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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76화 (176/510)

00176 악의 꽃  =========================================================================

“존명.”

제레미가 뿔모양으로 된 술잔을 들었다. 거기에는 만다라케 분말을 섞은 포도주가 담겨 있었다. 만다라케, 흔히 만드라고라라고 불리는 식물에 환각을 일으키는 성분이 있었다. 그걸 분말로 정제해서 포도주에 타서 마실 수 있게 해놓았다.

이 세계의 연금술사들이 가장 짭짤하게 벌어들이는 품목이라던가. 미약으로 써먹을 수도 있었고, 당연하지만 마취제로 써먹을 수도 있었다. 아마 제레미는 포도주에다 분말을 꽤나 많이 탔을 것이다.

“읍……우우욱.”

데이지가 괴로워하며 포도주를 마셨다. 마셨다고 표현해서 좋을지 모르겠다. 절반은 입술에 들어가지 못하고 턱선을 따라 옆으로 주르르 흘렀으니까. 제레미가 그 모습을 보면서 헤실거렸다.

“이거 마취제인데, 마시지 않으면 그쪽만 아플 거예요?”

“…….”

“생살이 찢어지고 피가 끝없이 흘러요. 전 책임지지 않습니다.”

데이지가 제레미를 무표정하게 노려보았다. 입에서 흘리는 액체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래도 이미 데이지의 위장은 한계선을 아득하게 넘어섰는지, 도저히 포도주를 다 받아내지 못했다. 뱃속에 들어간 포션의 양을 생각하면 벌써 토하고도 남았다.

다음으로 제레미는 향초를 켰다. 연한 잿빛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 참. 정말, 복 받은 줄 알아요. 제가 어릴 때는 이런 것도 없었어요.”

대여섯 개의 향초는 침대를 둘러쌌다. 이것 역시 환각제이자 마취제 역할을 한다고 하는데, 마계의 대규환지옥에서만 나는 약초로 만들었다고 한다. 제레미가 촛불을 키면서 투덜거렸다.

“시술하다가 쇼크로 죽으면 그냥 끝장이었습니다. 제 동기들은 여섯 명 중에 절반이 암살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전에 골로 갔다구요. 어휴……이게 대체 얼마람?”

성대하게 궁시렁거리고 있었지만 별다른 감정이 전해오지 않았다.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한 암살자였다. 어쩌면 제레미가 언제나 과하게 웃고 과하게 표정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잃어버린 감정을 겉모습으로나마 재현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

나는 포도주를 들이켰다.

고블린 부락을 두 개나 토벌하고 돌아오자, 준남작은 우리를 더더욱 특별하게 대접해왔다. 이것은 진상품으로 받은 포도주였다. 달콤하기 그지없어야 할 명주가 지독하게 쓰게 느껴졌다.

이제부터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눈앞에서 해부된다. 심장을 드러낸다. 오직 나의 노예로 만들어지기 위하여. 단지, 어쩌면 미래에 나를 위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 미친 짓거리였다.

아니다.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다!

여기는 <던전 어택>이 그대로 옮겨진 세계이다……누구보다도 용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저 아이는 용사가 되도록 결정되어 있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죽었는데도 퀘스트가 깨지지 않은 것을 보아라. 운명이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고 뭔가!

최소한의 안전장치, 그렇다. 이건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저기, 단탈리안 전하?”

“……아아.”

생각에 잠긴 탓인지 대답이 늦어졌다. 향초의 기기묘묘한 냄새가 콧구멍을 아예 회칠하고 있었다. 향초의 효과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퍼득 정신을 차리자, 제레미가 손에 수술용 칼을 들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수술이 시작되어 있었다.

“으……하, 으읏…….”

침대에 묶인 데이지가 신음을 연거푸 흘렸다. 맨살이 붉게 갈라져 있었다. 앞을 뚜렷하게 바라보던 눈동자가 흐리멍덩하게 갈피를 잃었다. 입가에서 침이 대량으로 흘렀다. 소녀는 자기 몸의 제어권을 완전히 잃었다.

향초의 연기가 매서운 가운데 제레미만 평소와 다름없이 태평했다.

“이거 꽤나 강력한 환각제이기도 합니다. 면역이 없으면 힘들어요. 마왕이시니 후유증은 남지 않겠지만요. 여기까지 지켜보셨으면 충분하니까, 이만 나가보시는 것은 어떨지요?”

제레미의 목소리가 멀리서 울려왔다. 물고기가 퍼덕이는 것처럼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조차 아주 약간 먼 곳에서 들려왔다.

“아니다. 끝까지 지켜보겠다.”

