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74화 (174/510)
  • 00174 마왕만이 아는 세계  =========================================================================

    “……고개를.”

    목이 막혔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하나의 무대에서 열 가지 역할을 떠맡은 배우가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마음이 강하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라.”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질문한다. 왜 그대는 자신을 영원히 쓰레기라 여기고자 하는가?”

    “위대한 존재이시여. 저는 제가 미치도록 소중하기에 그렇습니다.”

    소녀의 입술이 가느다랗게 곡선을 그었다.

    “제가 너무 소중하기에 저 자신한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언젠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루크를 죽음에 몰아넣은 것은 잘못된 일이야. 그래도 마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데이지가 작게 웃었다.

    “아닙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다. 저는 루크를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습니다. 제가 선택한 것입니다. 제가 루크의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저 자신에게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러니까 친오빠를 직접 죽이겠습니다. 그 붉은 핏물로 제 영혼을 염색하겠습니다. 영원히 쓰레기인 채로 살겠습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저를 너그러이 용납하시리라 감히 믿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똑같은 족속이니까.

    데이지의 눈동자가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째서 화전민에 불과한 마을사람과 나를 어엿한 인간으로 인정했는가? 어째서 그런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벌였는가? 나는 그걸 알고 있다. 이곳에서 나만이 당신이 왜 그랬는지 알고 있다……당신은 마을사람들의 죽음을 온전히 짊어지고자 했다.

    안 그런가. 피하려 들지 않았다. 자기가 얼마나 불합리한 이유로, 제멋대로인 이기심으로 너희를 죽이려 하는 것인지 설명했다.

    당신은 자기가 소중하고 소중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작자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도 똑같은 족속이니까.

    “…….”

    “…….”

    이곳 세계에 오래도록 내려 전해오는 신화에 따르면.

    아주 옛날, 사람의 영혼은 조금 더 넓었다. 살아가는 데 굳이 다른 사람을 잡아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넓었다. 사람들은 그 자체로 완전했다. 누군가를 달리 사랑할 필요없이 단지 자신을 사랑하면 되었다.

    사람이 지나치게 완벽하자 신들이 두려워했다.

    신들은 사람의 영혼을 억지로 찢었다. 모든 사람이 두 갈래, 때로는 세 갈래 네 갈래로 찢어졌다. 사람의 영혼은 왜소해졌고 타인을 잡아먹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사람은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 자신의 남은 영혼이 세계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며 영원히 헤메어 다닌다.

    “그대는, 지극히 위험하다.”

    “예. 그렇습니다.”

    소녀가 당연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내가 루크를 죽인다면……그대는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내게 복수하리라.”

    “맞습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이번에도 소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제 삶이 다할지라도 저는 다른 이에게 운명을 맡길 것이고, 그 다른 이로 하여금 다시 다른 이에게 운명을 전하도록 하여, 세세만손 감히 왕의 목숨을 빼앗을 그날까지 노력할 것입니다.”

    데이지의 부모가 몸을 크게 떨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가 두렵다.”

    “예.”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왕이 두렵습니다.”

    “어찌해야 하는가? 그대를 죽이면 되겠는가?”

    위협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공포와 두려움을 담아서 솔직하게 물었다.

    데이지가 말했다.

    “왕께서는 저뿐만이 아니라 여기 모인 인간 전원을 도륙하셔야 합니다. 누군가가 왕께 복수할지도 모르니까요.”

    “……내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어쩔 것이냐.”

    “실로 현명한 판단입니다. 다만, 저희가 전원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허락해주시길.”

    마을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경악의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와 상관없이 나와 소녀는 오로지 서로를 쳐다보았다.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끝맺는 것입니다. 왕께서는 허락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럴 위인이 못 된다, 하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인간이 왕 때문에 자결한다. 남자들이 분노하고 울면서도 자기 목을 찌르겠지요. 어미는 울면서 갓난아기를 죽이고, 아이의 피가 묻은 칼날로 제 목을 쑤실 것입니다.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우리를 어엿한 인간으로 인정해버린 당신은, 그 몇 시간을 방해하지 못한다.

