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81화 (181/510)
  • 00181 동족혐오  =========================================================================

    “――윽!?”

    급하게 무릎을 들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얼떨결에 차올린 무릎이 데이지의 배에 직격했다. 소녀가 짧게 신음을 뱉었다. 그녀는 마차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쨍그랑, 하고 단검도 바닥 어딘가로 내팽개쳐졌다.

    그녀가 멀어지고서도 여전히 날붙이의 차가움만은 목덜미에 남았다. 칼날이 정말 바로 나를 찔러올 양 가까이 있었다. 명확한 살기가 그곳에 서려 있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나는 뭐라도 묻은 것처럼 손으로 목을 쓸어내렸다.

    개 같은 애새끼가.

    이를 꽉 물었다. 공포가 사라지자 분노가 치밀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데이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릎이 운 좋게 명치라도 때려버린 것 같았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그녀의 몸에 올라탔다. 여자아이의 자그마한 몸이 간단하게 제압되었다.

    데이지가 무표정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도저히 몇 초 전에 나를 죽이려고 든 꼬맹이의 표정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 무덤덤함이 내 분노에 기름을 퍼부었다.

    ─ 차악!

    나는 손바닥으로 데이지의 뺨을 후려갈겼다. 마치 수수깡이 부러지듯이 소녀의 얼굴은 가볍게 옆으로 꺾였다. 그렇지만 잠시 후, 데이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다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빌어먹을 애새끼.

    “네 년이 죽으려고 발악을 하는구나.”

    “아니요. 당신을 죽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눈초리에 변함이 없었다. 변함없이 반항적이었고 변함없이 재수없었다. 그러나 하찮았다. 내가 소리내어 비웃었다.

    “그래서? 어디 나를 죽여볼 수 있더냐? 하, 유감이로군. 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다. 네 년은 이제부터 숨을 쉬는 것까지 내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이다.”

    “그런 것 같군요. 유감입니다.”

    유감이라곤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데이지가 말했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의 뺨을 후려쳤다. 이번엔 더 강하게. 살과 살이 부닥치는 소리가 비좁은 마차에 울려 퍼졌다.

    “당장 불어. 언제부터 정신을 차렸냐?”

    “오늘 햇빛이 났을 때부터.”

    낮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얘기였다. 사흘밤낮 동안 깨어나지 못했으니 목이 타도록 마르고 배가 꺼지도록 굶주렸을 텐데, 그걸 한나절 내내 참았다. 오로지 나를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보기 위하여.

    독한 새끼.

    가슴이 뜨겁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내 눈동자에서 분노가 흐르는 것이 스스로 느껴졌다. 데이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아니 틀림없이 일부러 상황을 무시하고 그 작은 입술을 열었다.

    “잭은 누구입니까.”

    “뭐?”

    “항상 악몽을 꾸십니까? 사람 이름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계셨습니다. 반복되는 이름이 있더군요. 잭, 호크, 올란드, 리프……그리고 어머니.”

    데이지의 입끝이 살짝 올라갔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당신 같은 존재에도 어머니가 있다니 놀랍습니다.”

    “…….”

    뚝, 하고.

    이성이 끊어졌다.

    나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 데이지의 뺨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몇 번이고. 정말로 몇 번이고. 그때마다 데이지는 고개가 꺾였다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와서 나를 무정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기꺼이 폭력을 휘둘렀다. 강렬하게 폭력을 원했다.

    당연하게도, 며칠 동안 정신을 잃고 있던 여자아이의 몸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독기로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입술이 터져서 피가 흐를 지경이 되자 과연 데이지라도 더 이상 머리를 움직일 힘이 없는지, 고개를 옆으로 추욱 늘어트렸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다만 색색거리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들었다. 얼굴을 가까이 잡아당겼다. 속눈썹 숫자까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으르렁거렸다.

