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73화 (173/510)
  • 00173 마왕만이 아는 세계  =========================================================================

    땅바닥에 주저앉은 무리 한가운데 일어선 아이가 있었다. 화전민 주제에 말투가 고풍스러운 것이 낯설어서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자아이였다.

    “…….”

    흑요석처럼 까만 시선에서 생기가 번들거렸다. 눈동자가 미처 다 가두지 못한 생명력이 사방으로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를 뻗고 있었다.

    무미건조한 시계침과 달리 음악이 또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소녀 주변에는 어떤 다른 공기가 흘렀다.

    나는 검은 눈동자의 그물망에 걸려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소녀는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마자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허리를 깍뜻하게 숙였다. 내 대답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자애와 시선을 마주친 시간은 사실 얼마되지 않았다.

    “데이지!”

    지금까지 울음소리 한 가닥조차 흘리지 않은, 용사의 어미가 나지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소녀를 절망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여자는 강물에 홍수를 더하듯 다시 울었다.

    여자의 무례를 질책해야 마땅했으나 나는 망치가 두개골을 까부순 기분이었다.

    데이지. 그것은 용사의 여동생 이름이다.

    주인공이 게임상에서 몇 번이고 ‘엄마, 아빠, 데이지’ 하고 중얼거리며 잃어버린 가족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에게 데이지라는 이름이 익숙할 대로 익숙하다. 방금 여자가 보인 반응으로도 미루어보건대, 소녀는 틀림없이 용사 루크의 동생이다.

    만일 데이지가 단순히 루크의 여동생이라면 내가 당황할 일도 없다. 정작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데이지는……플레이어가 성별을 여성으로 선택했을 때, 용사가 된다!’

    여타 게임과 마찬가지로 던전 어택에서도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성별을 골랐다. 남자를 선택할 경우, 몬스터에 의해 마을이 침략당할 때 여동생이 죽는다. 여자를 선택할 경우 반대로 오빠가 죽는다.

    나는 루크를 선택했다. 게임에서 여자 캐릭터를 선택하는 건 취미가 아니었다. 그래서 여태까지 당연히 이 세계의 용사도 남자이겠거니 생각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야말로 제멋대로 넘겨짚은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시나리오상 적어도 둘 중 한 명은 죽어야만 해. 왜, 어째서 루크와 데이지가 둘 다 살아남은……아.’

    깨달았다. 이 세계에는 나 때문에 안드로말리우스의 습격 이벤트가 사라졌다!

    안드로말리우스가 고블린을 이끌고 화전촌을 짓뭉개지 않았다. 당연히 오빠든 여동생이든 죽을 일이 없었다.

    아니, 성별을 고르는 것은 게임상에서 이루어지는 절차가 아니었다. '이름을 정해주세요'처럼 게임에 들어가기 전에 이루어지는 설정 작업이었다. 설마 설정 절차까지 이 세계에 반영되었다고는……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오싹했다.

    ‘내가 여길 방문하지 않았으면 용사가 두 명이나 생겨날지도 몰랐다.’

    용사는 단신으로 마왕들을 참살하는 괴물이다. 그것이 두 명이나 된다. 용사의 탄생을 막겠답시고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여놨더니 도리어 위험분자를 늘려버린 셈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마왕군은 절체절명의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다.

    침착.

    침착해라.

    머리를 굴리는 것 빼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단탈리안, 네 썩어빠진 뇌수에다 석탄을 가득 퍼부어라. 증기가 날 때까지 생각해라. 여기서 네놈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얼른 떠올려내란 말이다.

    “산골에서 자라난 아해치고 행동거지가 제법이다.”

    입술이 어렵사리 열렸다.

    “감히 본인이 질문하지 않았음에도 입을 연 것은 처벌해야 하지만…….”

    발앞에 부복한 여자, 두 용사의 어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한 시선으로 선처를 구하고 있었다. 제발 용서해달라느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는 점에서 대단한 인간이었다.

