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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77화 (177/510)
  • 00177 악의 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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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수술이 순조롭게 이어졌다. 데이지는 더 이상 괴롭게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정신을 잃지도 않았다. 이따금 짐승 소리 같은 신음을 흘려내기만 했다.

    “크, 으.”

    이빨이 그녀의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찢어져서 새빨간 피가 흐르는데도 정작 데이지 본인은 몰랐다. 격통이 지나친 탓이었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아픔보다 수술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압도적으로 강하겠지.

    방이 조용해졌다.

    제레미가 언제 떠들었냐는 듯 침묵했다. 차분하고 말없이 수술이 진행되었다. 그동안, 데이지와 나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우물처럼 깊은 눈이었다.

    하수도 역류하듯이 맨 밑바닥부터 원한이 토해지고 있었다. 나는 기꺼이 데이지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지금까지 내 눈동자는 몇 개의 수라장을 담았다. 원한 몇 방울이 더 들어온다고 해서 넘칠 구석도 없었다. 그녀와 나는 수술이 끝날 때까지 서로를 마주보았다.

    “……다 끝났습니다. 단탈리안 전하.”

    제레미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데이지의 가슴을 봉합하고 식초에 절인 수건으로 소독했다.

    “이제 이 아이는 전하의 노예입니다. 무엇이든 명령하세요.”

    “나에게 해를 입히지 마라. 내가 친애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를 입히지 마라. 나와 그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코 외면하지 마라.”

    나는 그녀의 눈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나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며, 너의 생명보다 나의 생명을 우선하라. 이것이 내가 네 년에게 내리는 첫 번째 명령들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네 년은 첫 번째 명령들을 철두철미하게 지켜라.”

    “……예.”

    예, 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이지가 고개를 떨구었다. 소녀는 눈을 뜬 채로 기절해버렸다.

    「데이지를 노예로 종속시켰습니다!」

    「당신은 호감도와 상관없이 노예의 상태창을 완전하게 열람할 수 있습니다. 노예의 상태창에 '종속도'가 추가로 생성됩니다.」

    「극악의 종속도!」

    「강력한 마법각인에 의해 종속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당신을 전혀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극악의 종속도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효과음과 함께 홀로그램 알림창이 떠올랐다.

    “흐.”

    우스웠다. 라우라를 부하로 영입할 적에는 곧바로 지고지순한 충성이 달성되더니, 이제는 데이지를 노예로 종속시키니까 곧바로 극악의 종속이란 게 생겨났다. 나에겐 언제나 극단적인 것밖에 일어나지 않는군.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한테 반항하지 못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나머지 문제는 차근차근 해결해나가자. 프랑크에 내전을 일으키기 위한 여정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시간은 넘쳐나도록 많다.

    알림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노예를 획득하였습니다. 노예에 한해서 '조교'란이 활성화 됩니다.」

    「데이지의 반발각인(Lv.3)이 올랐습니다!」

    「데이지의 고통각인(Lv.3)이 올랐습니다!」

    「데이지의 치욕각인(Lv.1)이 올랐습니다!」

    ……이건 또 낯선 알림창이었다.

    던전 어택에는 NPC를 노예로 종속시키는 기능이 없었다. 조교란이라니? 처음 보았다.

    게임에는 전혀 없는 기능을 목격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퀘스트 깨부수기였다. 아무래도 용사와 마왕의 입장이 달라서 차이가 빚어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나중에 천천히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수술의 최대 공훈자를 칭찬할 때였다.

    “수고했다. 제레미.”

    내가 제레미의 어깨를 두들겼다.

    “과외의 일로 고생을 시켰군.”

    “별 말씀을요. 저희는 전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고용되었습니다.”

    “아니. 내가 보상을 내리고 싶다.”

    수술이란 시술자에게도 지독하게 피로를 강요한다.

    더군다나 심장에 마법각인을 새기는 고도의 묘기이다. 어중이떠중이가 해낼 만한 수술이 아니다. 직접 수술을 당해보고 여러 번 해보기도 한 제레미라서 가능했으리라.

    “포션, 만드라고라, 향초, 수술도구까지 전부 네가 준비했다. 이런 인력을 공짜로 부려먹어서야 내 명예만 손상될 뿐이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주겠다.”

