓았다. 별다른 효과는 없겠지만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브르타뉴의 문제도, 내전의 문제도, 용사의 문제도,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나가야 했다.

    “루크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제 수하들이 맡아서 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흐음.”

    내가 뺨을 쓰다듬었다.

    “자크리. 열한 살 남자애라면 한창 성욕이 왕성할 때이지?”

    “예?”

    자크리가 눈을 깜짝거렸다.

    “……이를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참나무도 여체로 보일 나이죠.”

    “좋아. 제레미를 불러주게.”

    자크리가 떠나고 잠시 뒤, 제레미가 내 마차에 다가왔다. 그녀 옆에는 데이지가 따라붙어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은 이후로 데이지는 제레미의 시종이 되었다. 데이지는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 얼굴이 유지될지 궁금했다.

    제레미가 말했다.

    “전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래. 어제 말한 이야기를 진행시키자고.”

    “어머나. 성급도 하셔라.”

    그녀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다소곳한 웃음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사악한 기운이 풍기는 것은 내 기분 탓이 아니리라.

    “그럼 소인은 이만 자리를 떠나야겠네요. 바로 오늘 실행하면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자크리에게는 나의 명령이라 해놓고 네 마음대로 해라.”

    “후후, 전하 덕분에 오랜만에 몸보신 좀 하겠네요.”

    제레미는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스승을 따라서 데이지가 몸을 돌리려고 하자, 제레미가 손을 저었다.

    “아, 당신은 따라오지 않아도 좋아요. 오늘 하루 전하를 따라다니세요. 당신이 필요하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데이지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명령이라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가 사뿐하게 자리를 떠나자, 결국 데이지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데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머릿결을 음미하듯이. 데이지는 더더욱 무표정해졌는데, 아마 약간이라도 반응하면 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정말 맹랑한 꼬맹이가 아니고 뭔가.

    “네 년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했지?”

    “…….”

    “기다려봐라. 제법 재미난 일이 벌어질 테니.”

    내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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