그것이 나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어도 지금 여기서 나가버리면 안 된다, 하고 강하게 확신했다.

제레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등을 돌렸다. 수술용 칼이 움직였다.

“하, 으…….”

“와아. 전하, 이 아이 장난이 아닌걸요? 마나가 포션 때문에 발현하고 있는데 엄청 짙어요. 아니, 이렇게 마나가 짙은 애는 처음인데……거의 괴물이네요. 세상에나.”

“크……으윽, 하크읏…….”

“어린애 주제에 벌써 마나에 의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주인을 보호하려고 하잖아요. 와아, 미쳤어요. 정말로 타고난다는 게 있었군요. 어디 마탑(魔塔)의 영감탱이들이 보면 눈이 발칵 뒤집히겠네. 당신, 뭘 먹고 자랐길래 이래요? 저도 떡고물 좀 얻어먹고 싶은걸요.”

제레미가 뭐라고 계속해서 떠들었다. 아마도 데이지가 정신이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일부러 말을 거는 것이리라. 입이 분주하게 떠드는 것과 반대로 제레미의 손은 정확하고 신중하게, 소녀의 살을 자르고 헤집었다.

“마나 덕분에 전염병은커녕 잔병치레도 없었겠네요. 살도 뽀얗고. 하지만 안 됐어.”

말과 손짓이 저마다 다른 리듬으로 흘러갔다. 눈앞에서 시간이 마치 무성영화처럼 기이하게 흘러갔다.

“지금만큼은 마나를 천성적으로 품고 태어난 걸 후회하세요. 그것 때문에 수술이 엄청나게 어려워지고 있으니까요, 후후. 정신 바짝 차리세요. 자칫하다 정말 죽을지도 모릅니다.”

소녀의 새하얀 살결에 지나치게 짓붉은 액체가 범람했다. 데이지는 이제 숨쉬는 것마저 괴로워하고 있었다. 폐부에서 끊임없이 신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흐크으읏, 으, 아……흐아아악! 아악! 흐, 카…….”

비명이 귓가에 크게 울렸다. 하얀 살, 붉은 덩어리, 자욱한 연기, 지나치게 강렬한 향내와 거기에 희미하게 뒤섞인 피냄새…….

소녀가 극심하게 괴로워하는 광경에 느껴진 것은 동정심이 아니었다.

다만 기이했다. 기괴하고 이상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호크 대장, 잭 올란드, 리프,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모두가 신음과 고통에 허우적거리며 죽었다. 왜 사람은 고통스러워 하는가? 왜 조금 더 깔끔하게……그러니까, 조금 더 보기 좋게 고통을 당할 수는 없을까. 왜 하필 고통인가.

사고가 점점 둔해졌다. 머릿속이 아찔했다. 향내가 두개골까지 스며들었다.

왜 나를 죽이려 드는가? 나는 그대들한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마왕이란 이유만으로 죽어야 한다니 농담이 아니다.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란 말이다. 내가 먼저 죽일 수밖에 없게 만들지 않는가. 왜 전부 책임져야 하는가? 왜 내가 자초하지 않은 것까지 내가 전부…….

“끄, 하아아악!”

그러니까 입 좀 닥쳐라, 잭. 생살이 조금 태워진다고 해서 남자가 너무 소리를 지르고 있잖냐. 난 허벅지에 화살이 박혔을 때도 이를 악 물고 모험자들한테 구걸했다. 머리를 써라. 필사적으로 생각해라.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 새끼 콧등을 후갈긴다.

“악마 새끼……!”

아니, 단순한 비즈니스이다. 단지 모든 비즈니스가 그러하듯 불공평할 따름이다. 너도 이제는 그걸 이해하겠지.

메모리아 마법의 건은 훌륭했다. 한방 먹었다. 파이몬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고작 애송이, 던전 어택에 등장하지도 않는 무명 상인 때문에 몰락했을 거다. 우리는 멋진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끄으윽……크릅, 우윽, 우웨에엑……!”

“토하지 마요! 삼켜요! 빌어먹을 포션을 삼키란 말이에요! 그거 지금 토하면 당신 십중팔구 뒈져버려요. 알겠어요? 죽기 싫으면 삼켜요.”

“크프르흡……끄읍, 끄으읍…….”

대충 몇 명이 죽었지? 십만 명? 검은 산맥에서 대략 이천 명……글쎄, 그쯤은 될 것 같은데.

아무튼 오크 새끼들은 더럽게 많이 처먹는다. 수천 명의 시체를 훈제구이로 만들어도 금세 동이 난다. 가끔은 귀여워도 대체로 빌어먹을 놈들이다. 속전속결, 몬스터는 빨리빨리 죽어주는 편이 전쟁에 이롭다. 반면에 인간은 다르다…….