    “짐작하건대 네 녀석은 루크라는 소년과 혈연으로 맺어 있을 터. 가족의 죽음에 대해 항의할 권리가 네 녀석에게 있다.”

    어미가 감격하며 머리를 땅바닥에 찧었다. 한 번이 아니었다. 다섯 번, 여섯 번, 여자는 계속해서 머리로 땅을 내리쳤다. 말문이 금지된 이상 그쪽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였다. 그 옆에서 아비 역시 나란히 이마를 박아 절하고 있었다.

    “명심하라. 본인은 기회를 여러 번 베푸는 선인이 결코 아니다. 소년을 위하여 항변할 기회는 오로지 단 한 번 주어질 것이다.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자라난 아이여, 너에게는 그 유일한 기회를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는가.”

    “예, 위대한 존재이시여.”

    데이지가 고개를 숙인 채 즉답했다. 목소리는 과하게 자신이 넘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았다. 주군과 마주하여 신하가 충언을 올릴 때 그러하듯이 소녀의 목소리에는 절도가 갖추어져 있었다.

    이제 열 살쯤 되었을까 싶은 어린애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천부적인 재주가 그녀에게 있으리라.

    과연 세계의 운명이 정해놓은 이. 용사로 성장할 인간이었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곤란하다 이것인가…….

    내 온몸의 신경이 깨어났다. 생명을 위협하는 자와 부닥쳤을 때처럼 가장 작은 신경세포까지 가느다랗게 눈을 떠서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을 노려보았다.

    나는 남자 용사 루크에 대해 정통했다. 그러나 여자 용사 데이지에 대해선 완전히 무지했다. 어떤 성격인가. 습관은 무엇인가. 전례 없는 경계심으로 파악해야만 했다.

    “좋다. 말을 허락하노라. 그대에게는 내가 질문하는 것 이외에도 자유로이 발언할 권리가 주어진다. 허나, 먼저 본인의 질문에 답해보아라.”

    “예.”

    “앞으로 나오도록.”

    데이지가 발을 들어올리자 인간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었다. 그 사이로 소녀는 걸어나와 내게서 여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추어,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약간 어이가 없었다. 이 녀석, 화전민 부부의 딸 아니냐. 어떻게 예법에 익숙한 거지?

    “……그대는 나의 관용에 기대어 아뢰겠다 말하였다. 무엇을 근거로 해서 내가 관용을 베풀 것이라 생각했는가. 만일 단순한 수사학이요 아첨이었다면 벌이 주어질 것이다.”

    “왕께서 이미 저희 미천한 것들에 두 번이나 관용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여자애가 또박또박 말했다.

    “이미 관용을 두 번 베풀었다라? 금시초문이로군.”

    내가 일부러 소리내어 웃었다. 심리적으로 압박을 주기 위해서였다. 어린아이 상대로 치졸하게 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의 인간은 어린애이기 전에 용사 후보였으니까.

    “그래, 여기 마을사람을 수 명이나 살해했으며 촌장까지 죽인 나에게 얼마나 대단한 관용이 있었는가 심히 궁금하다. 어디 말해보아라.”

    “예. 왕께서는 첫 번째로, 루크가 시내에 있음을 들으셨는데도 군사를 풀지 않았습니다. 왕께서는 당장 군사를 풀어 루크를 잡아오라 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관용입니다.”

    나는 손바닥 안에서 나무공을 굴렸다.

    “……두 번째 관용을 고해보아라.”

    “예. 명령을 내리지 않으신 다음, 왕께서는 루크의 부모를 대령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모 앞에서 왜 아들이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왕께서는 미천한 저희의 의문을 굳이 풀어주고자 말씀을 내리신 것입니다.”

    데이지가 말했다.

    “왕께서는 그저 저희를 죽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만한 권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권능을 잠시 보류하시고 저희의 의문을 풀어주셨으니, 저는 이를 관용 말고 달리 부를 말이 없습니다.”