    “네 년의 애비랑 애미를 끔찍하게 조져버리겠다. 알아처먹었냐? 네가 내 손가락을 자르면 난 네 애미의 팔을 자를 것이고, 네가 내 발가락을 자르면 네 애미의 내장을 끄집어내어 도륙해버릴 것이다. 애비 눈깔을 파내서 네 년 아가리에 처넣겠다. 알아서 사리는 게 좋을 거다. 나는 당한 치욕의 열 배를 되돌려주지 않으면 성이 안 차는 부류이니까.”

    “…….”

    반쯤 게슴츠레 잠긴 눈이 이쪽으로 향했다.

    녀석은 폐에 남은 숨을 쥐어짜내듯이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뭐?”

    “당신은 그럴 수 없어요.”

    데이지가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약해졌다. 제멋대로 지껄이더니 제멋대로 기절한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잡아든 내 손이 수전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심하게 떨었다.

    그녀야 정신을 잃으면 그만일지 모르겠어도 이쪽은 전혀 아니었다. 나의 분노는 이제 검은 화산재를 토해낸 수준이었다. 아직 채 폭발하지도 못한 용암이 식도와 위장을 넘어서 십이지장까지 부어터질 만큼 들어차 있었다.

    “좋아.”

    내가 중얼거렸다.

    “눈에는 눈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꼬맹이.”

    나는 데이지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일어섰다. 열기를 조금이라도 토하지 않으면 당장 윗배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숨을 씩씩거리면서 마차 바깥으로 나갔다.

    한밤이었다. 밖은 완전히 어두웠다. 샛붉은 모닥불이 이곳저곳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레미가 머무는 모닥불이 마차 가까이에 위치했다. 거기로 걸어갔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미리 느꼈는지 제레미는 슬그머니 일어나 있었다. 암살자는 언제 어디서든 인기척을 감지하여 잠에서 깰 수 있다고, 그러니 안심하고 주무시라고 그녀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요, 단탈리안 전하.”

    “애가 깨어났다.”

    “아.”

    제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많이 쇠약해 있겠네요. 바로 꿀물을 먹여야겠어요.”

    “쇠약하기도 엄청나게 쇠약했지. 이 나를 암살하려고 들었으니.”

    “예?”

    내가 코웃음 쳤다.

    “오늘 낮에 일어난 것을 숨기고 내가 마차에서 잠들 때까지 매복했다. 내 품에서 단검을 찾아 꺼내서 여기를 찌르려고 했지. 빌어먹을 년.”

    나는 목덜미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얘기하는 와중에 화는 더 부풀기만 했고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하, 노예각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리 당부했는데.”

    제레미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악독한 아이네요. 전하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요?”

    “처절하게 고문을 퍼부어줄 생각이다. 육체적인 고통을 주진 않겠어. 녀석의 정신머리를 발끝부터 잘게 썰어주어야 이 분노가 풀리겠다.”

    “허면?”

    제레미가 자뭇 흥미로운 어조로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몬스터 고용창.’

    조용히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F급, E급, D급의 몬스터 중에 무엇을 고를 것인지 선택란이 등장했다. 그중에서 D급을 선택했다. 고용 가능한 몬스터가 목록으로 좌르륵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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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스터명(D)]    [체력] [공격]  [방어]  [고용비]

    -고문 슬라임      20    1    2    500골드

    -노움(하급 요정)     7    2    5    500골드

    -고블린 기병      10   10    8    800골드

    -고블린 주술사      5   20    5    1000골드

    -좀비(*)        2    5    5    100골드

    ※마왕 바르바토스(어둠)의 호감도가 50이 되어 특별고용(좀비)이 가능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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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지 금액이 약 구백만 골드라고 떠올랐다. 마왕성을 짓느라 선금으로 오백만 골드를 쏟아부은 탓이었다. 지금쯤 한창 라피스가 라우라와 함께 목공들을 지휘하며 마왕성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겠지.

    나중에 대공들이 보내올 오백만 골드 등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몬스터를 원하는 대로 고용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대부대가 아니었다. 목록에서 오직 하나의 몬스터에만 내 시선이 집중되었다.

