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80화 (180/510)

00180 동족혐오  =========================================================================

“네놈이 멋대로 토납법을 가르쳐준 건 아니고?”

“아이고, 나 억울해서 죽어불겠네. 형님! 제가 어디 누구한테 심법(心法) 가르칠 짬밥이 됩니까.”

막내 난쟁이가 땀을 뻘뻘 흘렸다.

호흡법은 마나 심법의 첫 단계였다. 방법 자체야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해내느냐 못하느냐는 문제가 전혀 달랐다. 나도 언젠가 라피스한테 무술을 배우겠다며 설친 적이 있었다. 그때 라피스가 호흡법을 수업해주면서 짜게 식은 눈으로,

─ 단탈리안 전하께선 무예와 관련된 것에는 절망적으로 재능이 없으시군요.

하고 단언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얌전히 쇠뇌를 쏘아대는 법이나 연습했다. 정작 내가 뼈빠지게 키워놓은 능력치로 루크는 천재이네 뭐네 찬사를 받고 있었다. 세상이란 부조리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내려치기를 사백 번쯤 하더니 저 혼자서 후욱, 후욱, 하고 숨을 쉬는데 거 소리가 익숙하지 않겠습니까요? 잘 들어보니 이게 제대로 호흡을 하고 있더랍니다. 젠장.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형님은 모를 겁니다.”

“어찌 산구석 꼬맹이가 스스로 심법을 홀로 터득할꼬.”

자크리는 믿기지 않는 기색이었다. 막내 난쟁이가 자기 가슴을 두들겼다.

“아, 제가 아무렴 거짓부렁이를 하겠습니까? 말했지 않수. 형님이 두 눈으로 봐보래도. 이 아우를 족치더라도 나중 가서 족쳐도 되는 일 아니오.”

“레칸의 말이 옳다.”

내가 옆에서 지원사격을 가해주었다.

“이게 진실이라면 적잖게 흥미로운 일 아닌가. 자크리, 자네가 한번 루크를 맡아보게.”

“……알겠습니다. 만에 하나 레칸이 거짓을 고한 것이라면.”

자크리가 막내 난쟁이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엄격하게 군법으로 다스리겠나이다.”

“좋수다. 목탱이를 자르든가 채찍질을 하든가 마음대로 하십시오.”

막내 난쟁이가 호기롭게 받아쳤다.

“하지만 형님도 곧 있으면 저랑 똑같은 심정이 될 겁니다요.”

“흥, 두고 보아라. 나는 천재 따위 믿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크리는 잠시 수뇌부의 일에서 벗어났다.

이처럼 용사 남매 때문에 자그맣게 소란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요컨대 강줄기의 잔물결에 불과했다. 잔물결이 아무리 요란하게 철썩인다고 해도 강은 자기가 가는 곳으로 끊임없이 흘렀다. 꼭 그처럼 우리 일행은 <해방동맹>의 공작 부대로서 계속 나아갔다.

원래 제도(帝道)로 가서 프랑크의 황후에게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일행의 지휘를 휘어잡고 계획을 변경시켰다. 우리는 프랑크의 북부로 향했다.

프랑크 제국 북부는 풍요롭기로 유명하다. 동북부와 달리 개간사업이 상당히 폭넓게 이루어져, 가을이 되면 지평선에서 지평선까지 황금빛 밀밭이 펼쳐진다. 인구도 가장 많다. 프랑크 제국의 젖줄이라 해도 좋겠지.

이 지역에 마왕성이 두 개 있다.

우리는 그들과 협력해서 프랑크의 영지들을 뒤집어버려야 한다. 그들이 바깥에서 공격하고 우리가 안쪽에서 내응하면, 제아무리 강한 영지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레라지에 전하는 평원파의 핵심 간부예요.”

먼저, 서열 제14위의 마왕 레라지에.

“바르바토스 전하, 벨레드 전하, 두 분을 다음으로 레라지에 전하가 강력하지요. 전통적인 강자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보시다시피.”

제레미가 양피지 지도를 보여주었다. 프랑크의 지리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군사용으로나 쓰일 법한 최고급 지도. 최고급 암살대의 대장쯤이나 되니까 구했지 귀족들도 구경하지 못할 물건이었다.

지도에는 잉크로 굵게 십자가 표시가 된 부분이 있었다.

“대부분의 마왕 전하들과 달리 본거지가 이처럼 대륙 한복판에 있어요. 세력을 크게 불리기에는 매우 안 좋은 위치입니다. 후후, 그래서 레라지에 전하보다 서열이 낮은 제파르 전하가 오히려 평원파 내부에서는 발언권이 높죠.”

벨레드 형님은 서열 제13위, 레라지에는 서열 제14위, 제파르 대장은 서열 제16위.