    “실로 어리석구나. 어차피 본인이 너희를 죽이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의문 한두 가지가 풀렸다고 해서 관용이라 부른다면 이 어찌 과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데이지가 머리를 한층 깊이 숙였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저희는 화전민. 노예보다 천하며 하늘에 저주받은 족속입니다. 저희에게는 의문을 품을 권리조차 없고, 하물며 의문을 풀 권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왕께서 베푸신 것은 틀림없이 관용입니다.”

    “…….”

    “왕께서는 저에게 말을 허락하신 것 이외에도 방금 한 가지 더 관용을 베푸셨습니다.”

    한 가지 더 있다고?

    마음이 읽히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나는 감정을 갈무리하면서 물었다.

    “그것은 또 무엇인가.”

    “저를 '그대'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소녀의 목소리가 공기를 맑게 울렸다.

    “말을 허하시기 이전에는 녀석이라 부르셨으나, 허하신 이후에 왕께서는 자비롭게도 저를 그대라 부르셨습니다.”

    그녀는 분명히 고개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데도.

    “위대한 존재이시여. 영주조차 자신의 신민을 그대라 부르지 아니하며, 저주받은 화전민에게 그대라 부르는 귀족은 감히 장담하오나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왕께서는 단지 말을 허락하셨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마치 한없이 청정한 눈동자가 이쪽을 곧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왕께서 저를 한 명의 사람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

    “저뿐만이 아닙니다. 왕께서는 제 앞에 부복한 두 남녀를 단지 두 명의 화전민이 아니라, 어느 소년의 아비이며 어미로 인정해주셨습니다. 왕께서는 제 뒤에 부복한 사람들을 단지 화전민이 아니라 죽음 이전에 의문을 풀 권리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내 실책이었다.

    무의식 중에 호칭을 바꾸었다. 그것이 눈앞의 소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빌어먹을. 형편없었다. 방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도 이렇게 금방 방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화전민이라 하여 사람이 아니겠는가.

    나로서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난 개돼지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인간을 죽이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살해해온 것들 전부가 인간이었다. 매번이 전투이고 또 전투였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내가 천하의 쓰레기 새끼임을 인정한다.

    쓰레기에게는 쓰레기 나름의 긍지가 있다.

    “왕께서는 고민하고 계십니다. 저희를 이대로 죽여도 좋은 것인지 아닌지.”

    겨우 열 살의 여자아이가 그것을 간파했는가.

    “위대한 존재이시여. 따라서 저는 왕의 관용에 기대어 아룁니다. 예언에서 얘기하는 소년이 루크 한 사람이라면 저희를 모두 죽이시지 않아도 됩니다. 부디 루크 한 사람만을 참하소서.”

    데이지는 또 내 감정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오라비를 구명해달라 말할 줄 알았더니 그냥 걔 하나만 죽여버리라고 말했다.

    내가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데이지가 말을 덧붙였다.

    “단, 루크는 제 손으로 죽이는 것을 부디 허락해주시길 간청합니다.”

    그녀의 부모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만큼 어처구니 없거니와 상식을 뛰어넘는 발언이었다. 오라비를 죽이라는 것만 해도 이미 패륜인데 이젠 자기가 죽이겠다고, 그걸 또 간청한다고 얘기했다.

    마을사람들도 아연해져서 데이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기네가 알던 소녀가 아니라는 눈빛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평소엔 오라비를 지극하게 따르는 아이였겠지. <던전 어택>에서도 그렇게 묘사되었다. 방금 그 말은 그녀의 평소 성격에도, 세상의 일반적인 도덕에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알았다.

    마을사람도, 부모도,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오로지 나만이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깨달았다. 데이지의 곧은 목소리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확신을 담아서 질문했다.

    “한 가지 질문하겠다.”

    “무엇이든지, 위대한 존재이시여.”

    “친족을 죽이는 것은 가장 크나큰 죄악이다. 어째서 죄악을 자처하는가.”

    데이지가 작게 웃었다.

    열 살짜리한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게 비릿한 자조였다.

    “왜냐하면, 위대한 존재이시여. 제 자신이 오라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쓰레기 새끼임을, 영원히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아.

    눈앞의 소녀는 나와 동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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