    제레미가 턱에 손을 괴고 고민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소인이 분수 넘치는 소원을 한 가지 드려도 될까요?”

    “아아. 아르테미스 여신께 맹세하건대.”

    내가 사제처럼 두 손을 잡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푸흡. 저, 전하. 정말로 신전 사제에 어울리세요.”

    “내가 마왕만 아니었으면 대사제장이 되었을걸.”

    제레미가 유쾌하게 웃었다.

    열 살 소녀의 피로 흥건하게 젖은 밀실에서 한 쌍의 남녀가 키득거렸다. 어느 쪽이든 제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두 사람 모두 겉으로만 웃을 뿐이지 감정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제레미가 말했다.

    “단탈리안 전하. 이 여아가 누구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음. 혹시나 돈을 바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나는 방구석의 탁자에서 포도주잔을 가져왔다. 사방에 배어든 향초 냄새 때문에 포도주맛이 영 쓰게 느껴졌다.

    “소인은 전하께서 월맹군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다시피, 그때 소인은 평생 손 꼽을 법한 쾌감을 느꼈어요. 전하께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무엇을 노리시는지. 그거야말로 소인에게 제일 강한 호기심입니다.”

    그렇게 궁금했는데도 제레미는 여태껏 얌전했다.

    화전촌을 습격했을 때도, 화전민을 겁박했을 때도, 루크를 꾀어냈을 때도, 제레미는 단 한 마디의 의문도 입에 담지 않았다. 내가 명령하는 대로 행동했다. 호기심을 억누른 것이었다. 질문하는 것을 주제에 넘는 짓이라 생각하고.

    나에게 권리를 얻은 다음에야 질문했다. 언제 물러서야 하는지, 언제 다가올 수 있는지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실로 프로다웠다. 마계 제일의 암살대라는 간판은 헛것이 아니었다.

    “좋다. 제레미, 지금부터 네가 듣는 것은 극비 중 극비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언제 어디서도 발설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용사(勇士)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제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들었다. 수술에 사용한 환각제 분말을 그대로 파이프에 짓이겨 불을 지폈다.

    “예. 황송합니다만, 마왕을 참살한 자에게 붙는 칭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 여자아이와 그 오라비는 용사가 될 인간이다.”

    “호오.”

    제레미가 위쪽으로 연기를 후욱 불었다. 얼굴 반쪽이 화상으로 지져진 그녀가 다소곳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디에서 얻으신 정보인지……그것까지 소인이 알 수 있을까요.”

    “예언이라고 하면 믿겠는가?”

    “물론입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제레미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포도주 한 모금을 입구멍에 털어넣었다.

    “마왕을 한두 명 참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마왕이 목숨을 잃었겠지……나는 그것을 막고자 여기 프랑크 제국에 왔다.”

    “확실히 괴물 같은 마력을 품고 있어요.”

    제레미는 그녀 나름대로 무언가를 납득했는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걸로 흥미가 해결된 것 같았다. 아니. 다른 곳으로 관심이 옮겨간 것처럼 보였다. 질문을 마구마구 해올 줄 알고 조금 각오하고 있었는데…….

    뭐, 그녀가 알아서 납득했으면 이쪽에서 간섭할 이유가 없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엉망진창으로 더럽혀진 나무침대, 발갛게 달아오른 소녀의 나체가 힘없이 구속되어 있었다. 수술 내내 어찌나 사지를 뒤틀어댔는지, 수갑이 차인 손목은 아예 살갗이 벗겨졌다.

    ‘상태창.’

    띠링, 하고 더럽게 유쾌한 효과음이 울렸다.

    눈앞에 지금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상세하게 상태창이 표시되었고――나는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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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데이지

    종족: 인간   주인: 단탈리안

    속성: 중립(0)

    레벨: 1    명성: 1

    직업: 모험자(-), 검사(-)

    통솔: 9/100  무력: 13/140  지력: 13/125

    정치: 9/95   매력: 10/100  기술: 8/81

    호감도: 0

    종속도: 0

    *칭호: 1. 전설의 모험자(-) 2. 전설의 용병(-) 3. 던전 브레이커(-)

    *능력: 전술(-), 검술(-), 작전술(-), 설득(-), 기마술(-), 원소마법(-)

    *스킬: 의용병(-), 천리행(-), 필살무효(-)

    현재심리: 호감도와 종속도의 영향으로 인해 표시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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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문이 막힌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머리 꼭대기부터 핏기가 싸악 빠져나갔다. 온몸이 순식간에 석화하는 기분이었다.

