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85화 (185/510)
  • 00185 동족혐오  =========================================================================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슈 베르나르.”

    “감히 나를 능멸하려는 게냐? 하. 바르바토스의 총애를 받아 아주 기고만장하도다.”

    내가 의도적으로 가명을 입에 담자, 레라지에가 눈썹을 찡그렸다. 무례를 저지른 것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모른다고 잡아떼니 분노할 법했다.

    “썩은 돼지 내장의 악취가 풍기고 있다. 네 녀석의 자만심이 아니더냐. 합스부르크에서 재미 좀 봤더니 프랑크도 마찬가지라 여겼다면 어리석은 오판이다, 어린 마왕아. 이곳에는 마왕의 성역도 없으며 검은 산맥도 없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레라지에가 내뿜는 기세가 대단히 사나웠다. 자칫 이쪽의 눈가가 떨릴 정도였다. 그동안 내가 수많은 상위 마왕을 상대하지 않았다면 오금을 저리고 당장 엎드렸겠지.

    “레라지에 전하. 지적하신 대로 저는 어리고,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허나 단 하나의 진실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몸이 공포를 느끼는 것과 무관하게 혀를 굴릴 줄 알았다. 마치 전국시대에 제왕들을 상대하며 한평생 전전하던 유세객이 그러했듯이.

    “합스부르크든 프랑크든 그곳이 어디인지 상관없이 마왕은 마왕이요, 인간은 인간입니다.”

    “뭐라?”

    “마왕은 인간의 적이고 인간은 마왕의 적……그렇지 않습니까?”

    레라지에가 인상을 더욱 더 구겨졌다.

    나는 다만 예의바른 청년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백하건대 저는 레라지에 전하를 만나기를 제법 기다렸습니다. 평원파의 다른 마왕들은 레라지에 전하를 다소 무시하더군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지요. 전쟁에서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 그래봤자 기본이지만, 그래도 기본입니다.”

    “…….”

    “누구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반드시 해주어야 한다. 눈에 띄지 않거니와 전공마저 적습니다. 레라지아 전하께서 자처하신 임무는 그런 종류입니다. 틀림없이 전하께선 마왕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시고, 월맹군에 헌신적이시겠지요……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레라지에는 표정이 잠잠해졌다. 그의 격정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런데 오늘 전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적잖게 실망스러웠습니다. 무엇입니까, 인간의 문화에 열의를 다하시는 그 모습은? 인간은 우리의 적입니다.”

    “흥.”

    레라지에가 코웃음을 쳤다. 흥이 식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요즘 들어 이름 깨나 날리기에 어떤 놈인가 싶었더니……단순한 '마왕'이었는가.”

    레라지에는 마차에 놓인 상자에서 포도주를 꺼냈다. 맨손으로 코르크 마개를 따더니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단순한 마왕이라니요?”

    나는 더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까 전부터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네놈이 재미없다는 뜻이로다, 어린 마왕아. 진지함이라는 햇빛을 쐬어 세상의 미묘한 그늘과 그림자를 모두 쫓아내버리고, 청소라는 명목 아래 모든 사물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만들어버리지. 내 이래서 평원파의 동지들을 적이 싫어하니라.”

    분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레라지에는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레라지에는 젊은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노인처럼 말했다. 미남이 늙은 어투로 말하는데 그것이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눈앞의 마왕에게는 젊은 청년과 늙은 현자의 공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질문을 하나 던지마.”

    레라지에가 비웃으며 말했다.

    “네 녀석은 브란덴부르크의 영지를 약탈하지 않았을뿐더러 영지민의 안전과 자유까지 약속했다. 단순히 인간을 적이라고 생각했다면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발상이었다. 어째서 그리했는고?”

    “숙원은 사사로운 감정에 앞서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브란덴부르크의 인간을 죽이면 지금 당장은 통쾌하겠으나, 대륙 정벌이 이루어질 날은 그만큼 멀어지겠지요. 우리의 염원을 위해서라면 저는 얼마든지 인간의 더러운 악취를 참을 수 있습니다.”

    “크크. 우리의 염원이라…….”

    레라지에가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이렇게 평원파스러운 꼴통도 오랜만에 보는구나. 바르바토스가 키워둘 만도 하다. 자기 대신 열심히 짖어대는 개새끼 한 마리가 생겼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을꼬.”

    내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레라지에 전하. 송구합니다만, 혹시 지금 군단장 각하를 비판하신 것입니까?”

    “크하하하!”

    레라지에가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게다가 주인님에게 충실하기까지! 실로 가관이로다. 왜 아주 바르바토스 앞에서 멍멍거리지는 않았더냐. 크크. 네 같은 놈에게 합스부르크가 절단났다니 대륙 중부의 꼬락서니도 알 만하다.”

    “…….”