    “하룻밤이 꼬박 걸릴지도 모르고, 이틀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며칠이 지나서 결국 몇몇 사람은 갈증에 타서 죽어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방해하지 못한다.

    결코.

    절대로.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짊어진 신념 때문에.

    “그 광경을, 위대한 존재이시여. 영원히 안고 가실 수 있겠습니까?”

    데이지가 비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

    나와 감정을 공유하는 골렘들과 요정들이 동요했다.

    골렘들이 낮은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요정들이 당황해서 요란하게 공중을 날아다녔다. 몬스터들이 동요하자 그에 둘러싸인 마을사람들도 낮게 비명을 지르거나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나의 문제이다. 소녀여, 그대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소녀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선택권은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있다. 그런 의미가 담긴 몸짓이었다.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

    마음의 군살인가.

    어리석은 녀석. 잭 올란드의 경우를 떠올려보라. 그것을 반복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하지만…….

    슬쩍, 발앞을 바라보았다. 데이지와 루크의 부모가 여전히 부복하고 있었다. 그중 부친은 골렘과 맞서싸울 때 크게 상처를 입었다. 보기에도 흉물스럽게 팔다리가 꺾였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나는 죽어서도 멍청이로 죽을 팔자였다. 또 다시 도박판에 뛰어들어야 할 것 같았다.

    “제레미. 이 남자를 치료하라.”

    루크의 아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레미는 군말하지 않고 품에서 포션을 꺼냈다.

    그녀는 수건에 포션을 적셔서 남자의 상처 부위를 닦았다. 꺾인 뼈를 제대로 고정하기 위하여 중간중간에 팔다리를 도로 꺾었다. 남자가 신음했다.

    “그외에도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하도록.”

    “존명.”

    제레미가 마을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치료를 행했다.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어도 자신들이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내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소녀여. 내가 왜 저들을 치료하는지 알겠는가?”

    “제 호의를 얻고자 함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 빌어먹을 꼬맹아.”

    내가 으르렁거렸다.

    “너는 나의 호의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내가 네놈을 죽이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네 자신의 목숨과 마을사람들의 목숨을 가지고서 잘도 도박을 했구나!”

    “과찬이십니다.”

    소녀가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대꾸했다. 젠장맞을 녀석. 열 살짜리가 못하는 말이 없었다.

    내가 진절머리를 쳤다.

    “네놈과 내기를 할 것이다.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루크의 마음을 얻어보이겠다. 만약 루크라는 소년이 나에게 진심으로 복종을 맹세한다면, 빌어먹을 꼬맹아. 루크는 죽지 않을 것이요, 네놈도 죽지 않을 것이고, 네놈의 부모도 마을사람도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고 말했다.

    “만약 내가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루크가 끝끝내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면……모든 여신들께 맹세하건대 루크도, 네놈도, 네놈의 부모도, 여기 모인 자 전원이 싸늘한 주검이 되리라.”

    나는 데이지에게 게임의 룰을 설명했다.

    “너의 오라비는 위험분자 중의 위험분자이다. 평범한 충성서약으로는 곤란하다. 몸과 영혼을 전부 바치는 마법적인 노예계약이 아니고서야 인정할 수 없다. 또한 너는, 네 오라비에게 이러한 나의 목적과 의도를 절대로 발설해서도 안 된다.”

    “…….”

    데이지가 진지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위하여 너는 임시로나마 나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노예입니까?”

    “그렇다. 예의 마법적인 노예각인을 새겨넣어, 나의 의사에 반하는 짓이라면 그 무엇도 하지 못하게 만들겠다. 내가 금지한 것은 넌 결코 하지 못한다. 만약에 이것을 동의하지 못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 모두를 죽이겠다.”

    이건 정말이지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느낀 것일까. 데이지가 즉답했다.

