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0 마왕만이 아는 세계 =========================================================================
우리는 로렌 지방의 베르시 준남작령. 그중 포메트라 마을에 들어갔다.
“이것들을 병사들에게 나눠주시오.”
베르시 준남작은 우리를 진심으로 환대했다. 그는 허언을 입에 담는 족속이 아니었다. 준남작이 정성스럽게 숙박(billet) 명령서를 써서 넘겨주었는데, 이건 말하자면 자유이용권이었다.
병사가 명령서에 적힌 대로 집을 찾아가면 집주인이 군말없이 하룻밤 병사를 재워주어야 했다. 이 시대 농민들이 영주한테 당연하다시피 지는 의무였다. 자국의 군대이든 외국의 군대이든 이런 식으로 숙박을 해결했다.
단, 모든 의무가 그러하듯 숙박 제공도 결코 달가운 의무가 아니었다.
아내와 딸이 정답게 머무르는 집에 갑자기 외지인이 들어온다. 엄청난 스트레스이다. 험상궂은 병사를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어야 하니 민폐가 따로 없다. 더군다나 우리측은 대다수가 난쟁이나 엘프……마을주민에게 더없이 낯선 이방인이다. 영주의 명령이니 일단 복종해도 불만이 가득할 거다.
그러나 안심하시라, 용병 및 암살자 제군.
나는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들면서 브레시 남작에게 말했다.
“실례지만, 준남작 나리. 은화와 동화가 충분합니까?”
“음? 미안하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질문하도록.”
“일백 리브라입니다. 동화로 바꿔주시면 제 순례단의 호위대에 나눠주고 싶군요.”
브레시 남작이 숙박 명령 쪽지를 써재끼다가 뚝, 하고 멈추었다.
“……일백 리브라? 잠깐만. 그만한 거금을 교환해줄 동화는 없다.”
“교환하지 못한 나머지는 적당히 현물로 바꿔주십시오. 밀가루도 좋고, 약간의 고기도 좋고, 채소도 좋습니다.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 스튜를 펄펄 끓일 재료라도 들고 가는 편이 마을주민한테나 우리한테나 좋겠지요.”
내가 준남작의 종사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종사가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헉.”
이십 대 중반의 종사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확히 일백 리브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그, 금화가 잔뜩 있습니다. 경화(硬貨)가 이렇게 많은 것은 처음 봅니다, 주군.”
“음.”
브레시 준남작의 표정이 바뀌었다. 체면 때문에 차마 돈주머니를 확인하지 못해 안면이 근질근질거리고 있었다.
그랬다. 공짜가 아니라 돈을 지불하게 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브레시 준남작은 이제까지 손님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는데 별안간 봉을 붙잡은 타짜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고작 하룻밤 묵는 데 일백 골드를 흔쾌하게 건네는 자가 봉이 아니면 뭐가 봉이겠는가.
“종사. 지금 당장 마을 젊은이 열댓 명을 데리고 백도(伯都)까지 달려가도록. 짐마차를 두 개 가져가는 것을 허락한다. 밀가루 포대와 고기, 야채를 되는 대로 사와라. 반나절의 기한을 주지.”
“바, 반나절이라구요?”
백도란 백작이 다스리는 영지의 수도를 일컫는다. 아마 이 부근에서 제일 큰 마을이거나 도시일 것이다.
“나리. 그건 아무래도 좀…….”
“내 개인의 군마들을 빌려주마. 행여라도 상처가 나면 죽었다고 복창하도록.”
“헉!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종사가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주택들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병사를 모집할 필요가 없었다. 여전히 마을 광장에 마흔 명 가량의 병사가 모여 있었다. 그가 광장에서 뭐라뭐라 외치니까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와아! 하고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잘못 판단했군요. 불청객이 아니라 행운을 가져다주는 분들이었습니다. 저의 실례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베르시 준남작은 말투부터 통째로 바뀌었다.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려보이는 나한테 존댓말을 썼다. 이쪽이 신전의 평범한 사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눈썹 한번 까딱이지 않고 말투를 바꾸다니……신경줄이 보통이 아니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제가 일찍이 푸른 피를 이었다고는 하나 이미 출가한 몸입니다. 여신의 아래에 서기를 자청한 자,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낮은 자세로 임할지어니. 부디 말을 낮추어주시길 바랍니다.”
“그 편이 자네에게 편하다면.”
