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79화 (179/510)
  • 00179 동족혐오  =========================================================================

    <던전 디펜스> 3권이 출간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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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위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사람은 다름 아니라 용병대장, 자크리였다. 그는 시합이 시작하고 불과 십오 초 만에 정액을 발사했다. 이 기염에는 아무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빠른 수컷>이라는 칭호가 자크리에게 내려졌다. 영광스럽게도.

    다음날, 우리가 마을에서 떠날 때까지도 준남작은 표정이 줄곧 심각했다. 영주가 조용해지자 영지민들이 자발적으로 분위기를 달구었다. 그들은 마을 입구까지 나와서 우리를 성대하게 배웅했다.

    제국로에서 노숙한 지 사흘째.

    “전하. 보통이 아닙니다.”

    자크리가 흥분해서 말했다.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누가 말인가?”

    “전하께서 제게 맡기신 남자애 말입니다. 그런 재능은 여신께 맹세코 평생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 가지를, 열을 알려주면 백 자리를 헤아립니다. 녀석은 무사로 타고난 게 틀림없습니다!”

    매사에 엄숙한 자크리치고는 호들갑스러웠다.

    내가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흐음. 그렇게 뛰어난가?”

    “예. 단순히 천재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합니다. 마치 검술에 통달한 용병이 오랜 시간 무기를 만지지 않았다가 다시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처럼……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것을 하나씩 되새긴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놀랍습니다.”

    나는 루크의 교육을 용병단에 일임했다.

    처음에 용병들은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다. 웬 거지처럼 생긴 남자애를 화전촌 생존자랍시고 데려오더니 검술을 가르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왜 이런 명령이 내려졌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의욕도 생겨나지 않았다.

    “검술이란 게 하루아침에 익혀지는 놀이가 아닙니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거 마왕 전하께서 말씀하시니까 해보죠, 뭐.”

    분위기가 대충 이러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방을 경계하느라 용병들은 심신이 피로했다. 언제 어디서 도적들이 습격해올지 몰랐다. 여기에 생뚱맞게 꼬맹이 교육까지 떠맡게 되었으니, 아마 나한테 직접 불평하지 않았을 뿐이지 무척 귀찮았을 거다.

    첫째 날.

    용병단에서 제일 말단인 난쟁이가 루크를 맡았다. 막내한테 귀찮은 짐을 떠넘긴 것이었다. 명령이 내려왔으니 시행하긴 하겠는데 도저히 납득하진 못하겠다. 그렇게 용병단 나름대로 항의를 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이, 꼬맹이. 어디 한번 휘둘러봐라.”

    막내 난쟁이가 루크한테 검을 던져주었다. 싸구려 목검이었다.

    루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이요?”

    “사내로 태어났으면 제 한 몸은 지킬 줄 알아야지.”

    “에이, 귀찮은데.”

    난쟁이가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곁눈질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쟁이한테서 '이거 진짜 귀찮은데 젠장'이라는 감정이 솔솔 풍겨오고 있었다.

    나는 물에 포도 식초를 타마시면서 빙그레 웃었다. 까라면 까.

    난쟁이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더 귀찮아, 요 맹랑한 짜식아.”

    “저도 귀찮고 아저씨도 귀찮은데 왜 해요? 귀찮아하는 사람이 귀찮은 짓을 해봤자 죽도록 귀찮을 뿐이잖아요.”

    “네놈도 커보면 알겠지만 세상엔 귀찮지 않은 일이 없어. 자고 일어나는 것도 귀찮다, 이 놈아.”

    난쟁이가 루크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예를 들어 늑대나 도적이 확 공격해온다고 해봐라. 어떡할 거냐?”

    “느, 늑대요?”

    남자아이의 뻔질뻔질한 얼굴에 공포가 끼었다.

    “아, 아저씨들이 지켜주면 되잖아요!”

    “물론 지켜줄 거다.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지켜준다고 해서 네가 정말로 안전하리란 보장이 없어. 우리가 늑대를 한 마리라도 놓치면? 그 한 마리가 하필 네놈한테 달려들면? 앙? 그냥 아이고 늑대님, 춥고 배고픈 겨울을 버티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제 가슴살이라도 한점 드십쇼, 하고 잡아먹힐 거냐?”

