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71화 (171/510)

00171 마왕만이 아는 세계  =========================================================================

우리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아마도 준남작은 상념에 잠겼겠지.

내전이 프랑크의 운명을 어떻게 망가트릴 것인가, 거기에 휘말려서 자신의 영지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마침 마을은 이제 완전히 축제 분위기가 되어 떠들썩했다. 떠들썩해서 되레 준남작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언제까지 지금의 평화가 이어질까…….

나는 그리고 스프가 참 맛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으음, 닭고기가 들어갔으니 이건 치킨 스프이겠지. 그렇지만 온갖 야채란 야채는 전부 떠다닌다. 이중에서 닭고기의 비중은 정말 얼마되지 않는다. 이런 음식을 과연 치킨 스프라 불러도 좋을 것인가? 실로 그것이 문제이다…….

“자네들 덕분에 한숨 돌렸다. 이대로 겨울이 끝나봤자 마을의 분위기는 한없이 저조했을 것이다.”

“저희의 순례가 여러분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왜 하필 고기의 이름에 따라서 스프에 이름을 붙이는가……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국물을 한 입 더 떠먹었다. 맛있었다. 좋다, 이 녀석에게는 그냥 맛있는 스프라고 이름을 하사하자.

“자네들이 찾아온 덕분에 주민들 모두가 가벼워진 마음으로 봄을 맞이하게 되었어. 행운이라 말해도 좋다. 감사를 표하마.”

“천만에 말씀입니다.”

내가 불성실한 게 아니다. 준남작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나는 인간의 편견에 맞서서 야채들의 권익을 지키려는 것이다. 프랑크의 운명 따위보다 한없이 중요하다. 이게 바로 준남작과 마왕의 수준 차이란 거다. 흐음, 이번엔 빵조각을 찍어서 먹어볼까.

“자네들에게 의뢰하고 싶은 바가 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이 양반은 왜 계속 말을 걸어오는 거냐. 나는 지금 눈앞의 스프를 통하여 야채와 고기 사이의 불평등한 인식에 관해 절찬리에 사념하고 있다. 방해하지 마라.

“이상하게도 작년부터 고블린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원래 이 근처에는 괴수들이 거의 출몰하지 않았다. 마왕성이 하나 있기 때문이지.”

“괴수들은 마왕성 근처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니 말입니다.”

마왕성에는 마나가 잔뜩 고여 있다. 마나를 섭취하며 살아가는 몬스터에게 마왕성이란 요컨대 치킨 스프와 같다. 떠나고 싶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 헌데 갑자기 괴수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월맹군에 발을 맞추어서 이쪽의 마왕도 괴수를 움직인 것이겠지.”

베르시 준남작이 재미있는 의견을 꺼내들었다. 즉, 월맹군이 인간군의 전선을 공격한다. 그동안 내륙에 위치한 마왕들이 후방을 교란한다. 이 근방의 마왕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 아니겠냐는 얘기였다.

미안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몬스터들이 날뛰는 이유는 말하자면 치킨 스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거야 화날 만도 하지.

일찍이 나와 이런 대화를 나눈 자가 있었다.

─ 자네의 마왕성이 어디에 있는가?

─ 프랑크에 있습니다……로렌 지방, 라엘리아 산중턱에…….

─ 훌륭하군. 마왕성 근처에 어떤 마을들이 있는가?

─ 포메트라, 깜파뉼…….

로렌 지방, 베르시 남작령, 포메트라 마을.

이곳은 서열 제72위의 마왕――안드로말리우스가 기거하던 땅이다.

인간들은 아직 안드로말리우스가 죽은 것을 모른다. 마왕이 죽는 바람에 마왕성의 마나가 일거에 사라지고, 그 탓에 고블린들이 날뛰는 것이다. 안드로말리우스는 인간계가 아니라 마계의 도시에서 죽었다. 준남작이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안드로말리우스는 자기 도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고블린들을 광산에 처박아두고 종일토록 일하게 만들었다. 그 고블린들이 던전에서 쏟아져 나왔겠지.

나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면서 생각했다.