어이구, 이것 봐라? 또 아무렇지도 않게 어투를 평대로 되돌렸다. 푸른 피란 귀족의 혈통을 의미했다. 내가 귀족 태생이라고 말했는데도 생까버린 것이었다. 점점 더 눈앞의 양반이 마음에 들었다.
젊을 적에 미남이었을 게 분명한 베르시 준남작의 얼굴은 그 나름대로 풍파를 현명하게 거쳐서, 딱 곧게 자라난 거목처럼 든든한 구석이 있었다. 일백 골드가 눈앞에 오갔는데도 벌써 심신이 안정되었는지 여유로웠다.
준남작령은 척봐도 가난해보였다. 그런데도 영주귀족은 영주귀족이라는 것일까. 남자는 살갗에 안정과 위엄을 자연스럽게 두르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집안의 역사가 오래되었을 것이다. 벼락 출세한 귀족이 아니었다.
준남작의 사람들과 이쪽 사이에 부드러운 공기가 흘러갔다. 역시 돈은 언제 어디서나 기름칠을 해주는 도구였다.
“양날도끼 용병단이라 했는가? 무척 신사적이군.”
“우리는 용병단이 아닙니다. 여신을 위하여 이곳저곳 방랑하는 순례자에 불과하지요.”
“과연. 내가 그만 실언을 범했다.”
우리는 광장 구석에 앉아서 이런저런 환담을 나누었다.
정오였다. 집안에 들어가봤자 춥기만 하니 이렇게 따사로이 햇빛을 쬐는 편이 나았다. 어디서 들고 나왔는지 광장 한켠에 큼직한 나무 탁자가 놓였고, 영주 일족과 우리측 수뇌부가 거기 둘러앉았다.
“멀리서 오느라 몸이 굳었을 터. 부족하나마 즐겨주면 좋겠다.”
사람들이 가마솥째로 수프를 날랐다. 방금 끓였는지 국물이 걸쭉했다. 하얀 빵은 없었지만 충분히 부드러운 빵이 야트막한 언덕처럼 쌓였다. 우리 일행은 게걸스럽게 수프와 빵을 헤치웠다. 여기에 꿀을 넣어 따뜻하게 데운 포도주까지 돌았다. 가히 만찬이었다.
때아닌 마을축제가 열렸다.
베르시 준남작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마을주민에게도 빵과 수프를 공짜로 제공했다. 집안에 죽치고 있던 노파와 어린애까지 광장에 몰려들었다. 젊은이들은 무구를 벗어던지고 맥주를 주고받으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으하하하! 내 녹색 수염 난쟁이족의 위엄을 보여주지!”
축제만큼 이방인이 섞여들기에 좋은 자리가 없었다. 용병들은 금세 마을주민에 녹아들었다. 큰소리로 건배가 오갔고, 당장 누가 제일 말술인지를 두고 대회가 열렸다. 난쟁이들은 전투에선 도망치더라도 술싸움에선 죽어도 안 물러서는 족속이었다. 따뜻한 겨울 햇빛 아래, 마을의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고맙다. 덕분에 겨울을 기분 좋게 끝내게 되었어.”
베르시 준남작이 포도주를 들이켰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목소리가 조금 풀렸다. 씁쓸한 기색이 묻어나왔다.
“우리 영지는 작더라도 풍족하다. 최근 이백 년 동안 가문이 바뀐 적도 없어. 흉년을 견딜 만큼의 식량은 미리 비축해두었지. 그럼에도 아사자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힘겨운 시대입니다.”
내가 묵념을 했다. 사제인 내가 묵념을 올리자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따라했다. 마치 내가 지휘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라? 이거 의외로 재밌다. 앞으로 종종 써먹어야겠다. 사제란 것도 심심하기만 한 직업이 아니었네.
“최대한 피해를 막아보려 했지만 이 마을에서만 일곱 명이 죽었다. 올해 흑사병으로 죽은 자까지 합치면 스물세 명이나 명을 달리했어. 믿기는가? 한해에 스물세 명이 죽은 것이다. 지난 번 전투에서도 이만큼 죽진 않았어. 암. 이만큼은…….”
베르시 준남작이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금빛 머리카락에 묻은 피로가 공중에 흩날리는 것 같았다.
영지민을 걱정하고 피해를 막으려 노력한다.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괴로워한다. 심지어 정치적인 압력에 부닥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 일행이 마을에 들어서는 것을 막으려 했다.