서열로 따지자면 벨레드와 레라지에가 평원파에서 이인자 경쟁을 해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이번 월맹군에서도 그랬고, 이인자 경쟁을 주도하는 마왕은 벨레드 형님과 제파르 대장이었다.

나는 가슴이 불안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이 파벌 내에서 대접받는다. 이런 상황을 순순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으음, 현 상황에 불만이 제법 많겠어.”

“예. 레라지에 전하는 월맹군이 결성되어도 본대에 참전하지 못했어요. 본대가 전방에서 인간연합군과 거하게 치고받고 싸우는 사이, 레라지에 전하는 별동대로서 후방을 교란했지요.”

덕택에 프랑크 제국은 전력을 다하여 월맹군과 싸우지는 못했다. 고작 한 명의 마왕에 불과했지만 서열 제14위이면 최고위 바로 다음이었다. 거느리는 몬스터 군세가 못해도 이천, 삼천에 달했다.

마왕이 지휘하는 아래 수천의 몬스터가 한몸이 되어 후방을 휘젓는 것이다. 북부 일대의 영주귀족들 상당수가 발이 묶인다. 자칫하다 자기 영지가 쑥대밭이 될 판국인데 어느 영주가 섣불리 군사를 차출할까.

레라지에는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해주고 있다.

단지.

“들이는 품에 비해서 공훈은 꽤 적군…….”

“확실히 화려한 면이 부족하죠. 전쟁의 꽃은 역시 회전(會戰)이니까요.”

이거, 지나치게 보답을 받지 못하는 역할이다.

제파르 대장을 보자. 선봉장을 맡아서 검은 산맥을 돌파했다. 여기엔 온갖 찬사가 따라붙을 수 있었다. 월맹군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평원파의 전력을 보여주었다, 명예로운 서전을 장식했다……. 레라지에는 어떠한가?

사실 레라지에는 혼자서 프랑크 북부를 반쯤 마비시켰다. 레라지에한테 붙잡혀서 출병하지 못한 인간군 병력이 적어도 일만오천은 되리라.

무려 일만오천의 병력을 단독으로 감당해낸 것이고, 월맹군 전체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이는 틀림없이 거대한 공로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게릴라 전투.

레라지에의 목표는 전투에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다. 적들에게 '언제 어디서 습격해올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을 심어주어 출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레라지에는 위협사격만 가하고, 인간측은 영지를 지킨다……필연적으로 큰 전투가 발생하지 않는다.

당연히 눈에 띄는 전공도 적어진다.

이래서야 바르바토스 입장에선 레라지에한테 공훈을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한다. 만약 레라지에가 제1공훈자로 책정되어봐라. 당장 다른 마왕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터져나오겠지.

─ 전선에서 소중한 부하를 잃어가며 싸운 우리는 제3공훈자인데, 어떻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마왕이 제1공훈자인가?

─ 이러면 우리가 피땀 흘리면서 싸울 이유가 어디 있는가.

보나마나 이렇게 흘러간다.

물론 마왕들도 알고 있다. 별동대도 본대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것은 별개이다.

자기는 수십 년 넘게 키워온 몬스터를 수백이나 잃어버렸는데, 저쪽은 아무런 피해가 없다. 그런데도 내 공로가 뒤떨어진다고? 대부분은 납득하지 못한다. 전공 분배는 상상 이상으로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다.

“어쩌면 레라지에는 나를 싫어할지도 모르겠는데.”

“어라? 혹시 레라지에 전하와 만나신 적이 있었나요?”

“아니, 초면이나 다름없지만 말이야.”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쪽은 묵묵하게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난데없이 벼락출세한 사람이지 않나. 상대방 입장에서 서운할 수밖에. 자기가 노력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단탈리안 전하께선 누가 뭐래도 가장 큰 공훈을…….”

“이건 이성의 문제가 아니야. 감정의 문제다.”

아마도 레라지에는 그동안 느낀 서운함과 서러움을 나한테 풀려고 들겠지.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다 화풀이하는 격이다. 민폐가 따로없다. 감정의 문제이니까 더더욱 질이 나쁘다.

“바르바토스의 측근이라는 이름값으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볼까 했는데……쓰읍. 호가호위는 불가능하겠어.”

“헤에. 그럼 어쩌죠?”

제레미가 흥미로워했다.

“지금이라도 행로를 남쪽으로 돌릴까요? 프랑크에는 남방에도 마왕성이 있습니다.”

“안 돼. 남방은 북방에 비해서 한참이나 가난하다. 거길 들쑤셔봤자 내전에 심각한 영향이 나오지 않아. 우리는 북으로 향한다.”

“역시. 단탈리안 전하라면 그렇게 나오실 거라 믿었어요.”

제레미가 방실방실 웃었다. 내가 어려운 길을 자처하니까 되레 기뻐하고 있었다.

