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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72화 (172/510)
  • 00172 마왕만이 아는 세계  =========================================================================

    골렘들이 포효를 내지르면서 전진했다. 우지끈 소리를 내면서 나무들이 사정없이 꺾여나갔다. 그 뒤를 요정들이 뒤따라서 날아갔다.

    골렘과 요정의 부대는 벌써 수차례나 보조를 맞추었다. 최하급 몬스터의 레벨 한계치인 10에 모두 도달해 있었다. 라우라가 직접 육성시킨 덕택에 능력치도 꽤나 보기 좋게 자랐다. 안심하고 전투를 맞길 수 있었다. 나는 뒤쪽에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참고로, 되도록 인간을 살해하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 움직일 수 없게만 만들어두면 되었다. 만약 용사가 될 남자애가 없을 경우 녀석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화전민들에게 물어봐야만 했다.

    어차피 화전민……난데없이 기습을 받은 시점에서 제대로 대항해올 리 없다. 팔다리를 하나씩 분질러버리면 항전을 단념할 수밖에.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목을 자른다. 그뿐이다.

    “후우.”

    어쩐지 지쳤다. 근처의 바위에 털썩 앉았다.

    멀리 마을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어린아이, 여자의 비명소리도 상당히 많이 들렸다. 아직도 나에게는 동정심이란 게 남아 있었다. 마음의 군살이었다. 한동안 이 빌어먹으리 만치 사치스러운 감정이 가슴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잠깐이다. 나는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발끝으로 돌멩이를 이리저리 굴렸다. 잠깐이면 끝난다.

    “전하. '전투'를 보고드립니다.”

    잠시 뒤, 제레미가 위쪽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무를 타고 있었던 것일까. 착지할 때 거의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보고하도록.”

    “화전촌 안에는 총 서른네 명의 인간이 있었습니다. 그중 세 명이 항전하다가 전사했고, 다섯 명이 도망치려다 사살되었습니다. 남은 스물여섯 명이 현재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채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놓친 인간이 없었다. 용사가 될 남자아이는 지금 마을에 남아 있거나, 아니면 전투가 시작하기 전 이미 바깥에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로서는 간절히 첫 번째 경우를 바라고 있었다.

    “수고했다. 경계망을 절대로 늦추지 마라. 제레미, 넌 나를 따라와라.”

    “존명.”

    나는 배낭에서 가면을 꺼내어 얼굴에 썼다. 만에 하나라도 용사를 놓칠 수가 있었다. 행여나 나의 진짜 얼굴을 용사에게 보여서는 안 되었다. 제레미에게 방심은 금물이라고 엄포를 놓았으나 그건 나한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골렘이 천막들을 부셔놓은 바람에 마을에는 자연스럽게 너른 공터가 생겨났다. 그곳에 수십 명의 인간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이 깨져서 피가 흐르는 여자도 있었다.

    그리고 울음소리……갓난아기도 끼어 있었는가. 잘도 험난한 겨울을 버텼다. 이곳 마을의 인심이 좋다는 뜻이었다. 어린애도 노인도 버리지 않을 정도로 정이 끈끈했다. 하긴, 영지민과 다르게 화전민은 언제 어디서나 장작을 패다가 불을 지필 수 있었다. 그것이 도리어 행운으로 작용했는가…….

    내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섰다. 인간들이 두려운 눈초리로 날 쳐다보았다. 겉보기엔 자기네와 다를 것 없이 인간처럼 생겼는데도 함부로 적의나 호의를 표현하지 않았다. 몬스터를 거느리고 온 자,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본인은 모든 마족의 주인, 서열 제72위의 마왕 안드로말리우스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비명을 터트렸다. 비명이 중간에 끊긴 것을 보아하니 옆의 사람이 황급하게 입을 막은 듯했다. 현명했다. 이럴 때는 소란을 피우지 않는 편이 좋았다.

    “본인이 어째서 너희를 겁박하는가. 어째서 너희를 습격했는가. 그런 의문일랑 전부 내려놓아라. 지금부터 너희에게는 어떠한 질문도 허락되지 않으며, 오로지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야 한다.”

