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82화 (182/510)
  • 00182 동족혐오  =========================================================================

    제레미가 행장에서 각종 장비를 꺼내었다.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비장의 물약들이죠.”

    맑은 유리병들이 나무상자에 보관되어 있었다. 병마다 다양한 색깔의 액체가 찰랑거렸다. 물약 이외에도 지난 번에 보았던 수술칼, 향초, 약초 분말이 상자 칸칸마다 다소곳하게 담겼다. 뭐라고 할까. 약초꾼-의사-조향사를 한꺼번에 섞어놓은 차림이었다.

    “음. 이제보니 단순한 암살자가 아니라 거진 연금술사구만?”

    “웬만한 암살대에서 부대장이라도 맡으려면 기본적으로 약제에 밝아야 하니까요.”

    독약과 독향, 그런 지식이 필수로 뒤따라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암살자는 문무 양쪽에 밝하야 했다. 내가 암살자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 꽤나 달랐다.

    우리 두 사람은 준비를 끝마치고 마차에 들어갔다.

    데이지가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제레미는 데이지를 곧바로 침대에 눕혀서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데이지의 입안으로 무언가 샛노란 물약을 흘려넣었다. 무엇인가 물어봤더니 약초 몇 가지를 녹인 꿀물이었다.

    “포션을 지나치게 사용한 후유증에다……어휴, 단탈리안 전하. 심하게도 때리셨습니다. 입술 까진 것 좀 봐요. 후유증보다 오히려 이쪽이 심각한 것 같은데.”

    촛불이 마차를 붉게 밝혔다. 제레미가 데이지의 누더기옷을 벗겼다. 그리고 끓인 약물에 수건을 담가서 데이지의 온몸을 구석구석까지 닦았다.

    “그래도 여자인데 얼굴을 망가트리면 안 됩니다.”

    “네가 말하니까 말의 무게가 다르군.”

    “후후.”

    제레미는 얼굴의 절반이 화상에 흉하게 지져 있으니까.

    “그 녀석이 나를 도발했어.”

    털썩, 하고 내가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더럽게도 앙큼한 꼬맹이다.”

    “헤에, 도발했다고요? 무슨 말로 도발했길래 전하와 같은 분께서 넘어가셨어요? 언제나 냉정하시고 침착하시면서. 그거 소인도 알고 싶네요.”

    “쓸데없는 관심은 끊어라.”

    내 어머니를 언급했지.

    나 자신이 놀랄 정도로 격분했다. 아직도 화가 줄어들지 않았고.

    ‘저 년은 내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를 꿰뚫고 있다.’

    맞은편에서 치료행위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지난 번 화전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열 살짜리 소녀는 마치 이쪽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눈에 훤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어떻게 해야 내 호의를 얻는지, 어떻게 해야 나의 이해와 자비를 이끌어내는지, 마치 오래된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꼭 그처럼 꿰뚫어 보았다.

    만약 데이지가 암살을 시도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더라면 나는 간신히 분노를 삭혔을 것이다. 어차피 용사, 아니 용사의 찌꺼기와 같은 것. 나를 죽이려 드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죽이려 든 것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았으리라.

    그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제멋대로 행동해서 정작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죽어버리는 것 따위, 결코, 절대로, 다시는 더 경험하고 싶지 않으니까.

    “저 꼬마는 일부러 내 신경을 건드렸어. 수술이 어지간히도 아팠나보지, 빌어먹을 년…….”

    “전하의 신경을 일부러 건드려요? 거기에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곧 뒈져 나자빠져도 미안하다 말하긴 싫다는 거다.”

    내가 이빨을 으드득 갈았다. 녀석은 이쪽의 마음을 읽어서 기고만장할지 모르겠어도, 그깟 어린애가 생각하는 수준이야 나한테도 훤했다. 그럼. 뻔하고 말고.

    그러나 제3자인 제레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죄송하지만, 전하. 무슨 얘기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존심 싸움이다. 암살을 시도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죄하기는 싫다. 그럼 다시는 내 암살을 시도할 수 없게 되어버리니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관용에 기대어서 손쉽게 용서받기도 싫다.”

    저 자식은 나랑 심리적으로 대등한 관계에 놓이려는 것이다.

    “……설마 자기가 이렇게 맞을 걸 알면서 그랬다는 말씀이에요?”