    “오냐. 바르바토스가 왜 네 녀석을 나한테로 보냈는지 알겠도다. 머리 돌아가는 수준이 어린애나 다름없으니 바르바토스인들 오죽 답답했겠는고.”

    레라지에가 이제 반쯤은 경멸이 섞이고 나머지 반쯤은 동정심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경멸과 동정심, 그것은 상대방이 나를 완벽하게 깔본다는 의미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미소 한 가닥을 지었다.

    ‘먹혀들었군.’

    지난 몇 년 동안 능글맞고 음흉한 마왕들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상대방을 설득시키고 납득시키는 것만이 유세술에서 능사가 아니었다.

    화술에도 전술이 있고 전략이 있어, 전투에서 패배할지라도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만이다. 구태여 상대방을 감탄시키지 않아도 괜찮다. 상대방에게 호의를 얻지 못해도 괜찮다.

    전형적인 꼴통을 연기한다. 어리석고 생각이 짧은 인물인 것처럼 군다. 상대방은 '이놈도 그런 놈이구나' 하고 간단하게 납득해버린다.

    이렇게 되면.

    “네 녀석, 단탈리안이라고 했더냐. 인간의 도시에서 보름이라도 머물러본 적이 있는가?”

    “……아니요. 없습니다만.”

    “크흐. 보름조차 살을 맞대보지 않고서 인류를 멸절하겠다고 떠들어대니, 이만한 어릿광대 연극을 구경한 적이 없도다. 한번도 보지 못한 산맥을 등정하겠다고 말하는 꼴이 아닌가.”

    ――상대는 자기가 우위에 서 있다고 착각한다.

    상대에겐 더 이상 이쪽을 탐색할 필요가 없다. 정찰이 전부 끝난다고 여긴다.

    그는 이쪽이 경계할 만큼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무시해도 좋다고 판단한다.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에 노출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끝나면 안 된다.

    “……레라지에 전하. 그런 것은 현재의 대국(大局)에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국? 지금 대국이라 했더냐? 크하하. 어찌나 내 어린시절과 이렇게나 닮았을꼬.”

    레라지에가 포도주까지 흘려가며 웃었다.

    “예전에 생각없이 쏘아댄 화살이 이제서야 거꾸로 내 심장에 처박히는 듯하여 가히 흥미롭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녀석이 대국을 논하자니 꽤나 볼 만하지 않은가. 좋다. 어디 대국을 논해보거라.”

    “아시다시피 우리 마왕군은 다시금 내분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레라지에의 경멸에 기분이 상했지만 간신히 견뎠다는 분위기를 내풍기면서. 레라지에 역시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시종일관 입가에 비웃음을 내걸고 있었다.

    아마도 어린애가 힘껏 애를 쓰는 광경처럼 보이겠지. 레라지에 입장에서는 이만큼 유쾌한 일이 없었다.

    자기는 변방에서 외로이 고생하고 있다. 중앙에서는 웬 듣도 보지도 못한 신출내기 마왕이 한창 명성을 떨친다. 어떤 놈인가 해서 봤더니, 인간은 악이고 마인이 선이라며 아주 유치한 이분법을 맹신하고 있다.

    애송이 중 애송이……그동안 중앙에 대해 알게 모르게 쌓인 섭섭한 감정까지 뒤섞여서, 레라지에는 마치 지금의 나를 비웃음으로써 중앙 전체를 비웃는 것처럼 느낀다.

    겉으로 나타나는 전공에서는 자기가 확실히 중앙에 밀린다. 허나, 마왕의 격으로 따지자면 자기가 한참 위이다.

    중앙은 대단하지 않다. 제8차 월맹군이 거둔 성과도 역시나 운에 불과하다……무의식적으로 위안을 얻겠지.

    내가 진지한 낯빛으로 말했다.

    “바르바토스 전하와 우리 평원파가 피땀을 흘려 합스부르크를 점령했지만, 그외 마왕들이 무도하게도 영토 분할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바르바토스 전하의 성정으로 미루어볼 때 타협이란 불가능합니다. 즉, 이제부터 월맹군 원정은 단순히 인간군 대 마왕군의 도식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레라지에가 포도주를 마시면서 이쪽을 흘겨보았다.

    “문제는 인간군에 있습니다. 우리는 유념해야만 합니다. 인간군이 일찍이 가증스러운 파이몬과 협력한 적이 있음을 말입니다. 인간군과 파이몬은 서로 협력해서 우리 평원파를 전멸의 함정에 빠트리려 했습니다…….”

    내가 이를 바득 물었다. 파이몬의 이름을 언급하기만 해도 화가 치민다는 듯이. 스스로 보기에도 기가 막힌 연기였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인간과 마왕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서로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왕군이 내부에서 분열한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러하겠지요.”

    “흐음…….”