    “위, 위대한 존재이시여.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맨앞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내가 제레미에게 눈짓했다. 제레미는 어디에선가 단검을 뽑아들어――손놀림이 정확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속했다――그대로 던졌다. 단검은 남자의 목에 적중했다. 남자는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두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꺄아아악!”

    “촌장님!”

    방금 남자가 촌장이었는가. 이 정도 규모의 화전촌을 이끌었으니 틀림없이 유능했겠지. 나는 팔짱을 끼고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의외로 사람들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들 사이에서 공포가 손에 잡힐 듯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너희에게는 어떠한 질문도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본인이 질문하는 바에 대답할 의무만이 주어진다. 만일 본인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경우 본보기로 한 사람씩 죽이겠다.”

    나는 주머니에서 나무공을 꺼내어서 손바닥에 쥐었다.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힐 때마다 하는 습관이었다. 나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이중에 루크라는 소년이 있는가?”

    루크. 게임에서 남자 주인공한테 자동으로 주어지는 이름이었다. 플레이어가 굳이 이름을 바꾸지 않는 이상 주인공의 이름은 루크로 고정되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침묵만이 대답을 대신하여 돌아왔다.

    “흠…….”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이 마을에는 루크가 없는 것인가? 설마 마을을 잘못 고른 것일까. 주인공 용사의 이름이 루크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설정되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마을사람들이 알면서도 모르쇠로 감싸주고 있는 것일까.

    내가 말했다.

    “마리아의 남편 피에르. 피에르의 아내 마리아.”

    두세 명의 인간이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내 입끝이 비틀어졌다. 걸렸다, 네놈들.

    피에르와 마리아는 주인공의 부모였다. 그런가. 이곳 마을에는 상상 이상으로 끈끈하게 정이 이어져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서로를 감싸주다니 말이다. 훌륭하다고 칭찬해야 할까, 나를 우습게 보았다며 조롱해야 할까.

    “감히 본인의 명령을 귓가로 흘리다니 멋진 배짱이다.”

    마을사람들이 더더욱 거세게 떨어댔다.

    “네놈들의 우정에 본인은 심히 경탄했노라. 좋다. 누가 루크인지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경의를 표시하는 의미에서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죽이지.”

    “루크는 냇가에 물놀이하러 나갔습니다!”

    어떤 남자가 소리쳤다.

    “부르츠!”

    “마을 동료를 밀고하다니 제정신이냐!”

    “네가 어떻게 배신을!”

    성별과 연령을 가리지 않고 마을사람들이 남자를 비난했다.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공포에 질겁했던 얼굴들이 분노로 물들었다.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미안하네……하지만, 어린애들을 전부 희생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네 자식, 재작년에 피에르네가 호밀을 빌려준 걸 새까맣게 잊은 거냐!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하늘이시여! 깊이 분노하소서!”

    “미안하네, 정말로 미안하네……이 대가는 목숨으로 갚겠네…….”

    인간들은 한동안 소란을 피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말소리가 하나둘씩 줄어들더니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들은 깨달았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내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왜 다른 마왕들이 인간불신증에 걸리는지 알겠군. 감정이 읽히지 않을 뿐인데 이토록 불편할 줄이야.”

    그러자 제레미가 미소로 대꾸했다.

    “다 조져버릴까요, 전하?”

    “아니. 약간의 관용을 베풀지.”

    인간들의 얼굴에서 공포가 사라지고 다시 두려움이 내려앉았다. 방금 한 마디에서 그들의 명줄이 오간 것이었다. 여차하면 여기 있는 전원이 간단하게 죽어버린다. 그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기를 바랐다.

    “담배가 있는가?”

    “있습니다만……제 물건은 조금 질이 나쁜데 괜찮을까요? 중독성이 매우 강합니다.”

    쯔읏, 마약인가.

    예전에 대마초를 피워본 적이 있다. 내 몸에는 도저히 맞지 않았다. 이 세계의 마약이 어떤 물건일지 모르겠어도, 제레미 정도의 암살자가 대마초보다 약한 걸 피진 않겠지.