    “으으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지 루크가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제스처가 무척 풍부한 꼬맹이였다. 보고 있기만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짜샤, 좋은 말로 할 때 배워. 여동생도 아파서 드러누웠는데 여차하면 네가 지켜줘야지.”

    “으……맞아요. 데이지는 내가 지켜줘야지.”

    그제야 할 맘이 들었는지 루크가 목검을 들었다.

    참고로 루크는 우리를 진짜 황제의 군대로 여겼다. 변경을 순찰하다가 우연히 루크네 마을이 습격받는 것을 보고 급하게 도와주었다, 다른 부대가 화전민을 새로운 마을로 인도하는 동안 뒤늦게 발견된 루크를 우리 부대에서 따로 맡는다……그런 시나리오였다.

    황제의 직속 부대가 뭣하러 저딴 촌구석을 돌아다니겠는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이제 열한 살인 루크는 그저 병사들과 함께하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뭐라고 할까. 어린애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라고 해야 하나. 한 살 어린 여동생이 나이를 아득하게 뛰어넘어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분명히 루크의 반응이 당연한 것인데도 도리어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긴 데이지 같은 녀석이 둘이나 되면 그건 그거대로 무섭겠지.’

    자기 살이 파헤치고 심장이 쑤셔지는데도 이를 악 물고 노려보는 데이지였다. 이런 어린애는 세계에 한 명만 있어도 충분했다.

    루크가 어설프게 목검을 휘둘렀다. 생전 처음 검을 쥐어본 게 분명했다.

    “이,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어엉. 위에서 아래로. 그랴, 그렇게. 두 발은 쫘악 벌리고. 옳지.”

    “이렇게요?”

    “오냐. 잘 한다. 그대로 백 번만 내려쳐봐.”

    난쟁이의 목소리에는 귀찮음이 가득했다.

    그는 행군 중간중간의 쉬는 시간에 내려치기 연습을 시켰다.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동작이었는데 문외한이 보기에도 검술의 기본 중 기본이었다.

    뭐,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한다. 느긋하게 내버려두면 되겠지.

    나는 관심을 끄고 자크리와 함께 어디로 행군할 것인지 상의했다.

    *  *  *

    둘째 날이 밝았다.

    나는 특별히 마차에서 잠을 잤다. 마차에는 대(對)마법용 주술이 걸려 있어서, 만에 하나 누군가가 습격해와도 충분히 대항할 수 있었다. 병사들과 동거동락하고 싶었지만 호위상의 문제이니 부디 양해해달라며 자크리와 제레미가 동시에 부탁했다.

    마차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데이지도 있었다. 단, 그녀는 수술이 끝난 이후 한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지금도 마차 한 구석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제레미 말에 따르면 아직 이틀은 더 있어야 깨어난다고.

    마차에서 나오자 일행들은 벌써 아침을 만들어놓았다. 모닥불에 펄펄 끓인 스프였다. 밀가루에 버터까지 발라 제대로 요리했다. 노숙자가 먹는 음식으로는 거의 최고급이었다.

    “내일은 네 년이 요리하는 거다. 알겠는가?”

    “알겠어요, 알겠어. 하여간 고작 스프 하나 끓여놓고는 되게 유세네요.”

    자크리와 제레미가 서로 으르렁거리며 아침을 먹었다. 두 명의 간부는 식사를 어느 쪽에서 맡느냐 따위로도 신경전을 벌였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은 암살대가 아니라 용병단에서 담당한 모양이었다.

    “으이구. 이 화상들아. 그거 물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거 가지고 뭘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어이가 없어서 타박을 주자, 자크리와 제레미가 똑같은 타이밍에 이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심각했다. 천상 험악하게 생겨먹은 자크리와 얼굴 반쪽이 화상으로 짓이겨진 제레미가 그러니까 살짝 무서웠다.

    “송구합니다, 전하. 하지만 이건 난쟁이와 엘프 사이의 문제입니다.”

    “맞아요. 삼천 년 분쟁의 역사가 여기 걸려 있습니다.”

    "…….”

    삼천 년의 분쟁 좋아하시네. 미쳤냐?

    나는 용병대와 암살단을 화해시키는 걸 반쯤 포기했다. 나중에 전투가 일어났을 때 서로 반목하지나 않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었다.

    수뇌부끼리 한자리에 모여 스프를 떠마시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기, 전하. 송구합니다만…….”

    “음?”

    막내 난쟁이였다.