하긴, 마을의 자산이 곧 영주귀족인 베르시의 자산이었다. 자기 자산을 지키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영주귀족의 본분이겠지. 본분을 지킨다는 점에서 베르시 준남작은 더없이 훌륭했다.
세상에는 그 본분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니까.
“솔직히, 마을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지난 번 전투라니. 근방에 전쟁이 일어났습니까?”
준남작의 말투를 들어보니 예전에 일어난 전투가 아니었다. 최근에 전투가 일어났다면 왕당파와 공화파가 충돌한 것일지 몰랐다. 쉽게 흘려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준남작의 얘기는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아아. 근방에 도적들이 들고 일어섰다. 불과 사 개월 전 일이지.”
“도적…….”
“초기 정찰에 따르면 스무 명 정도 되는 도적떼였다. 인근의 다른 영주들과 합쳐서 토벌할 작정이었지. 그런데 전투에 돌입해보니 스무 명이 아니라 쉰 명이 넘어갔어. 상상이 가는가? 이 자그마한 지방에 쉰 명이 넘는 도적떼가 발생한 것이다.”
베르시 준남작이 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렀다.
“나중에 알아보니 마을에서 도망쳐 나온 농민에다 화전민까지 끼어 있었다. 빌어먹을 이웃동네의 양반들이 영지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이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차라리 도적이 되어버렸어.”
베르시 준남작이 처음으로 말이 격해졌다. 아마 근방에서 제대로 된 영주귀족은 준남작 혼자인 듯했다. 다만 내 입장에서는 과하다고 느껴졌다.
준남작령은 제국로(帝國路)를 거느렸다. 프랑크 상업의 젖줄기에 발끝을 슬쩍 담은 것이었다. 상단들이 마을에 머무르면서 지불하는 숙박비만으로도 벌써 다른 영지와 차원이 다르게 부를 축적할 수가 있었다.
이런 행운을 누리는 영지는 극소수……전염병과 흉년이라는 원투펀치에 당해낼 영지는 거의 없었다. 준남작의 비난은 약간 불합리했다. 뭐, 말도 안 되게 늘어난 도적무리 때문에 소중한 영지민을 잃게 된 준남작의 처지는 이해하더라도.
“어느 곳이든 사정은 비슷하다. 저주받을 월맹군 때문에 군역을 진 영주도 수두룩하다. 전염병, 흉년, 대전쟁까지, 요즘 들어서는 흉사밖에 들려오지 않는다.”
아, 그거 제가 일으킨 겁니다.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포도주가 맛있다. 음. 꿀을 듬뿍 넣어서 그런지 몰라도 풍미가 깊었다. 훌륭하군……주변에 좋은 포도 과수원이라도 있는 것일까? 나중에 조금 사가야겠다. 합스부르크의 포도주는 죄다 쉬어버린 식초 같아서 입에 댈 만한 물건이 못 되었다.
바르바토스한테 건네준 발레르뇽 505년산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최소한 물에 타먹지 않아도 괜찮을 만한 포도주가 고프다……난 마왕이라서 잠도 음식도 거의 필요없단 말이다. 혀를 즐겁게 해줄 포도주 정도만 있으면 된다. 으음. 훌륭하다. 다시 마셔도 맛있군…….
옆에서 제레미가 왠지 모르게 싱글벙글 웃었다. 그녀는 월맹군의 전말을 전부 꿰뚫고 있었다. 준남작한테 '바로 이 분께서 저주받을 월맹군을 획책한 장본인이에요'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리라.
조용히 해라, 제레미. 그런 얘기를 들어봤자 준남작도 곤란하겠지. 세상에는 예의란 것이 있다. 이럴 때 가만히 넘어가는 것이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것이다. 너희는 배려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나를 본받아라.
우리 둘 사이에 모종의 시선이 오간 것을 알지 못한 채, 준남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높으신 분들께선 이제 내전까지 벌인다고 한다. 실로 빌어먹을 소리이지. 왜 내가 왕당파든 공화파든 아무 상관없다고 말했는지 이해하겠는가?”
“물론입니다.”
예, 이곳 빼고 대부분의 영지민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을 매우 잘 이해했습니다. 앞으로도 서열 제71위의 마왕으로서 노력하겠습니다.
포도주로 식도를 적시면서 나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