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75화 (175/510)
  • 00175 악의 꽃  =========================================================================

    흑사병이 대륙을 휘몰아치자, 각국의 군주는 병사를 소집.

    전염병에 민심이 흔들리기 전에 칼끝을 마왕들을 향해 돌린다. 열두 국가의 군대가 마왕 타도를 부르짖으며 진군한다. 이에 서열 제49위 마왕 크로셀이 패사(敗死)한다. 마왕들은 경각심을 느끼고 대대적인 반격을 천명. 연맹군을 결의한다.

    마왕군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인간군을 격파. 앙리에타 여왕이 이끄는 브르타뉴군이 전멸하고, 엘리자베트 황녀가 이끄는 합스부르크군은 수도까지 내어주며 후퇴하기에 이른다…….

    “좋아. 네놈들이 그리 바란다면 대륙 정벌은 뒤로 미룬다! 그 전에, 세상에 존재하는 쓰레기 새끼들을 청소해주지.”

    마왕군의 최선봉을 자처하던 평원파의 우두머리,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가 적군을 지나치게 깊이 추격하다가 패퇴. 바르바토스를 필두로 평원파는 월맹군에서 사실상 이탈한다.

    대륙력 1507년.

    평원파가 합스부르크 중북부 일대를 점거한다.

    바르바토스는 영리하게도 마왕이 직접 영토를 통치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황태자 루돌프, 그 시체를 흑마법으로 조종하여 앞세운다.

    루돌프 황태자가 선언한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는 첫 번째로 아비와 형제를 죽인 희대의 패륜아요, 두 번째로 수도와 신민을 버린 폭군이요, 세 번째로 제국 그 자체를 멸망시킨 역적이다. 세 개의 대역죄를 범한 마녀에게 영원한 저주가 있기를!”

    수천 명의 인간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불타버린 황궁.

    앙상하게 뼈대밖에 남지 않은 그곳에서 루돌프 황태자는 번듯하게 화려한 제복을 입었다. 휘황찬란하게 붉은 복장이었다. 이미 멸망해버린 제국의 황궁에서 황태자가 입은 옷이 기괴하게 빛났다.

    “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당한 황위계승자이자 수호자로서 천명하노니. 오로지 본인만이 제국을 통솔할 자격이 있으나, 불운하게도 대지에 만연한 역도를 토벌할 힘은 없구나. 이에 본인은.”

    황태자가 두 손으로 은관(銀冠)을 집어들었다.

    “수호자로서의 의무, 역도를 토벌할 의무, 더해서 합스부르크 섭정의 의무를――여기 바르바토스에게 위임하노라.”

    백발이 아름다운 소녀가 은관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그것을 대충 아무렇게나 왼쪽 팔뚝에 찼다. 예법에 어긋나는 폭거였으나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소녀는 씨익 웃으면서 황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 그오오오오오!

    ─ 케르륵, 키르르륵!

    ─ 크훌라 크르훕! 크후흡!

    수만 마리의 몬스터가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몬스터들에 둘러싸인 인간들이 공포에 질려 떨었다. 그들은 이 자리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억지로 끌려나왔다. 시대가 바뀌었음을 깨달은 소수의 인간만이 몬스터를 따라서 ‘섭정 전하 만세!’를 외쳤다.

    바르바토스.

    불멸의 마왕이자 마왕군 서열 제8위, 평원파 수장인 그녀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과 아우스테를리츠 공작, 마지막으로 합스부르크 제국 섭정으로 등극한다.

    이와 똑같은 날.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합스부르크 제국 제3황녀,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가 수만 명의 인민과 병사가 모인 앞에서 선언한다.

    “신들께서는 타인에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을 지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이것은 결코 깨질 수 없는 황금 중의 황금이다.”