    그는 무척 죄송한 듯이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마왕의 아침식사를 방해하는 것이었으니 그야 죄송스러울 만했다. 자크리가 '아니, 이런 미친 새끼를 보았나?' 하는 시선으로 막내 난쟁이를 노려보았다.

    “레칸. 실성했나? 언제부터 나의 부대가 예의를 땅에 처박았지?”

    “죄, 죄송합니다요, 대장. 하지만 아무래도 빨리 보고드려야 할 것 같아서…….”

    “되었네.”

    내가 한손을 들어 자크리를 제지했다.

    “일단 얘기나 들어보지. 무슨 일인가.”

    “전하께서 맡겨주신 인간 아이 말입니다만…….”

    막내 잔쟁이가 우물쭈물거리며 말했다.

    “그, 소인이 맡을 수 없겠습니다.”

    “아니. 네놈이 정녕?”

    자크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커졌다.

    “제아무리 과외의 일이라도 전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레칸.”

    “대장. 그런 게 아니옵고…….”

    “문답무용이다. 전하께서 너희를 편하게 대해주시니 눈이 삐었나보구나. 감히 마인이 된 자로서 왕께 무례를 범한 죄, 감히 병사가 된 자로서 군기를 망가뜨린 죄. 네놈의 목에 묻도록 하마.”

    자크리가 도끼를 손에 쥐고 벌떡 일어섰다. 아이고야.

    “아, 아. 잠깐 기다려보게, 자크리 대장. 죄는 영원하니 처벌은 언제 내려도 상관없을 터이다. 레칸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항변이라도 들어보세.”

    “……전하께서 그리 명령하신다면.”

    자크리가 입끝을 일그러트리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자크리도, 막내 난쟁이도, 나도 알고 있었다. 전부 연기였다. 여기 용병은 모두 프로였다.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식사 시간까지 방해하면서 보고할 리 없었다. 단지 자크리는 용병대장으로서 규율을 엄격히 세우기 위해 위협한 것이었다.

    “자아. 레칸. 말하라. 왜 루크를 맡을 수 없겠다는 것이지?”

    “성은이 망극합니다, 전하. 단도직입적으로 아뢰겠습니다. 저 아이는 저한테 너무 분에 넘칩니다.”

    “분에 넘친다?”

    막내 난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이. 처음에는 그냥 산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체력이 꽤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꼬맹이 주제에 감이 좋다 싶었지요. 하지만 점점 확신이 들었고, 어제 밤 늦게까지 살펴보고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무슨 결론인가.”

    “전하. 저 녀석은 천재입니다.”

    막내 난쟁이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멋쩍은 기색이었다.

    “아주 가끔 가다 그런 놈이 있습니다. 오직 검을 쥐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놈 말입니다. 저 녀석이 딱 그 짝입니다요. 내려치기랑 비스듬히 내려치기만 가려쳤는데도 벌써 다리와 배, 머리, 팔의 균형을 잡는 법을 깨우쳤습니다.”

    “하?”

    자크리가 인상을 확 찡그렸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어이없어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가, 레칸. 설마 귀찮은 짓 떠맡기 싫다고 거짓을 고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이고, 자크리 형님. 아무렴 제가 실성했다고 그러겠습니까?”

    막내 난쟁이도 답답해하며 말투를 바꾸었다.

    “뭣하면 형님이 직접 손 좀 봐주시오. 나도 아리까리해서 밤새도록 시험해봤다니까요.”

    “몸의 균형은 재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수많은 연습과 훈련을 거쳐서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인간 꼬마가…….”

    “아, 그러니 지금 내가 미친 척하고 전하한테 고했지 않습니까. 저라고 전하의 아침식사를 방해하고 싶었겠어요? 안 그래도 저기서 형님들이 죽여버릴 기세로 절 노려보고 있는데.”

    슬쩍 막내 난쟁이 너머를 바라보니, 공터에 모여 있는 용병들이 하나같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마디 말도 없는 것이 막내 난쟁이가 돌아오기만 하면 몸져 누울 때까지 밟아버리겠다는 기세였다.

    막내 단쟁이가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이것도 제가 축소해서 보고하는 겁니다요. 제가 보기에는 그 꼬맹이……마나까지 호흡으로 돌리는 것 같습니다.”

    “뭐, 마나?”

    자크리의 목소리에서 옥타브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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