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83화 (183/510)
  • 00183 동족혐오  =========================================================================

    *  *  *

    평원파에 속한 마왕이라 해서 만나기 쉽지는 않다.

    며칠 전부터 서열 제14위의 레라지에와 접촉을 시도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곱지가 않았다. 상대측에서는 뚜렷하게 난색을 표현했다. 왜 공식적인 통로를 이용해서 만나려 하지 않는가, 하고.

    비공식적인 창구로 다가오는 저의가 무엇인가. 애시당초, 합스부르크 전역에 참가하고 있어야 할 마왕이 왜 뜬금없이 프랑크에 있는가……. 요컨대 수상쩍다 이거였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었다.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엔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엇이든 생각을 재고하게 만드는 값어치가 있었다. 현재 평원파에서 나는 실세로 떠올랐다.

    파벌 권력투쟁에서 한 끗발 밀렸을지언정 마왕군 서열 제14위라는 자리는 카드게임으로 얻는 물건이 아니었다. 레라지에가 나에 대해서 모를 리 없었다. 예상대로, 레라지에는 신속하게 우리가 어디서 만나면 좋을지 알려왔다.

    접견 장소가 상당히 특이했다.

    “인간의 도시에서 만나자니. 저쪽 전하도 상당히 엉뚱하네요.”

    “게다가 잘 봐라. 오페라 초대장까지 정중하게 끼어 있어.”

    “어머나, 정말. 오페라 극장에서 밀회라도 나누자는 것일까요.”

    제레미가 초대장을 읽으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마왕이라면 보통 마왕성에서 회견을 열기 마련이다. 자기 홈그라운드이니까. 반면에 인간의 도시는 마왕들에게 꽤나 위험한 장소이다. 언제 어디서 정체를 들킬지 모른다.

    “저희 암살대가 먼저 도시에 가서 잠복해 있을까요?”

    “아니. 그럴 필요없다. 아마 레라지에는 나의 배짱을 시험해보려는 생각이야. 수행원은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가는 편이 낫지.”

    나는 제레미만 데리고서 도시로 이동했다.

    *  *  *

    저녁이었다. 우리는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마차를 타고 오페라 극장에 도착했다.

    극장 앞에서 거지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동냥질하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자리싸움에서 밀려난 이들이 멀찍이 쫓겨났다. 오페라 극장으로부터 희미하게 연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한 여자애가 얼른 뛰어왔다.

    “마담, 한푼만요.”

    여자애가 두 손을 벌린 채 제레미한테 들러붙었다.

    “신의 축복이 함께할 거예요.”

    “어머나. 저 같은 사람을 축복해주다니 고마워라.”

    제레미가 아이 손에 동전을 올려놨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담, 신의 축복이 함께할 거예요.”

    여자애는 과장스럽게 인사한 다음, 새로운 먹잇감을 찾은 눈빛으로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웃으면서 아이의 손바닥에 은화를 떨어트렸다. 어둑어둑한 저녁에도 은화는 환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자애가 깜짝 놀랐다.

    내가 아이한테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난 파리시오룸에서 이름난 포주이다. 널 잡아가서 창녀로 키울 거다. 평생 노예로 써먹어주마, 꼬맹아. 대신 일주일마다 은화를 한웅큼 안겨주지. 어떠냐?”

    “꺄, 꺄아아악!”

    여자애가 비명을 지르면서 냅다 줄행랑쳤다.

    나는 꼬마의 등이 점점 길거리 너머로 멀어지는 것을 보고 키득거렸다. 그러자 제레미가 옆에서 어이없어했다.

    “방금 왜 그러셨어요?”

    “꼬마애는 이제 은화를 볼 때마다 경계하겠지. 상대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닌가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약간의 의심을 적선했을 따름이다.”

    “……저는 가끔 무슈가 대인배여서 평범한 사람 눈에 미친 것처럼 보이는 건지, 아니면 미쳐서 마치 대인배인 것처럼 보이는 건지 헷갈려요.”

    내가 어깨를 으쓱거였다.

    “알 게 뭐야. 미친 대인배겠지.”

    제레미가 작게 웃었다.

    “우문에 현답입니다. 저의 멋진 신사 님.”

    하고 그녀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껴왔다.