‘던전 어택에서 주인공 용사의 마을이 고블린들에게 쑥대밭이 된다. 용사의 마을이 피해를 입었는지 입지 않았는지 그걸 확인하는 것이 먼저로군…….’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였을 때 퀘스트 브레이커(quest breaker)가 작동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마왕이 퀘스트를 깨부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안심했다. 하지만 나중에 퀘스트를 부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나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왜 용사 퀘스트를 파괴했다고 알림창이 뜨지 않았을까?

주인공이 용사가 되는 계기는 마왕 안드로말리우스한테 있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주인공의 마을, 화전촌을 무참하게 짓밟아서 주인공은 마왕이란 존재에 대해 원한을 품는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사라지면 주인공이 용사가 되는 일도 없어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퀘스트는 파괴되지 않았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사라지든 사라지지 않든 상관없이 주인공은 용사가 될 운명인가. 아니면, 굳이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다른 인간들이 대신해서 용사의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인가……. 가능성은 여러 가지이다.

정답이 무엇이건 간에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용사가 될 싹을 뿌리부터 제거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해방동맹과 협의해서 일행의 경로를 이쪽으로 잡았다. 베르시 준남작령에 도착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마왕군의 세력과 인간군의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가는 지금 이 순간, 용사가 될 인간이야말로 미래의 안위를 위협하는 제1위험분자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버리도록 하자.

“좋습니다. 고블린 부락을 토벌하겠습니다. 이것 역시 여신께서 뜻하시는 바이겠지요.”

내가 포도주로 마지막 입가심을 했다.

“단, 지리에 유능한 길잡이를 붙여주십시오. 산자락에는 도적떼나 화전촌도 있을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의도치 않게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르지요.”

피처럼 붉은 액체가 잔에 담긴 채로 이쪽의 표정을 비추고 있었다. 포도주에 반사된 나의 얼굴은 정말로 신실한 사제처럼 그윽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하루를 푹 쉬었다.

영주의 종사가 백도(伯都)에서 먹을거리를 잔뜩 사왔기에 축제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난쟁이 용병들은 앞장서서 축제를 주도했다. 덕택에 마을주민들이 숙박 명령을 거리껴 하기는커녕 저마다 자기네 집에서 자라며 성화였다.

정오 무렵. 우리는 마치 원정을 나가는 자국의 군대처럼 주민들에게 함성을 받으면서 출발했다. 길잡이로 고용된 남자 두 명은 중년의 사냥꾼이었는데, 어디에 뭐가 있는지 두뇌에다 그대로 지도를 그려놓은 사람들이었다.

“화전촌 말입니까요? 그야 한 군데 있습죠.”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 것 같은데 내버려두면 저들이 알아서 괴수랑 싸워주니 영주 나리께서도 내버려두고 계십니다요.”

그곳이 틀림없었다.

나는 일행을 둘로 나누었다. 자크리에게는 용병단을 이끌게 하여 고블린 부락으로 향하게 했다. 나머지, 그러니까 제레미와 암살자들은 나를 뒤따르게 했다. 왜 부대를 둘로 나누냐는 자크리의 말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들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진군이 늦어졌네. 고블린 부락이래봤자 스무 명밖에 되지 않을 터인데, 함께 행군하면 하루종일 고생해도 기껏해야 한 군데의 부락만 토벌할 수 있어. 비효율적이야.”

“으음.”

자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마을사람들에게 성원을 받았으니 그만한 결과를 내놓아야겠습니다.”

“이건 우리의 신용이 걸린 문제네. 우리가 앞으로 영주들에게 고용되기 위해서는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해. 다른 마왕들과 협력해서 기만책을 펼치는 것은 나중 일이야. 일단은 성실하게 일하도록.”

“알겠습니다.”

반은 거짓말이었고 반은 진담이었다.

