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8 악의 꽃 =========================================================================
아마 데이지 혼자 능력치를 계승받지는 않았을 거다. 루크와 데이지, 둘 중 한 사람이 무조건 용사가 되어야만 하는 시나리오상 양자 모두 능력치를 계승했겠지……끔찍했다.
내가 혼자서 웃어대자 제레미가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은 아니었다. 왜 웃는지 자뭇 궁금하나 지금 질문해본들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으니 참겠다, 그런 표정이었다.
“제레미. 이 녀석이 깨어날 때까지 잘 부탁한다.”
“네. 어차피 사흘 정도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거예요.”
“계속 신세를 지는군.”
“아뇨. 전하께서 앞으로 대륙을 얼마나 휘저으실지.”
제레미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걸 상상하면 이 정도는 수고도 아닙니다.”
“자네도 어지간히 변태야.”
“세상에나. 전하께 변태 소리를 듣다니 이만한 영광이 또 있을까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제레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제레미가 호들갑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모든 마왕을 통틀어 제일 성실하시고 착실하시다는 말씀이지요? 예, 물론이지요. 벌써 수십 번은 들어서 소인의 귀에 딱지가 붙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영락없이 여자아이인 바르바토스 전하와 열애하고 계시는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틀림없이 아동성애자가 아닙니다.”
“이 녀석이…….”
“오늘은 또 열 살짜리 인간 소녀와 한 시간 내내 서로를 빤히, 그보다 더 열렬할 수 없게 열렬히 보았어도, 전하께선 결코 변태가 아닙니다. 당연하죠. 어휴. 어찌나 두 사람 시선이 뜨거운지 옆에 있던 제가 화상을 입을 지경이었다니까요.”
반박하려다가 깨달았다. 제레미는 일부러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내 분위기가 지나치게 심각해지자 의도적으로 마음을 풀어주려고 농지거리를 던진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 덕분에 잠시나마 용사한테 달라붙은 주의집중을 풀어재낄 수 있었다.
정식 부하도 아닌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게 했다. 한심하다…….
내가 한숨을 쉬면서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제레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늘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바닥을 기분 좋게 감쌌다.
“아?”
제레미가 놀라서 눈을 활짝 떴다. 그녀는 마약과 환각제에 찌들어 눈이 항상 반쯤 감겨 있었다. 감정이 거의 없는 제레미가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것이 느껴졌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감사를 손바닥에 담아 상냥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의 인생을 지옥으로 떨어트린 것도 노예각인이었어. 너를 진창에 처박게 만든 짓거리를, 나는 너한테 명령하고 말았다. 쓰레기 짓거리야. 너에겐 이제부터 나를 쓰레기라 욕할 권리가 있어.”
“……아뇨, 저는.”
“네가 폐성(廢城)에서 물어본 적이 있었지.”
제레미가 그녀답지 않게 우물쭈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와 처음 만난 날이었다. 그때 폐허에서 노숙했다. 제레미는, 자신은 하급마족으로 태어나서 결국 쓰레기 인생을 살 수밖에 없냐면서, 이 억울한 세계를 당신께서 바꿔주시고 당신께서 왕이 되어주시지 않겠냐고 부탁했다.
“내 대답은 아직도 다르지 않아. 난 너의 불행을 대신해서 짊어질 수가 없다. 제레미. 네가 쓰레기 인생이라면 나 역시 똑같다.”
내가 웃었다.
“그렇지만 옆에서 함께 걷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앞으로 한 세상을 살아가자. 똑같은 쓰레기 동지로서 말이야.”
“…….”
그녀는 라피스의 목숨과 내 목숨을 구했다. 여기에 더해서 용사 한 명을 노예로 만들어주었다. 은혜는 언제고 반드시 갚으리라.
제레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뒤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다음 방에서 걸어나왔다.
* * *
그날 저녁, 준남작령에서 축제가 벌어졌다.
베르시 준남작령은 오늘뿐만이 아니라 벌써 나흘째 축제를 이어갔다. 영주의 종사가 도시에서 먹을거리와 마실거리를 잔뜩 사와서 마을에다 풀었기 때문이다. 고블린 부락을 두 채나 전멸시킨 우리 일행은 당연히 스타로 대접받았다.
