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86화 (186/510)

00186 순례의 길  =========================================================================

비텐마이어는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

그에게 일찍이란 요컨대 정시에 퇴근한다는 소리였다. 이 젊은이는 너무나 성실하였는데, 오로지 성실하다는 이유만으로 정부 각처에 소문이 쫙 퍼질 정도였다.

“불면(不眠)의 총감.”

사람들이 경외하며 그렇게 불렀다.

말 그대로 비텐마이어는 잠을 자지 않았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여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늦게 퇴근했다. 심지어 당직을 선 관리들조차 그가 퇴근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선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막료총감부의 비텐마이어는 잠들지 않는다, 그는 미네르바의 부엉이, 엘리자베트 통령의 충실한 파수견으로 모든 것을 지켜본다……마치 유령에 관한 소문처럼 정부에 떠도는 이야기였다.

그런 비텐마이어가 정시에 재깍 퇴근했다.

막료총감부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우리가 무언가를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

“게을러빠진 우리 관료들을 말없이 질책하시는 거야……!”

“전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도록. 오늘 우리는 모두 야근한다.”

관리들이 비장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정시에 맞추어 퇴근한 것만으로 관리 전원을 야근하게 만들었다.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정부에서 새로운 전설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정작 비텐마이어 본인은,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는지 전혀 모른 채 술집으로 향했다…….

“여어, 막료총감 남작 나리! 여기입니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미 일단의 무리가 술집 한 구석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 면면을 확인하고 비텐마이어는 한숨을 쉬면서 걸어갔다.

“슐라이어마허 장군, 몇 번이나 말했습니까? 저는 더 이상 남작이 아닙니다. 귀족의 칭호를 버린 지 오래입니다.”

“아차. 그랬지, 그랬어. 제가 그만 까먹었습니다. 하하.”

“앞으로 부디 조심해주시길.”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넉살좋게 웃었다.

그것을 보면서 비텐마이어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 쿠르츠라는 남자, 유능하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어째서인지 친해질 수가 없었다. 단순히 성격이 맞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조금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 자신과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느낌에 불과하다면 좋으련만……하고 비텐마이어가 탁자에 앉았다. 곧이어 술잔으로 건배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다섯 명이 모인 건 건국식 이후로 처음 아닌가?”

“음. 아마 그럴걸요. 제 기억력은 별로 신뢰할 만한 물건이 아니지만.”

“맞습니다. 제 기억력은 신뢰하셔도 좋아요, 외무상서 님.”

“하델베르크라고 불러주게. 미인에게 이름으로 불리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 없거든.”

탁자에는 쿠르츠, 볼프람, 샤를, 유리아가 있었다.

비텐마이어를 포함해서 다섯 명. 모두가 엘리자베트 황녀의 측근 중 측근이었다. 이들이 한자리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알면 두려움과 공포로 떨어댈 인간이 적어도 수백 명 되었다. 지금도 술집에는 이들 다섯 명과 술집주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통령근위대 사령관. 볼프람 하델베르크 외무상서. 샤를 리히트호펜 친위기사단장. 유리아 통령 제1비서. 여기에 마지막으로, 막시밀리안 비텐마이어 막료총감…….

공화정부의 실세가 전부 모였다. 당장 쿠데타를 모의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이곳에서 누구 한 명을 죽이자고 얘기하면 바로 다음날 그 자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시궁창에서 발견되리라.

“벌써 한 달이 흘렀습니까. 별로 믿기지가 않는군요.”

유리아가 포도주를 들이키며 말했다. 미인인 그녀는 목소리에도 어떤 마력이 담긴 것 같아, 조곤조곤 얘기하는데도 사람들의 귀를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었다.

“아아. 한 달이라고 표현하기엔 지나치게 빨랐지. 솔직히, 아직도 정리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그렇습니까? 하델베르크 씨, 저희 기사단은 딱히 바쁘다는 느낌이 없는데요.”

“요즘만큼 군인이 부러운 적이 없었다네, 샤를 기사단장. 나에게 팬 대신 검이 쥐어질 수만 있다면 당장 마왕군과 동맹이라도 맺어오겠네.”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 나라와 관계를 맺는 것만도 어려운데 나는 지금 열한 개 국가의 모든 외교관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 다들 어떻게 하면 지원금을 적게 줄까, 어느 정도로 원조해야 딱 우리 공화국의 목숨만 살려줄까 고민하고 있지! 빌어먹을 놈들이라네. 차라리 마인들과 협상하는 쪽이 마음에 편할 거야.”

그가 익살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들이 작게 웃었다.

“군인이라고 해서 다 샤를 기사단장 같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십쇼.”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기는 죽을 상입니다. 귀족들이 죽어나가니까 장교 숫자가 급감했습니다. 어떻게든 유능한 인재를 발굴해서 장교 자리를 떠넘기고 있지만 말입니다, 솔직히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라고 고백해야겠군요. 군은 아슬아슬하게 외형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호오. 그래도 자원입대자가 크게 늘었다고 들었네만?”

슐라이어마허가 한숨을 쉬었다.

“물론 크게 늘었지요. 당장 소집령을 때리면 십만 대군도 그럭저럭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빛살 좋은 개살구입니다.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오합지졸로 뭘 하겠습니까?”

“훈련을 시키면 되지 않는가.”

“바로 그 훈련을 시킬 장교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에구구.”

얘기를 들으면서 비텐마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슐라이어마허는 통령근위대 사령관이었고, 비텐마이어 본인은 막료총감이었다. 둘 다 군인이었다. 샤를 리히트호펜도 군인이긴 똑같았지만 친위기사단은 특수한 면모가 강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에게 공감이 더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군대의 사정을 전해들은 하델베르크가 인상을 썼다.