“염병할!”

바르바토스가 옳게 지적했다. 염병할 짓이다. 인간군에게 병사는 단지 병사가 아니라 영지민, 즉 노동력이다. 노동력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다. 엘리자베트 황녀의 측근이라든지 뭐 그런 비슷한 배역에 당첨되었다고 해봐라. 지금보다 골을 싸매겠지. 최하위 마왕이래도 아무튼 마왕이 되어서 다행일지 모른다…….

십만 명은 죽었다.

십만 명이면 거의 세계이다.

“흐끄아아아아악――!”

그러니까, 내 마음은 앞으로도 언제나 십만 명의 세계보다 약간 더 크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어휴, 눈 뒤집혔네. 야! 야! 정신 차려! 죽고 싶어? 네 뒈지기 전에 내가 먼저 칼빵 넣어줄까, 씹년아? 개 같은 년아, 눈 떠! 눈 떠! 네 년 죽으면 오라비인가 뭔가 하는 꼬맹이 새끼도 죽는다. 네 부모 씹새끼도 뒈진다고. 시발, 야!”

그런가.

왜 데이지를 살려야겠다고 강렬하게 느꼈는지 알겠다.

그녀가 나와 똑같은 족속이 되기를 바란다. 나와 똑같은 처지에 처하기를 바란다. 쓰레기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있으면 서로를 위안할 수 있으리라.

나는 누군가를 위안하고 싶어진 것이다. 선배가 되어, 부모가 되어, 누군가를 위안해주고 이끌어줄 수 있을 만한 강자(强者)가 되기를 원했다.

어느새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 쓰레기가 아니고 뭔가.

나와 같은 족속을 보아서 위안을 해주다니――무슨 소리인가. 내 안에는 호크 대장이, 잭 올란드가, 리프가,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십만의 인간이 십만의 사정으로 들어 있다――그들이 나에게 위안을 받아야 한다고? 살인된 자가 살인범에게?

웃기지 마라.

변명보다 더 저질스러운 변명이다. 귀족이 농노를 동정하는 것과 뭐가 다르다는 말이냐. 너는 살아남는 대신 차라리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너는 자살하지 않았다.

“단탈리안 전하?”

내 몸이 어느새 일어서서 제레미의 옆에 섰다.

눈앞에 소녀의 나신이 그대로 늘어졌다. 처참하게 파헤쳐진 살갗, 희여멀겋게 뻐끔거리는 속살, 핏물, 너무나 많은 핏물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 소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

데이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눈빛이 순식간에 거세졌다.

시종일관 덤덤하고 무표정했던 소녀의 시선에 맹렬한 분노가 섞여들었다. 자신에게 지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주는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겠지.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내가 그녀의 원수라는 것을 알았으리라.

내가 싸늘하게 웃었다.

“겨우 이 정도로군.”

“…….”

“잘나게 떠들어대서 얼마나 강한가 싶었더니 고작 수술 하나를 버티지 못하는가. 결국 열 살짜리 여자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네 녀석은 네 오라비와 부모, 마을사람, 전부 합쳐봐야 서른 명쯤 되는 인간도 짊어지지 못한다.”

데이지가 입술을 열었다.

숨소리처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갓난아기처럼 몇 번을 옹알거리더니, 몇 번이나 실패한 다음, 간신히 문장을 소리내어 말했다.

“당신을……죽여버리겠습니다.”

“…….”

“맹세코.”

나는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향초에 쩌든 뇌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그렇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렇게나 명백한 적의였다!

십만 명을 살해한 자에게는 마땅히 십만 명의 적의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내가 죽였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에게 복수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쓰러졌다. 너무나도 불공평하지 않은가.

“부디 열심히 죽여주시게나.”

내가 십만 명을 죽였다면 너는 십만 명보다 더 무거운 의지를 갖추어라.

나는 앞으로도 십만 명을, 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너는 그 광경을 옆에서 빠짐없이 지켜 봐주어야겠다. 나에게 살해된 자들은 너무나도 약하고 무지하여 도저히 나한테 대적할 수 없으니, 너가 살해된 자들 한명한명을 대신해라.

“나는 너를 옆에 놔두기를 원한다.”

너를 볼 때마다 내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떠올리게 될 테니까.

내가 한 짓에서, 나의 인생에서 도망치지 않도록. 위안이라느니 동정이라느니 하는 도피처를 찾지 못하도록.

“너는 나의 영원한, 산 증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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