    엘리자베트 뒤에는 검은 군복을 입은 장군들이 기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수십 일 동안 궁정귀족들을 처결했다. 만민이 보는 앞에서 처형식이 이루어졌다. 그때마다 인민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오로지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인류는 정부를 만들었다. 이 정부의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렇다. 그대들, 인민들이 동의했다는 사실에서 권력은 비롯한다. 세상의 그 어떤 정부이든 감히 인민의 권리를 침해하려 할 때, 우리는 정부를 무너트릴 수 있으며――기꺼이 무너트리고자 한다!”

    사람들이 ‘그렇다!’와 ‘옳소!’를 부르짖었다. 수만 개의 그렇다와 옳소가 마치 축제의 불꽃놀이처럼 도시 상공을 화려하게 울렸다.

    “자랑스러운 합스부르크의 시민들이여. 묻노라. 제국은 그대들의 생명을 지켜주었는가!”

    ─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인민들이 한 목소리로 연호했다. 그들은 기나긴 창대를 들어올렸다. 창끝에는 시체의 목이 매달려 있었다. 궁정귀족과 그 가족들의 목이었다. 도시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팔을 내뻗으며 소리쳤다.

    “제국은 그대들의 자유를 지켜주었는가!”

    ─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제국은, 귀족들은, 그대들의 행복을 지켜주었는가!”

    ─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 제국은 그대들의 생명도, 자유도, 행복도, 그 무엇도 지키지 못했다! 우리는 그리하여 오늘 이 자리에 서서, 정부가 아닌 정부를 무너트린다. 오래된 약속을 실현시킨다. 바로 신들께서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권리들을 우리 인류 스스로 실현하리라는 약속을!”

    엘리자베트가 허리에서 검을 빼들었다.

    그러자 뒤편에서 서 있던 장군들이 동시에 칼을 뽑았다. 태양이 찬란하게 비추었고, 수십 개의 장검이 허공을 높이 찔렀다.

    “나, 엘리자베트는 오늘부로 합스부르크라는 성을 버리고 그대들과 같은 평민이 되어, 평민을 위하여, 평민을 대리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의 멸망을 선언할지어니――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건국되었음을 천명한다!”

    수만의 함성이 도시를 뒤흔들었다.

    엘리자베트.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황녀이자 군무상서, 통수본부장, 최고사령관을 역임한 그녀는,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국민 의회의 대표, 혁명의용군 대장군, 마지막으로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종신 통령(統領)에 등극한다.

    북부를 다스리는 제국 섭정 바르바토스.

    남부를 다스리는 공화국 통령 엘리자베트.

    합스부르크가 둘로 쪼개지고 대륙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돌입한다.

    “씨발 꼬맹이 년이……지 혼자서 인간계를 독식하시겠다? 그렇게는 못하지.”

    “욕심이 과하면 배가 터져버릴 텐데에. 헤헤, 파이몬에게서 구해준 은혜를 잊어버리면 곤란한 거야.”

    대다수의 마왕들은 평원파가 대륙의 이권을 독점하자 분노한다. 그들은 각자 군세를 이끌어 합스부르크 북부의 일부를 무력으로 점령한다.

    인간계 군주들은 두 개의 합스부르크 중 공화국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 마왕군을 저지하는 조건으로 공화국에 원조금을 보낸다.

    그러나 여태까지 인간계의 멸망만을 목표할 줄 알았던 마왕이 제국의 섭정 따위를 천명했다는 사실에 군주들은 충격을 받는다. 그들은 마왕이란 존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정치적이라는 것을 보고, 어쩌면 마왕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전염병과 기아, 전쟁과 약탈, 연합과 분열.

    대륙이 전례없는 혼란 속으로 질주하는 이때.

    모든 혼란을 연출한 장본인――마왕 단탈리안은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  *  *

    데이지에게 노예각인을 새기는 시술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내 곁에 노예각인에 대해서는 완전히 전문가인 사람이 있었다. 암살대의 대장인 제레미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 직접 시술을 당하였고, 이후 수십 명의 시술을 담당했다. 그녀 말에 따르자면 이 수술은 지극히 고통스러웠다.

    노예각인은 자그마치 심장에 새긴다.