    “마왕군이 분열한 반면에 아직 인간군의 동맹은 건전합니다. 지금 상태에서 마왕들이 인간군을 이끌어들여 동족을 해하고자 하면, 결국 인간만이 이득을 챙기게 됩니다. 레라지에 전하. 월맹군은 또 다시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레라지에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월맹군의 실패를 막으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고?”

    “마왕군을 통합시키기란 요원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적군을 아군과 똑같이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레라지에 전하. 우리는 인간계를 분열시켜야만 합니다.”

    “인간계는 또 어찌 분열시킨다는 말이냐?”

    레라지에의 눈동자에서 권태로움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는 서서히 내가 단순히 '생각이 얄팍한 신인'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이 얄팍하지만 머리가 제법 굴러가는 신인' 정도로 수정되었으리라.

    “대륙에서 합스부르크 다음가는 국가는 단연코 프랑크입니다. 사탄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어, 때마침 프랑크에는 내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황태후는 황제와 진심으로 승부를 벌일 생각이 없다.”

    레라지에가 단언했다.

    “세상에 어느 어미가 아들을 죽이려 들겠는고.”

    “허나, 황제의 생각은 다릅니다……그렇지 않습니까?”

    “…….”

    레라지에가 포도주병을 내려놓았다.

    지금쯤 나에 대한 인상은 '생각이 얄팍하지만 머리가 제법 굴러가고, 정보력이 만만치 않은 신인'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걸 유도하고 있었다.

    “내전은 일어납니다. 문제는 이 내전을 어디까지 확장하느냐에 있습니다. 단지 왕당파와 공화파의 대결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프랑크의 백성들을 선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백성들을 선동한다고?”

    “흑사병에 기근, 여기에다 영주까지 본연의 의무를 져버린다……어리석은 인간 민초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지요.”

    레라지에가 손으로 앞머리를 매만졌다. 생각에 잠길 때 드러나는 버릇인 것 같았다. 오케이, 앞으로 기억하자.

    “영주가 본연의 의무를 져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이더냐.”

    “간단합니다. 저는 신뢰도 높은 용병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레라지에 전하께서 군대를 이끌고 영지를 공격해주십시오. 그때, 우리가 내부에서 호응하겠습니다.”

    “흥. 결국 영지를 점령하겠다는 얘기로군. 일고할 가치조차 없다. 마왕은 모든 인간의 적. 내전이 무마될 빌미만 제공되겠지.”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실례지만, 레라지에 전하께서는 격퇴되셔야 하겠습니다.”

    “뭐라?”

    “다만 영주의 군대가 아니라 바로 저의 용병단에게.”

    내가 말했다.

    “용병대가 물리치는 마왕의 군대를 영주는 감당하지 못한다. 용병단이 지키는 지역에는 거의 아무런 손해가 없는 반면, 영주군이 지키는 지역에는 막대한 손해가 발생합니다. 영주에 대한 신뢰는 한없이 떨어지겠지요.”

    “…….”

    “이때 저의 용병단이 영지를 떠난다면……영주에 대해 불만이 극심하게 쌓인 백성들이 어떻게 나올지, 전하께선 상상이 가십니까?”

    레라지에가 침묵했다.

    그가 한참이나 앞머리를 만지작거린 다음 입을 열었다.

    “쯧, 과연. 애송이지만 실력은 확실하다 이 말이렷다.”

    “……과찬이십니다.”

    내가 석연치 않게 대답했다. 애송이, 라고 불려서 기분이 나쁘다고 티를 냈다. 물론 본심은 정반대였다. 애송이라 생각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바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다. 나는 모욕을 인내할 수 있다. 쓰레기를 가리켜서 쓰레기라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당신은 내가 보기 좋게 차려진 밥상을 즐겨주기만 하면 된다.

    그쪽은 심리적으로 우위를 만끽해서 좋고, 이쪽은 목적을 달성해서 좋다.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 윈-윈이다.

    그저 나 하나가 자존심을 버림으로써 모두가 행복해진다. 멋진 비즈니스가 아니고 뭔가.

    다만.

    마음이 싸늘했다.

    지금처럼 나보다 압도적인 강자를 속이고, 능멸하고, 그래서 겨우 나의 자리를 마련해나갈 때마다 점점 더 무언가가 마모되었다. 그것은 마음의 각(角)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라우라와 라피스가 필요하다. 연기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이 곁에 있어야만 한다. 내가 돌아가면, 그녀들은 기꺼이 잘했다며 웃어주겠지……그거면 충분했다. 나는 애송이와 같이 어설픈 표정을 연기했다.

    ============================ 작품 후기 ============================

    참고로 작중에서 '인간'은 인류를 뜻하지만 '사람'은 마인과 인간 양쪽을 전부 통칭합니다.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인간이나 마인이나 똑같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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