    “다음부터는 내 전용의 담배도 갖고 다녀라.”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헤헤, 제 몸은 이미 그 정도 담배가 아니면 약빨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내구성이 생겨서…….”

    제레미와 내가 잡담을 나누는 동안 마을사람들은 죽음처럼 침묵했다. 겨우 조용히 있는 법을 배워주었다.

    “부르츠.”

    남자는 당황하면서 이쪽을 올려보았다가, 다시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예, 예……예!”

    “루크는 혼자 나갔는가?”

    “예, 예, 위대한 존재이시여. 혼자서 냇가에 갔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선 두루뭉실하게 모두한테 질문하는 것보다 특정한 개인한테 질문하는 편이 대답을 돌려받기에 좋았다. 내가 밀고자를 콕 집어서 부른 이유였다.

    “언제쯤 그 아해가 돌아오겠는가?”

    “소, 소……송구합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다라.

    “이곳에 피에르와 마리아가 있다면 앞으로 나와 부복하라.”

    인간들 중에서 남자와 여자가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남자는 오른팔과 오른다리가 흉하게 으깨져 있었다. 골렘에게 격렬하게 저항한 증거였다. 여자는 남자를 부축하면서 간신히 나왔다. 두 사람은 최대한 공손하게 땅바닥에 절을 올렸다.

    흐음.

    “소중한 자식의 이름이 거론되었음에도 경거망동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마.”

    “…….”

    화전민 남녀는 여전히 절을 올린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질문한 것에만 대답하라는 나의 명령을 기억하고 있었다.

    게임 시나리오상에서 두 사람은 아들인 루크를 끔찍하게 아꼈다. 사랑하는 아들이 위협에 처하게 생겼는데도 침착했다. 아니, 대체로 이곳 마을의 모든 인간이 침착했다. 골렘에 의해 이웃이 죽어나갔거늘…….

    다른 쪽을 바라보면,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필사적으로 달래는 여인네의 모습이 보였다. 이럴 때 아기가 울어버리면 어떤 불행이 덮칠지 알고 있겠지. 감히 나의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했으나 그것은 이웃에 대해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배신 따위가 당연하다시피 횡행하는 세상이다. 마을주민들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하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후우.”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눈앞의 사람들에겐 살아갈 '가치'가 있었다.

    잭 올란드와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자신들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이유를 들을 자격이 충분했다. 나쁜 습관, 즉 마음에 든 부류에게는 자비를 허락하고 마는 나의 경향이 또 머리를 내밀었다.

    “피에르와 마리아. 그리고 숲을 불태우며 살아가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또한 루크라는 소년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알려주겠다.”

    “…….”

    루크의 이름이 나왔을 때 여자가 어깨를 떨었다. 기어코 말대꾸를 하거나 울음소리를 흘리지는 않았다.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고보니 용사를 낳은 여자인가…….

    “예언이 내려왔다. 마계에서 가장 영험한 무녀가 예언을 접견했지. 여신들께서 경고하시기를, 지금부터 십 년이 흐르면 차례대로 마왕들의 심장에 차가운 칼날이 박힐 것이요, 이윽고 대륙에 자리하는 모든 마왕이 스러지고 말 것이라.”

    “…….”

    “십 년 후에 우리 마왕의 운명을 잘라낼 그 인간의 이름이 루크이다.”

    마을사람들이 소리없이 웅성거렸다.

    “대륙에 얼마나 많은 숫자의 루크가 있는가, 그렇게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허나 예언은 전례없이 정확했노라. 로렌 지방의 라엘리아 산 근처. 포메트라와 깜파뉼의 근방, 하나의 이름없는 화전촌에 바로 그 루크가 태어났다.”

    내 발앞에 부복한 남녀가 눈에 띄게 떨기 시작했다. 변명할 여지가 없어졌겠지.

    “고로, 본인은 루크라는 소년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왕림했다. 그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불행이리라. 본인도 군말을 더하지 않겠다. 본인과 여타 마왕들, 더 나아가 마족의 미래를 위해 그대들은 여기서 죽어주어야겠다.”

    “잠깐만요.”

    인간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리지만 당찬 목소리였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감히 그 관용에 기대어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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