    “말했지 않는가. 알면서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의도했다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나한테 선전포고를 날렸어. 주인과 노예가 되었으니 평탄하게 관계를 하나씩 쌓아나가거나, 그딴 것은 눈꼽만치도 바라지 않는 거다. 서로가 서로의 신경을 긁어대며 사이좋게 지옥 같은 나날에 떨어지자……그런 얘기겠지. 빌어먹을 년.”

    게다가 나한테 주도권을 뺏기기 싫다는 계산까지 끼었을지 모른다.

    아니, 확실하다. 내 계획대로라면 수술 직후 몸이 약해진 데이지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일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야 했다. 그게 진심이 담긴 은혜이든 거짓부렁이든 상관없다. 친절을 입었다는 사실만으로 데이지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데이지에게 수많은 친절을 강요할 수 있는 반면, 데이지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친절은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데이지는 심리적으로 완전히 나한테 밀리겠지. 그게 시나리오였다.

    즉, 관계역전을 노린다면 바로 오늘밤이 기회였다. 나를 도발해서 실컷 쥐어패도록 만들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내가 녀석을 노예로 만들었고, 무시무시한 수술을 강요했을뿐더러, 마지막으로 병자이자 환자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내가 심리전에서 불리해졌다. 이제 웬만큼 많이 친절을 베풀어도 그건 순수하게 친절이 아니라,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한 보상이 되어버렸다. 발칙하기 짝이 없는 년!

    “…….”

    제레미는 나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른 한편으로는 떨떠름하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단탈리안 전하. 혹시 전하께서는 상대방과 마주할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심리구조상 어찌해야 우위를 점하는지……? 더군다나 이 꼬맹이도 그런다구요?”

    “당연하지.”

    내가 눈쌀을 찌푸렸다.

    “나는 서열 제71위의 최약체 마왕이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 그 의중조차 파악하지 못해서야 곧장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야. 지피지기 백전불태이다. 기본 중 기본 아니냐?”

    “물론……의중을 파악한다고 간단히 표현해버리면 당연히 그렇지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어느 누가 오직 그것만을 위해 자신의 말투와 신체를 전부 바쳐서……아닙니다. 아니에요.”

    제레미가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게 모략가의 방식이라는 거군요. 소인도 이해했습니다. 참, 터무니없는 삶의 방식이 있었네요. 그런데 이 아이가 전하와 동류라는 것은 또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척 보면 알아. 아주 썅년이야.”

    “…….”

    제레미가 치료하는 손을 멈추고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한숨을 쉬고 도로 치료에 집중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뭐라 중얼거리는데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두 시간쯤 지나자, 데이지는 완전히 눈을 떴다. 약초물의 효과인지 입술이 터진 부분도 말끔하게 나았다. 예전처럼 새하얀 살결이 돌아왔다.

    “…….”

    데이지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와 제레미를 차례대로 훑더니, 제레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나. 별 말씀을.”

    또 다시 이성이 끊어질 것 같았다. 진짜 정진정명 우라질 꼬맹이였다! 방금 인사는 제레미에게 한 것이라기보다 나한테 대놓고 보여준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당신에게는 감사 인사 따위를 절대로 표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왼손으로 겨우겨우 품속에서 나무공을 꺼내들었다. 이걸 손안에서 굴리면 마음이 진정되었다.

    차악 하고 손바닥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자 그나마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래. 바로 이거다. 진정해라, 단탈리안……나보다 열 몇 살 어린 꼬마다. 뻔한 수작에 넘어가지 마라. 일시적인 기습에 주도권을 뺏겼을 뿐이지, 녀석에겐 이제 별다른 수가 없다.

    “장래가 유망하신 암살자 나으리께서 깨어나셨군 그래.”

    내가 미소를 지었다. 분노를 미소로 덮어씌울 정도는 여유가 돌아왔다. 그래도 비아냥거리는 어투가 튀어나오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는지 모르겠어. 네가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진 사이 네 부모님의 왼팔과 왼다리가 무사한지 궁금하지 않은가?”

    “……후.”

    여자애가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코웃음이라니. 이건 진짜 사람 꼭지 돌아버리게 하는 짓거리였다. 얼굴은 무표정한 주제에 콧소리로만 비웃으니 더더욱 열받았다.

    나는 손바닥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서 나무공을 꽈악 쥐었다. 다시 한번 저 재수없는 놈에게 싸대구를 날리고 싶었다. 사람을 눈앞에 두고 코웃음을 흘리는 자식들은 죄다 단두대에 매달아 사형시켜야 마땅했다. 법적으로 금지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건 흉기였다! 흉기에 반응해서 싸다구를 날리면 그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란 말이다.