    이 능력치를, 나는 본 적이 있었다.

    아니다. 단지 본 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익숙했다. 능력치들과 칭호들, 능력들 그리고 스킬들……모조리, 전부 나에게 익숙할 대로 익숙해서……충격에 나의 팔다리가 마비되었다.

    ‘이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팬사이트 사상 처음으로 일흔두 개의 던전을 공략하고. 대마왕의 히든 던전을 찾아내어 바알을 차단하고. 수천 번이 넘는 실패를 극복하고, 십수 번의 회차 플레이를 거듭하여, 인간계의 군주들에게 문두스(Mundus)라는 성을 내려받은 자.

    ‘이건 내 캐릭터의 능력치다.’

    유일한 자랑이었고 유일한 긍지였던 것.

    내가 피땀으로 가꾸어낸 캐릭터의 능력 한계치와 스킬, 능력, 호칭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상태창을 보다 세세하게 열어재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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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

    1. 전설의 모험자(-). 직업(모험자) 계열의 최상위 호칭. 세계의 모든 모험자를 대표한다. 그가 공략하지 못하는 던전은 없으며, 그가 물리치지 못하는 몬스터는 없다. 현재 활성화 되지 않음: 레벨업 시 [무력] 능력치 +6, [지력] 능력치 +1, [매력] 능력치 +4, 직업 [모험자] 레벨 성장 속도 x4

    2. 전설의 용병(-). 직업(용병) 계열의 최상위 호칭. 세계의 모든 용병을 대표한다. 그의 소집령에 응하지 않는 용병은 없으며, 그가 섬멸하지 못하는 군대는 없다. 현재 활성화 되지 않음: 레벨업 시 [통솔] [무력] 능력치 +6, [정치] 능력치 +2, 직업 [용병] 레벨 성장 속도 x4

    3. 던전 브레이커(-). 모든 던전을 공략한 용사에게 내려지는 칭호. 현재 활성화 되지 않음: 던전에서 전투에 돌입할 경우 [통솔] [무력] 능력치 140%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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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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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킬]

    *의용병(-). SS급 범위 강화계 액티브 스킬. 현재 활성화 되지 않음. 본인 제외, 자신이 소속한 부대의 아군 전원에 대하여: 공격력 140% 효과, 방어력 140% 효과, 부상에 의한 공격력 및 방어력 저하 무효

    *천리행(-). SS급 개인 강화계 액티브 스킬. 현재 활성화 되지 않음. 자신에 대하여: [통솔] [무력] 능력치 140% 효과, 병종 패널티 및 지형 패널티 무효

    *필살무효(-). SSS급 개인 강화계 패시브 스킬. 현재 활성화 되지 않음. 자신에 대하여: 적의 스킬에 피격되었을 경우, 최대 피해치가 잔존 체력의 50%를 초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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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것 모두, 극악의 난이도를 감내해서 성취한 것들이었다.

    예컨대 칭호 <던전 브레이커>는 스킬 <천리행>과 맞물려서 돌아갔다. 캐릭터의 무력이 100이라고 해보자. 이 캐릭터가 던전 내부에서 싸운다면, 칭호 <던전 브레이커> 덕분에 무력이 140으로 상승하고, 스킬 <천리행>까지 중복되면 196으로 상승한다. 능력치가 두 배나 뻥튀기되는 셈이다.

    어떤 호칭을 얻어야 최고의 효과가 생겨나는지. 어떤 스킬이 중복되어야 최적의 효율을 얻어내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겨우 만들어낸 결과였다.

    용사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될 뻔했던 것만 해도 아찔했는데…….

    ‘이제는 아예 내 플레이 데이터까지 계승하시겠다?’

    나는 자조할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하.”

    아무래도 이 세계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빌어처먹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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