    ‘고문 슬라임. 한 마리.’

    정말로 몬스터를 고용하겠느냐는 알림창이 떴다.

    나는 주저없이 '예'를 선택했다. 그러자 내 발앞에서 보라색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투명한 점액질의 괴생물체가 소환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몬스터 중 하나라지만 나와는 인연이 거의 없는 슬라임이 그곳에 나타났다.

    옆에서 제레미가 헛숨을 들이켰다.

    “연금술? 아니, 소환마법……? 게다가 무영창(無詠唱)……?”

    “나의 유일무이한 재주이지. 누구에게도 밝히지 마라.”

    “물론입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이런 한 수를 숨기셨다니…….”

    제레미가 다시 봤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 도대체 몇 개의 발톱을 감추고 계신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군요. 이면의 마왕이라는 칭호는 실로 단탈리안 전하를 위하여 준비된 것입니다.”

    소환마법은커녕 파이어볼 하나도 쏘아내지 못하는 것이 나의 실력이었지만, 상대방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저쪽에서 알아서 착각해주면 나는 편했다. 설명할 방법도 없었고.

    “던전에 죽치고 앉아 한가하게 시간을 보냈을 적에 만든 놈이다.”

    나는 손으로 슬라임을 집어들었다. 투명색 슬라임은 자유자재로 몸을 웅크리거나 퍼트릴 수가 있었다. 내가 마음속으로 명령하자 슬라임은 곧바로 작게 오므라들었는데, 손바닥 하나에 올라올 정도였다.

    “순전히 고문용으로 개발된, 특수한 슬라임이지. 이 아이를 사용한다.”

    “아하. 그렇군요.”

    제레미가 감 잡았다는 얼굴이었다.

    “감히 전하께 자랑해도 된다면 소인은 이 방면의 프로입니다. 슬라임은 기본적이고 또 정석적인 고문 도구이지요. 전하께선 데이지라는 꼬마애를 성적으로 농락하실 계획인 것이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는 입끝을 음흉하게 들어올리면서 눈웃음을 쳤다.

    “소인도 살을 째고 뼈를 깎는 고문보다 이쪽이 더 취향입니다. 하지만, 전하. 그 꼬마애가 함락될까요? 수술할 때 보여준 태도도 그렇고 여간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아아. 여간내기가 아니지.”

    내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다른 방향에서 공격한다.”

    “다른 방향이요?”

    “귀를 가까이에.”

    나는 어떻게 데이지를 고문할 계획인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내 얘기를 들을수록 제레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화했다. 처음에는 아리송한 얼굴이었다가, 기가 막힌 얼굴이 되었고, 종국에는 놀란 얼굴로 바뀌었다.

    “과연. 소인, 진심으로 감탄했어요. 한없이 우아하고 끝없이 마왕답습니다. 오늘 하룻밤에 단탈리안 전하의 여러 면모를 보게 되는군요.”

    “한방에 나가떨어지지 않겠지만 착실하게 정신을 깎아나가겠지.”

    제레미의 귓가에서 얼굴을 때며 말했다.

    “나는 내일 너와 함께 레라지에를 만나러 떠나야 한다. 이 일을 맡아서 처리할 사람이 따로 선별할 필요가 있어. 이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일이 끝나 있기를 빌지.”

    “꼬마애가 지금 기절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제레미가 키득거렸다. 전형적인 악인의 웃음소리였다.

    “그냥 지금 끝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아니야. 자신의 두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하기를 나는 바란다.”

    “단탈리안 전하도 참. 취향도 나쁘셔라……그럼 제가 어디 꼬마애를 깨워보겠습니다.”

    제레미가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이렇게 흥분되는 건 꽤 오랜만이에요. 위대하고 귀족적인 마왕이시여. 오늘밤 안에 끝낼 테니 부디 소인한테 맡겨주세요. 전하께서는 최고급 관람석에서 느긋하게 지켜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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