    내가 입술을 비틀면서 말했다.

    “좋아. 서로 불필요한 말은 생략하지.”

    “저는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습니다.”

    데이지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살인충동이 일어났다.

    “……네가 간밤에 저질러준 짓에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무척 깊은 감명을 받았다. 멋진 선전포고였다. 그에 대한 답례로 선물을 준비했지. 이게 무엇인지 보이나?”

    내가 오른손을 들이밀었다. 투명한 점액질이 둥그런 모양새로 꿈틀거렸다.

    “슬라임이군요.”

    “이제부터 이걸 네 몸안에 집어넣을 거다. 부디 마음에 들어하기를 바라마.”

    “원하시는 대로.”

    대답이 대답마다 짧게 끝났다. 죽어도 기세에서 밀리기 싫다는 얘기였다. 아주 도도해서 멋지다, 용사 후보 데이지. 어디 며칠 후에도 그 표정이 유지되는지 일일여삼추의 심정으로 기대하겠다.

    “제레미.”

    “예.”

    제레미가 슬라임을 넘겨받았다. 그녀가 슬라임의 한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간지럽히자, 슬라임이 자연스럽게 두 덩어리로 갈라졌다.

    “자아, 데이지 양. 다리를 벌리세요.”

    “…….”

    데이지는 그제야 슬라임이 어떤 용도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무표정한 시선으로 슬라임을 바라보더니, 재차 무표정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보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인 것 같았다. 심장에 마법각인을 새길 때 이미 볼 것 못 볼 것 전부 나눈 사이인데 왜 그런가?

    하지만 왠지 귀여워서 적당히 고개를 돌려주었다. 머리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앞으로 데이지 양의 교육을 담당할 예정입니다. 제 말을 듣지 않으면 곤란해요.”

    “……알겠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이러하다. 제레미는 둘로 나눈 슬라임 중 하나를 데이지의 '안'에 삽입한다. 아마도 투명한 슬라임은 머뭇거리면서도 꾸물꾸물 서서히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기어들어가겠지.

    “…….”

    지금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데이지가 숨을 삼키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물질, 그것도 몬스터의 일종이 자기 몸안으로 들어가는 감각은 지극히 생소할 것이다.

    일 분 정도가 흘렀다. 나는 심심해서 발로 땅바닥을 두들기고 있었다.

    제레미가 말했다.

    “예, 됐어요. 그럼 다음 걸 집어넣을 게요.”

    “……?”

    지금쯤 안쪽으로 들어갔던 슬라임이 틈에서 빠져나왔으리라.

    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데이지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예상 외의 전개가 펼쳐지고 있겠지.

    눈초리가 이쪽의 속내를 파악하려고 열심히 내 얼굴을 쏘아봤다. 나는 유쾌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건 말건 제레미는 두 번째 슬라임을 흘려보냈다. 이번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유일한 차이점은 첫 번째 슬라임과 달리 두 번째 슬라임은 빼내지 않았다는 것. 즉 두 번째 슬라임이 데이지의 몸안에 아예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혹시 불편한 느낌이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데이지는 이걸로 정말 끝인가 하는 얼굴이었다.

    “거의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머나, 잘 됐네. 그럼 성공한 거예요.”

    제레미가 상냥하게 말했다.

    “자아. 일어나서 망토라도 걸치세요. 며칠 잠잤더니 엄청 배고프죠? 솥에 따뜻한 스프가 남아 있으니까 얼른 가서 한 접시 먹으세요.”

    제레미가 데이지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리고 미리 챙겨온 망토로 데이지의 몸을 둘러쌌다. 낡아서 헤졌지만 방한마법이 걸린 상등품이었다.

    “아, 그리고 저를 부를 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세요.”

    “……예,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제레미가 데이지를 데리고 마차에서 나갔다.

    퇴장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데이지는 의뭉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가 뭘 알겠는가. 나는 마차에 홀로 남아 작게 웃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그래봤자 열 살이다. 이런 방면에 대해서는 전혀 대응할 수가 없다. 바로 그 점을 노린다…….

    상대의 약점을 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겠지.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다. 어떤 표정을 지어줄지 진심으로 기대된다.

    다만, 안타깝게도 일단은 마왕들을 만나고 와야 한다……. 접견을 끝내고 돌아오는 즉시 오늘밤의 복수를 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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