“역시 아우스테를리츠의 패배가 결정적이었나…….”

“황태자파에도 유능한 장군과 장교가 많았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비텐마이어?”

비텐마이어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원래 황태자파였다. 슐라이어마허는 그걸 암시한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콜로브라트 장군, 쿠투조프 장군, 키어마이어 장군, 랑제론 장군……모두 지극히 유능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실례지만, 황태자가 무모하게 지휘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리 허무하게 돌아가시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죽었고, 막료총감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비텐마이어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일부러 놀리는군. 좋지 않은 습관이야.’

바로 이런 점에서 자신은 슐라이어마허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고 비텐마이어가 생각했다. 슐라이어마허는 틈만 나면 다른 사람을 놀리려고 들었다. 이래서 솔직하게 공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딱히 제가 그분들보다 유능해서 살아남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신께서 저를 총애해주셨을 뿐이지요.”

“즉, 운명이라는 말씀입니까…….”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피식 웃었다.

“여러분, 마왕 단탈리안에 대해서 제가 재미난 정보를 갖고 왔습니다.”

“단탈리안? 브루노 평원에서 연설을 했다는 그 자 말인가?”

하델베르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문관이라서 월맹군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아무래도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가 다르게 전해졌다.

하델베르크뿐만이 아니었다. 문관 전체에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들에겐 한 전투에서 멋들어지게 연설한 서열 제71위의 마왕보다 당장 합스부르크 제국의 섭정에 오른 바르바토스가 훨씬 더 중요했다.

군인들은 정반대였다.

바르바토스는 가공할 만했지만 대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쟁에서 엘리자베트 통령, 당시 제3황녀는 몇 번이고 바르바토스의 군대와 부딪쳤다. 그때마다 황녀는 승리를 거두었다. 반면에 단탈리안은……유일하게 황녀한테 패배를 안겼다.

“새로운 정보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슐라이어마허 장군?”

비텐마이어의 눈빛이 빛났다. 언제나 피곤에 가득 잠긴 것처럼 보이는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음, 검은 산맥의 전투에 대한 정보입니다.”

슐라이어마허가 미소를 지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알다시피 검은 산맥의 방어선은 사흘 만에 뚫렸습니다. 그때 누가 마왕군의 선봉을 맡았는지 아십니까?”

“보고서에 따르면 서열 제16위의 마왕 제파르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습니다, 비텐마이어 상서. 그렇지만 작전을 입안한 마왕이 따로 있었다, 라면 어떻습니까?”

비텐마이어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예, 단탈리안입니다. 그 자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검은 산맥의 산성들을 통과한 장본인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말했다. 어딘지 즐겁다는 목소리였다.

“바로 어제서야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에 대한 정찰이 끝났는데, 이거 보고서가 재미난 내용을 담고 있더군요. 아직 통령 각하께도 올라가지 않은 내용입니다. 브란덴부르크 영지에선 의외로 백성들이 평화롭게 잘 살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럴 리가 있나!”

하델베르크가 놀라서 물었다.

“브란덴부르크령이면 전쟁 초기에 점령당한 지역이 아닌가. 어떻게 마왕군에 의한 피해가 적겠나?”

“그게 재밌습니다만, 아예 법률을 제정해서 영지민에 대한 약탈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약탈을 금지해?”

이번에는 유리아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왕군이 인간을 약탈하지 않았다고? 왜?”

“일반 백성과 귀족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하려는 수법이죠. 떠올려보십시오.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전쟁 초기, 단 한번도 싸우지 않고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어째서 그랬습니까?”

“……징집병의 대량 탈영.”

하고 비텐마이어가 대답했다.

“수만 명의 징집병이 탈영했다고 들었습니다.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겨우 일만 남짓한 병력만 추슬러서 간신히 퇴각했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바로 거기에 단탈리안이 개입해 있었습니다.”

슐라이어마허가 미소를 지었다.

“약탈을 금지하고, 흑색 허브를 자그마치 무상으로 분배했다고 하더군요. 괴수들의 부락까지 손수 토벌했다는데……민심이 변경백에서 마왕군으로 떠나버릴 수밖에 없었더군요. 하하. 결국 아우스테를리츠까지 후퇴한 것도 단탈리안의 노림수였습니다.”

사람들이 침묵했다. 오직 샤를 기사단장만이 태연자약한 얼굴로 맥주를 퍼마시고 있었다. 유리아가 팔꿈치로 그를 쳐서 주의를 주었다.

“음? 뭐요? 술이 떨어졌어?”

샤를이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유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분위기가 어두운 것을 알아차렸는지 샤를도 조심스럽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마치 다람쥐가 도토리를 내려놓는 얼굴이었다.

비텐마이어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브루노 평원의 연설은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것은 일반 병사와 귀족 장교 사이를 분열시키는 계책이었지요. 만약 단탈리안이 처음부터 이걸 의도했다면, 변경백령에서 백성들에게 관용을 배푼 것도 전부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슐라이어마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텐마이어는 침을 삼켰다.

“그렇다면……검은 산맥이 돌파된 것에서 변경백령의 무혈입성,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브루노 전투, 섭정 사건까지……전부 한 명의 마왕이 계획했다는 소리가 됩니다. 더군다나 그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졌고요. 사실상 혼자서 대륙을 조종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술집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제국을 패배시킨 것은 운명 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어느 마왕의 소행이라고 밝혀진 것이었다.

하델베르크가 침음을 삼키면서 말했다.

“자네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통령 각하께는 터무니없는 작자가 적으로 버티고 있는 모양이로군……마왕 단탈리안에 대해 지금부터라도 대책을 세워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확히 어떻게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날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비텐마이어는 공화정부의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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