    “알겠습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저는 왕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설령 루크가 충성을 맹세하게 되어 내기가 너의 승리로 끝날지라도, 나는 네 노예각인을 해제해줄 생각이 없다. 너는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예. 이해합니다.”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방진 애새끼 같으니라고.

    *  *  *

    나는 중급 순간이동 스크롤을 두 장이나 찢어야 했다. 골렘들과 함께 마을사람들을 내 마왕성으로 옮기기 위해서. 수백 골드가 순식간에 왕창 깨졌다.

    마을사람들은 촌장 파르시의 아래에서 살아갈 예정이었다. 다만 루크와 데이지의 가족만은 잠깐 남겨두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계획하여 연극무대를 만들었다.

    먼저 화전촌을 불태웠다. 숲속 어디서든 매서운 연기를 볼 수 있도록 크게 불질렀다. 그것을 보자 아니나 다를까, 한 소년이 헐레벌떡 마을을 향해 달려왔다. 나는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았다.

    소년이 소리쳤다.

    “아빠! 엄마! 데이지!”

    그러자 미리 약조한 대로 루크의 아비가 외쳤다.

    “안 돼!”

    안 돼, 라는 한 마디 말에 소년은 뛰어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곧장 뒤로 뛰었다. 사실 안 돼 이후에 또 다른 대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겨우 한 마디 말에서 모든 사정을 이해했다. 과연 용사가 될 녀석이었다.

    소년은 그야말로 미친듯이 달렸다. 어린애 주제에 무슨 늑대처럼 숲속을 종횡무진했다. 만약 암살대가 소년의 뒤를 쫓지 않았더라면 놓쳐버릴 뻔했다.

    마침내 소년의 달리기 속도가 줄어들었고, 나는 병사로 위장하여 그 근처에 나타났다. 사제복 아래에 갑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위장하기가 쉬웠다.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이 되도록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소리 질렀다.

    “나는 순찰병이요! 생존자 없소외까!? 나는 순찰병이요! 제기랄. 생존자, 생존자 없소이까!?”

    그러자 덤불 속에서 소년이 뛰어나왔다.

    “저, 저요! 병사 아저씨! 여기 있어요!”

    걸렸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오, 이럴 수가! 신이시여, 정말로 있었어!”

    “몬스터, 몬스터가 습격했어요…….”

    소년은 나를 구세주쯤으로 여기는지 두서없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떠들었다. 얼른 구해달라고 울부짖는 격이었다.

    “마을이 불탔어요! 엄마, 아빠가!”

    “좋아. 넌 용감한 아이야. 진정해라. 진정해.”

    내가 허리를 숙여 녀석의 뺨을 쓰다듬었다.

    루크. 용사가 될 소년.

    나의 심장을 도려낼 후보 중 한 사람인 녀석의 뺨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지금 토벌대가 마을에 진입했단다. 나는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으러 돌아다니라는 명령을 받았지.”

    “토벌대요? 정말이요?”

    루크가 껑충 뛰었다.

    “정말 엄마랑 아빠가 살 수 있는 거예요? 여동생도? 마을사람들도?”

    “물론이지. 약속해주마. 곧 있으면 넌 모든 마을사람이랑 함께 있을 거란다.”

    내 위안에 긴장이 풀렸는지, 소년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가족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겠지.

    “이런. 긴장이 풀린 모양이구나. 옳지, 이리 오렴.”

    나는 소년을 들어올렸다.

    “동생 이름이 데이지, 맞지?”

    “흐윽……아저씨, 데이지를 알아요?”

    “알고 말고. 그리고 네 이름은 루크이고.”

    “맞아요.”

    내가 피식 웃었다.

    “너희 마을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단다. 얘기를 아주 많이 들었거든! 심지어 루크 네가 일곱 살 때 고백한 이웃집 여자아이에 대해서도――.”

    “엑? 와악! 와아악!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네놈의 숙적이기 때문이다, 용사여.

    나는 루크를 가슴에 안은 채로 숲을 걸었다. 묵직했다. 몸무게 때문에 묵직한 것만은 아니리라. 거기에는 목숨의 무게가 달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한번 연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