    오늘 우리 두 사람은 귀족 남성과 그 애인 역할을 연기했다. 나는 가발을 써서 뒤통수에 조그맣게 난 외뿔을 감추었고, 제레미는 모자에다 망사를 달아서 흉터 난 얼굴을 가렸다. 주변에서는 그저 평범한 커플로 보이겠지.

    상류층 인간들이 극장 입구를 번잡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들이 떠드는 소리에 의하면, 이번 오페라는 초연인 데다가 대단한 배우까지 출연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도시 사교계에 들락날락거리는 거리는 남녀노소는 전부 극장에 몰려왔다.

    극장의 시종이 초대장을 받고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객실이었다. 바로 정면에서 무대가 보이고 있었다.

    “헤에. 가장 비싼 자리네요.”

    “그래?”

    “무슈는 오페라에 흥미가 없나봐요?”

    내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오페라를 보러 온 건 처음이었다. 공연이 기대되거나 그런 마음은 단언컨대 일절 없다.

    내 예술적 취향이 얼마나 저질스러운지는 스스로 잘 안다. 나는 자그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으면서 졸아본 경험이 있는 남자다. 고등학교 시절 음악 교사가 나를 경악스러운 눈동자로 쳐다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음, 낮잠 자기 참 좋은 수업이었어.

    “레라지에 전하는 언제 올까요?”

    “사람들이 관람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쯤에 오겠지.”

    반면에 제레미는 이런 게 취향인 것 같았다. 아까 전부터 촐랑촐랑 흥분하는 감정이 전해지고 있었다. 오페라 공연은 덤이고 레라지에와 비밀리에 접선하는 것이 본업이라는 걸 알면서도. 의외의 면모라서 약간 재밌었다.

    이런 문화 활동은 나보다 라우라가 어울릴 텐데. 공작가의 차녀인 그녀라면 분명히 예술적인 소양도 상당하겠지.

    영화나 연극 따위를 보고 나오면서 ‘이번 공연은 이런 면에서 좋았다’, ‘다만 연출이 조금 과하더군. 더 담백하게 하는 편이 좋다’, ‘연출가의 해석은 다소 주관성이 강해서……’, 이렇게 자기 소감을 열심히 늘여놓는 부류일 거다. 십중팔구.

    라피스는……지극히 냉정한 비평가처럼 공연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지적할 것 같군. ‘주인공 배우, 제3막 제2장 열다섯 번째 대사에서 혀를 씹었습니다’라든지, ‘여자 배우는 3년 이내 연기 방법을 바꾸지 않는 이상 배우 생명이 길지 않을 것입니다’라든지. 그리고 실컷 비평해놓은 다음 마지막에 가선 ‘평범하게 좋은 연극이었습니다’라고 말하리라.

    바르바토스는 그냥 곯아떨어진다. 틀림없다. 녀석은 영화관에서 엄청 크게 코를 골면서 자는 민폐 관객이다. 영화관을 나오면서는 기지개를 쭉 펴고 ‘잘 잤다!’ 하고 씨익 웃겠지.

    “저거 봐요, 무슈. 이제 시작하나봐요!”

    지루한 시간을 상상으로 떼우고 있자, 제레미가 나한테 바짝 몸을 붙였다. 두 개의 큼직하고 부드러운 살덩어리가 내 팔뚝을 눌렀다. 그녀는 평소보다 확실히 더 들떠 있었다. 그렇게 오페라를 좋아하나?

    오페라는 예상대로 재미가 없었다. 버림받은 왕자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결국은 나라도 멸망시키는 이야기였다. 제레미는 초롱초롱한 눈으로――평소에 연기로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이 아니었다――무대를 바라보았다. 글쎄. 내 개인적인 감상은, 왕자가 천하의 멍텅구리라는 것이었다.

    왜 자기가 반역하리라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가? 왜 여동생이 외국에 시집을 갔다고 해서 분개하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여동생을 통해서 외세의 힘을 끌어들이면 쿠데타가 한결 쉬워지겠지. 겉으로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모습만 보여주어야 했다. 저렇게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니 애비도 당연히 왕자를 경계한다.