지금도 난쟁이들이 광장 한복판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더 이상 술싸움으로는 분위기가 달아오르지 않는지, 난쟁이들과 마을 남자들은 기가 막힌 대회를 열었다. 이건 진짜 광란의 도가니였다.
이른바 베르시 준남작령 공인 <누가 제일 먼저 사정하느냐 대회>.
광장으로 남자들이 일렬로 주르륵 나란히 선다. 그리고 바지를 벗는다. 통째로. 우람한 물건을, 물론 때로는 우람하지 않은 물건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대회의 이름대로……싼다. 누구보다 빠르게 싸기 위해서, 싼다.
이 미친 대회가 자그마치 베르시 준남작의 공적인 허가를 따냈다.
“음. 재미있지 않은가.”
심지어 준남작은 우승자에게 돼지 한 마리를 선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것도 씨돼지를. 남자들이 후끈하게 달아오른 것은 물론이었다. 종족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수십 명의 수컷들이 참여했다. 자신들이 갈고 닦은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겠다며.
대회는 네 번의 예선전과 두 번의 본선전, 마지막 결승전으로 이루어졌다. 지금 광장에서 예선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로라 하는 조루들 열 명이 모였다. 그들은 지극히 심각한 표정이었는데, 일생일대의 위험에 마주한 수달과 같았다.
돼지 한 마리에 눈이 멀어버린 아내들이 응원을 펼쳤다. 그중에는 대회에 나가기 싫다는 남편을 억지로 떠민 아내가 적지 않았다.
“꺄아아악! 여봇! 더 빨리! 빨리 싸란 말이에요!”
“저 남정네는 집안에선 겁나게 빨리 싸재꼈으면서 바깥에선 왜 저런담! 우라질!”
“야, 야! 내 가슴을 보고 얼른 싸란 말이야, 못돼먹은 비실아!”
한 여자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여겼는지 옷가슴을 확 열어재꼈다.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여자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그녀의 남편은 거시기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아내와 남편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크하하! 저거, 아내를 보니까 오히려 쪼는 거 봐라!”
“레이지네 부부의 밤생활이 심히 걱정되는구만! 하하!”
조롱과 야유가 쏟아졌다. 모처럼 큰 마음을 먹고 가슴까지 보여준 여자는 본전도 뽑지 못하고 도망쳤다. 그녀가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구경꾼들이 또 한 차례 웃었다. 웃음소리는 성대한 불꽃놀이가 되어 밤하늘을 맑게 울렸다.
“껄껄껄.”
베르시 준남작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미 술이 많이 들어가서 얼굴이 온통 발갰다. 준남작은 근엄하고 엄격한 영주였지만, 영지민들의 일상을 머리가 아니라 살갗으로 이해하는 자였다. 이런 영지귀족에게 통치받는 것은 행운이리라.
“그럼 내일 떠난다는 말인가?”
“예. 영주님의 의뢰도 완수했으니 말입니다.”
“안타깝군.”
준남작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대들 덕분에 겨울을 무사히 났다. 고블린 부락까지 토벌해주었지.”
“모두 여신께서 인도하신 바입니다.”
“후후, 여신인가…….”
그가 포도주 뿔잔을 들었다.
“본인은 어떤 신도 섬기지 않는다. 흉년이 들어도, 전염병이 들어도, 아무리 애원해도 신들은 우리 인간을 돕지 않았다. 굶주림은 결국 인간의 굶주림이며, 뼈를 깎는 아픔도 결국 인간의 아픔이었다. 신은 굶주리지도 아프지도 않은 게야…….”
베르시 준남작이 포도주를 한번에 들이마셨다. 이 시대에 성실한 영지귀족으로, 그것도 자그마한 영지의 주인으로 살아가려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겠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진지하게 자청하는 순간 영지귀족은 순식간에 3D 업종으로 변해버린다.