쯧, 변태적인 여자 같으니라고. 어째서 내 주변에는 정상인이 없을까? 날이 가면 갈수록 변태들만 꼬여든다. 유유상종이란 옛말도 다 쌩구라다.

제레미가 지도에서 다른 곳을 짚었다.

“다음은 로노베 전하입니다.”

서열 제27위의 마왕 로노베.

“로노베 전하는 산악파입니다. 파이몬 전하가 우리에게 협력하라고 미리 명령을 내려두었겠지요. 손쉽게 협력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만 되면 소원이 없겠군.”

아이고, 운까지 지지리 없었다. 하필 두 명의 마왕이 평원파와 산악파에 따로 속했다. 가까울수록 사이가 나쁘다고, 레라지에와 로노베는 서로 견원지간일 가능성이 다대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진작에 버릇이 되어버린 한숨이었다.

이쪽을 질시하는 마왕과 함께해야 하는데다, 상대방들의 관계까지 개선해야 했다. 별로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오늘은 어떻게 해야 두 마왕과 협조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두어야겠다…….

게다가 용사 남매라는 혹덩이까지 있다. 이게 뭔가. 평화로웠던 나날이 격하게 고파진다. 나는 농사나 지으면서 한가로이 살고 싶은데 주변에서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다.

라우라, 잘 지내고 있습니까? 라우라의 귀여운 신음이 벌써부터 그립습니다. 제가 돌아가면 부디 사흘밤낮 화기애애한 시간을 선물해주세요…….

*  *  *

그날 저녁에도 우리 일행은 노숙했다.

결국 자크리는 루크한테 정신이 팔려 하루종일 간부일을 내팽개쳤다. 제레미와 내가 모두를 통솔해야 했는데, 그 바람에 암살대가 점심식사랑 저녁식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쉰 명한테 먹일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생각보다 귀찮았다.

“그 코딱지만한 조루 새끼!”

제레미는 이게 전부 난장이의 간악한 수작이라고 분개했다. 연못처럼 감정이 평온한 그녀로선 드물게 진심으로 화를 냈다. 자크리고 제레미고 평소에는 지독하게 마이 페이스이면서 일단 서로 얽혔다 하면 흔들렸다. 천생연분이로군.

내가 웃으면서 농을 했다.

“야. 나중에 내가 주례 서주랴? 이래봬도 여신님 사제인데.”

“…….”

농담 한번 했더니 진심 어린 살기가 돌아왔다. 쫄았다. 숙련된 암살자의 살기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나는 곧바로 항복하고 저녁식사용 스튜를 받아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죽는 줄 알았네!

스튜와 빵을 헤치우자 금세 주변이 어둑해졌다. 나는 당직병들에게 몰래 일당을 챙겨주고――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숲속의 늑대들과 밤새도록 눈싸움을 벌이지 않겠는가――그네들 어깨를 두들겼다. 당직병들은 무척 황송해했다.

“수고하게. 비록 고루한 일이지만 마왕의 목숨이 자네들한테 달렸네. 오늘 밤만큼은 자네들이 마왕을 지키는 친위대인 셈이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철통처럼 지켜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역시나 용병들에게 돈이란 곧 충성심이었다. 품속에 금화가 한 푼씩 들어가자마자 눈초리부터 싸악 바뀌었다. 말년 병장이 순식간에 신병으로 바뀌는 기적이 펼쳐졌다. 나는 씩 웃어주고 마차로 들어갔다.

“…….”

마차에 데이지가 잠들어 있었다.

소녀의 작은 몸이 구석에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수술이 끝난 지 이틀이 넘었지만 아직 깨어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대로 깨지 말고 영원히 잠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나는 속으로 자조했다.

‘그럴 리가 없지만.’

이렇게 끝장날 아이라면 애당초 용사가 되지 못하겠지. 실없는 희망이었다.

나는 마차에 마련된 좌석 겸 침대에 담요를 깔고 누웠다. 온종일 말을 타고 다녀서 상당히 피곤했다. 폭신폭신한 침대에 눕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멀리 숲속에서 밤새가 울어댔다. 기분 좋은 자장가였다.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기를 바라며 잠에 들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흐릿한 의식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마치 산들바람에 하얀 커튼이 한없이 나긋럽게 펄렁거리듯이. 목소리가 부드럽게 나의 의식을 노크했다.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주변의 어둠과 함께 인영이 시선에 들어왔다.

밤보다 새까만 여자아이가 코앞에 있었다. 소녀는 나의 몸을 깔고 앉았다. 감정이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예리한 것이. 예리한 단검이 이쪽에 향하고 있었다.

머리에서 잠기운이 채 떨어지지 않았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는 가운데, 데이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는군요.”

그녀가 두 손으로 단검을 잡아 나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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