나는 앞으로 내륙의 마왕들과 협력해서 영지들을 파괴할 계획이었다. 그래도 처음부터 이쪽의 본색을 드러내면 안 되었다. 서서히, 영주들이 우리 용병단을 크게 신뢰할 때까지 참아야만 했다. 고블린을 토벌하는 일은 쉬우면서도 신뢰도를 쌓기에 적절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자크리를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자크리는 열성적인 공화주의자였다. 이념과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자였다. 만약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화전촌을 싸그리 쓸어버린다고 하면 당장 반발하겠지. 화전촌에 훗날 용사가 될 남자아이가 섞여 있고 그러므로 지금 없애야 한다고 설득해본들 자크리가 납득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제레미와 암살대가 더 사용하기 편했다.

암살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데 익숙했다. 고용주가 명령하면 의심을 품지 않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화전촌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야겠다고 말하니까 제레미는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게 있음을 믿습니다.”

제레미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믿음직스러운 수하가 아닐 수 없었다.

길잡이를 따라 세 시간쯤 걸으니 멀리 수풀 사이로 화전촌이 보였다. 장작을 떼는 연기들이 창백한 하늘로 꾸물꾸물 올라가고 있었다. 다 헤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천막과 같은 집을 느릿느릿하게 오갔다.

“제레미. 이제부터 눈앞의 목표를 말살한다.”

내가 숨을 죽이고 명령을 내렸다.

제레미가 화전촌을 슬쩍 쳐다보았다.

“간단하네요. 많아봤자 서른 명, 젊은 남자는 열 명 정도밖에 안 돼요. 저에게 오 분만 시간을 주신다면 깔끔하게 처리하겠어요.”

그녀가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대꾸했다. 여전히 얼굴 표정과 다르게 감정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상대방의 목덜미를 찌르는 순간조차 제레미는 살기 한 점 풍기지 않으리라.

“혹시 지금 마을에 없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였던 주인공은 마왕 안드로말리우스가 화전촌을 습격했을 때도 때마침 마을 바깥에 있었다. 그래서 몬스터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것이었다. 지금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나는 이 마을에 적을 둔 모든 인간이 말살되기를 갈망한다.”

“그럼 어떡하죠?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릴까요?”

“아니. 나에게 좋은 수가 있지.”

내가 품속에서 마법 스크롤을 꺼내들었다. 몇 번이고 나에게 기회를 안겨준 중급 순간이동 스크롤이었다.

“이걸로 내 골렘들을 소환할 것이다.”

“골렘으로 마을을 공격하고, 저희는 사방에 산개해서 혹시나 모를 생존자를 확보하라는 말씀인가요?”

“이해가 빨라서 좋군.”

제레미가 미소를 지었다.

“전문 분야거든요.”

“명심해라. 방심은 금물이다. 적들 중에는 아직 어리지만 미래에 대륙을 재패할 괴물이 숨어 있다. 남자아이다. 혹시 녀석을 발견하면 섣불리 다가가지 말고 우선 나를 불러라. 알겠는가? 절대로 마음대로 교전을 일으키지 마라.”

“…….”

제레미의 눈빛이 바뀌었다. 가벼운 사냥감을 바라보던 시선에서 사자를 사냥하는 하이에나의 눈초리가 되었다. 고작 남자아이가 무엇을 하겠느냐 따위의 항의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나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그에 따라 마음가짐을 바꾸었다.

“존명.”

제레미를 포함해서 스무 명의 암살자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길잡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과연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암살대였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용사.

화전민 출신에서 용병이 되고, 황녀의 눈에 들어서 점차 군권을 장악하여, 마침내 프랑크 제국과 브르타뉴 왕국을 멸망시키고, 일흔두 명의 마왕을 모조리 참살하는……괴물 중의 괴물. 예전에 플레이어로서 내가 조종했으며, 그렇기에 나는 녀석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강력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부터 그를 죽인다. 용사였던 내가 이제 마왕이 되어 그를 멸한다.

모든 것은 나의 생존을 위하여.

“아르체시투스.”

스크롤이 찢어지면서 하얀 빛을 내뿜었고.

적막한 산자락에 거대한 바위의 투사들이 강림했다. 이제는 소환에 익숙해진 나의 부하들에게 나는 손가락으로 보잘 것 없는 화전촌을 가리켰다.

─ 크롸아아아아!

사냥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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