정치, 군사, 외교, 경제, 재판, 기록, 결혼, 건설 등등, 모든 것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촌장이나 지주가 도와준다고 해도 결국은 영지귀족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근처 대귀족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물론이요, 근처 소귀족과 협력하거나 다툰다.
“한번도 배고파본 적도 아파본 적도 없는 신들께서 어찌 인간을 동정하겠는가?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은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옳습니다.”
난 마왕이라서 늙어죽을 일은 없지만.
준남작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기하군. 본인은 방금 신성을 모독했다네. 분하지 않은가?”
“인간이 입에 담는 신성도 다만 인간의 신성일 따름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칭송하고 애원해도 신께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욕할지언정 신께서는 분노하시지도 않겠지요.”
나는 두 손을 잡고 기도문을 외듯이 중얼거렸다.
“신들이시여. 바라건대 그곳에 그냥 가만히 계소서. 우리 인간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하겠나이다.”
베르시 준남작은 한방 먹었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맞는 말일세. 본인이 한 말에 본인이 걸려 넘어진 꼴이로군. 그래, 우리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해서 건배하지! 여신을 위하여!”
“여신을 위하여.”
우리는 뿔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광장 한가운데서도 환호성이 유독 크게 터졌다. 예선전을 통과한 선수들이 정해졌다. 저 대회의 악랄함은 예선전, 본선전, 결승전까지 총 세 번이나 자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저런 대회를 떠올렸는지 감탄스러웠다.
준남작이 미소를 머금고, 하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쟝 볼레 사제를 보고 본인 생각이 많이 바뀌었네.”
쟝 볼레는 내 가명이었다.
“신과 상관없이 사제는 세상에 희망을 안겨줄 수가 있었어.”
“과찬이십니다.”
“아니, 전혀 아닐세. 자네는 벌써 수백 명의 영지민에게 희망을 주었네. 나에게도.”
쟝 볼레가 사실은 마왕 단탈리안이며 수십수백만의 인간을 공포와 절망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라는 것을, 아마 눈앞의 귀족은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 그게 재밌었다.
“게다가 고블린들에게 짓밟힌 마을의 생존자까지 거두었다지.”
루크와 데이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예. 저의 양자와 양녀로 기를 셈입니다.”
“양자와 양녀로?”
준남작이 또 한번 놀랐다.
화전민은 농노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반면에 사제는 계급 피라미드의 정점을 차지한다. 가장 고귀한 자가 가장 비천한 자를 가문으로 받아들인다니 놀랐으리라.
“아니, 그들은 화전민이 아닌가. 몸종으로 들여도 충분한 선행이거늘, 꼭 양자로 거두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준남작 각하.”
내가 빙그레 웃었다.
“신들의 일이 결국은 신들의 일이듯이, 인간의 일 또한 결국은 인간만의 일입니다. 사제라느니 귀족이라느니 노예라느니, 인간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경계선을 신들께서는 알지 못하십니다.”
“…….”
침묵이 찾아들었다.
준남작의 눈동자에서 취기가 사라졌다. 평소처럼 진지하고 근엄한 귀족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한껏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황태후 폐하께서 지지하신다는 공화주의인가?”
“아니요. 아마도 폐하께서는 귀족 계급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아니하고, 사는 대로 생각하기 마련이지요.”
“……오늘 얘기는 듣지 못한 걸로 하겠네. 자네도 내 신성모독을 넘어가주었으니.”
역시 베르시 준남작은 선량한 인물이었다.
“각하께서 신을 믿지 않는다면 계급 역시 믿지 않으셔야 합니다. 계급이란 신이 정해놓은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니까요.”
“…….”
준남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로 만족했다. 준남작은 삶을 진지하게 사는 인물이었다. 내가 이 자의 머리에 심어놓은 의심의 싹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라나서 언젠가 개화해버리겠지…….
프랑크 내전은 한두 해로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십 년이 넘도록 이어질지 모른다. 그때 베르시 준남작이 공화파에 가담한다면 나로서는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성실한 귀족들한테 차근차근 밑작업을 깔아두는 것 역시, 내가 이번 여정에서 스스로 맡은 임무였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귀족이란 것에 대해서, 부디 열심히 의심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