    조잡하군……너무나 조잡하다.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아닌가. 저 녀석을 왕세자로 지목한 왕도 어지간히 정신머리가 돌아버린 양반이다. 귀족들은 다른 후계자를 지지하지 않고 뭘 하는가? 저 나라엔 멍청이밖에 없는가?

    얼른 죽어라. 너 같은 정치인은 얼른 죽는 편이 인민과 국가를 위한 길이다. 이 연극이 베드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폭동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얼른 목을 매달고 이 지루한 공연을 끝장내라.

    ‘……그나저나.’

    내가 주위를 쓰윽 둘러보았다. 관객들은 모두 무대에 집중하고 있었다.

    ‘레라지에가 안 오는군.’

    오페라는 중후반을 내달리고 있다. 레라지에가 도착해도 진즉에 도착했어야 한다. 밀담을 나누는 데 넉넉하게 잡아서 세 시간은 확보해두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하고 벌써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레라지에는커녕 그의 수하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함정인가.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레라지에가 나를 인간들한테 넘겨버릴 가능성. 그런 것이 있겠는가? ……없다. 바르바토스의 분노를 두려워 하면 그럴 리 없다. 레라지에는 이쪽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공격해올 가능성은 극히 적다.

    “저기, 단탈리안 전하.”

    “음.”

    제레미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인간의 도시에서는 위험하니까 가급적 전하라 부르지 말기로 약속했는데도. 아마 제레미도 나처럼 현재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렇지만 제레미의 말은 내 예상을 한참이나 엇나갔다.

    “빨아드릴까요?”

    “……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레미를 쳐다보자, 그녀는 평소처럼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얘가 방금 뭐라고 말한 거냐?

    “아무래도 단탈리안 전하는 공연을 전혀 즐기지 못한 것 같아서요. 주인님이 지루해하는데 어떻게 시녀인 저 혼자서 마냥 신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전하도 즐길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바르바토스 전하와 적잖게 고급스러운 취미를 즐기셨다는 사실, 소인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밀폐된 야외에서 하는 것도 분명히 전하의 마음을 만족시켜드릴 거예요.”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극장에서 펠라티오를 시키겠는가. 바르바토스가 제멋대로 마왕군에 염문을 뿌려댄 탓에 나의 이미지가 영 이상한 방향으로 성립되었다. 나에게는 노출증 따위가 없었다.

    “난 됐으니까 장난치지 말고――.”

    손사레를 치려던 때였다. 제레미의 눈동자가 진지하다는 걸 깨닫고, 내 머리에 좋은 아이디어가 스쳤다.

    “……아니. 의외로 좋은 생각일지도 모르겠어.”

    “그렇지요?”

    제레미가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입끝이 따라 올라갔다.

    “좋다, 제레미. 허락하지. 최대한 음란하게 빨아재껴봐.”

    “분부대로. 이래봬도 온갖 기술에 통달했습니다. 실망하시지 않을 거예요.”

    제레미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의 허리춤이 아래로 내려갔다. 바깥으로 나온 나의 물건을 제레미가 낼름 핥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의 뜨거운 입안이 내 것을 완전히 감쌌다.

    “읍……아읍, 하읍…….”

    아랫도리에서 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두 눈으로 극장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자아. 어디에 있냐, 마왕 레라지에여.’

    우리가 자리한 객실 좌석에는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제레미가 무슨 짓을 하는지 주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연극이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 객실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눈치 챌 터.’

    손님이 갑작스럽게 상스러운 짓을 한다. 엄청난 무례이다. 그러나 손님을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는 것도 상당한 무례. 즉, 우리는 지금 레라지에한테 항의하고 있다. 우리를 초대해놓고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극장에서 이곳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좌석들의 양쪽 날개 끄트머리 정도일까. 나는 눈을 왼쪽 오른쪽 차례대로 돌려가며, 어디에서 반응이 나오는지 차분히 기다렸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노래가 중간에 끊겼다. 악단의 음악은 계속해서 연주되고 있는데, 남자 주인공이 별안간 노래를 멈춘 것이었다. 물론 잠깐뿐이었다. 주인공은 다시 서둘러 노래를 이어나갔다.

    내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과연. 거기 있었는가.’

    나의 시선은 무대 위.

    가면을 쓴 남자 배우로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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