    심장은 마나의 중심지. 그곳이 빼앗기면 노예는 절대로 주인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 제레미가 작게 웃었다.

    “주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도 못하고, 심하면 주인을 죽이겠다는 생각만 떠올려도 극심하게 고통에 시달리지요. 후후.”

    제레미가 끓는 물에 칼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노예가 처음에는 반항적입니다. 주인을 죽이겠다,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겠다, 밤을 새며 꿈에 꿈을 더하듯이 원한을 더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다보면……후후, 어느새 반항심 따위는 사라지기 마련이죠.”

    “…….”

    데이지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열 살의 소녀는 알몸으로 나무침대에 누워 있었다.

    팔다리가 꽁꽁 묶였다. 목과 허리, 허벅지까지 족쇄로 단단히 묶였는데, 행여나 수술 도중에 마취가 풀리면 극심한 고통에 온몸을 비틀어대기 때문이었다.

    심장에다 각인을 새기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무식했다. 심장이 드러날 때까지 살을 째면서, 환자가 죽지 않도록 포션을 끊임없이 퍼붓는다. 이미 탁자에는 수십 병의 포션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제레미가 미소를 지었다.

    “영광으로 아세요. 당신은 황금 수 덩어리 어치의 수술을 받는 거니까요. 당신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인님께서 인정해주신 겁니다. 노예로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죠. 안 그래요?”

    “…….”

    데이지는 묵묵부답이었다. 감정 없는 눈초리로 제레미를 쳐다볼 뿐이었다. 지금부터 자기 심장이 열린다는 데도 두려워하거나 몸서리치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레미가 자꾸만 웃었다.

    “어쩜 이렇게 제가 어릴 때랑 반응이 똑같을까.”

    “…….”

    “자아, 입을 벌리세요. 포션을 잔뜩 먹어둬야 하거든요.”

    데이지가 자그마한 입을 열었다. 제레미는 포션병을 들어서 소녀의 입구멍에 갖다대었다. 붉은색 액체가 순식간에 여자아이의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한 병 더.”

    제레미는 빈 포션병을 치우고 새로운 병을 들어올렸다. 데이지의 목이 꿀꺽거리며 울렁거렸다. 한 병이 비워졌다. 제레미가 다시 병을 하나 들었다.

    “한 병 더.”

    순식간에 다섯 병이 비었다. 여섯 병째 포션을 마시자, 데이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포션을 비우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소녀는 괴로운 듯이 야트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으으읍……으읍…….”

    제레미가 말했다.

    “시간이 너무 지나면 포션의 효과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렇게 느림보처럼 마시다다가는 수술 도중에 죽어버릴 수도 있어요? 한 병 더.”

    “우읍, 으으읍……! 하아, 후으……!”

    “닥치고 마셔요.”

    한 병, 한 병, 또 다시 한 병.

    “……우웁, 으으읍! 하아! 우으읍…….”

    포션이 열 병이 넘어가자 데이지의 얼굴은 명백히 고통으로 가득 찼다.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입가에는 미처 삼키지 못한 포션이 잔뜩 흘렀다. 하지만 제레미는 상관하지 않고 포션을 한 병 더 꺼내들었다.

    “토하지 마요. 그거 다 황금입니다.”

    “하아, 흐읍…….”

    “당신의 몸값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쌉니다. 입을 열어요. 얼른.”

    결국 열두 병을 전부 비우고서야 끝이 났다.

    데이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차가웠다. 인상이 찡그러지고 입가가 떨리더라도 데이지는 한없이 무표정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나는 방 한켠에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질문하지.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내가 말했다.

    “너는 평생 나의 명령만을 듣고 살아가는 인형이 된다. 너의 몸은 물론이고 정신마저 나한테 종속된다. 자유라고는 전혀 없는 삶이 약속되어 있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

    대꾸가 없었다.

    지금 무언가를 말하면 바로 토할 것 같은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데이지의 시선으로 그녀가 충분히 대답했음을 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제레미를 향해서 말했다.

    “제레미. 계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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