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9 마왕만이 아는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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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사람들이 일어났다.
“팔겠습니다.”
상단의 노인이 다가와서 말했다. 그는 밤을 새서 고민한 것이 분명했다. 하룻밤 만에 얼굴이 홀쭉해졌다. 아마도 우리와 거래하느냐 마느냐가 그의 상인 인생에서 꽤나 중요한 고비였겠지.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쪽의 자크리가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현명한 결정이오. 어느 정도를 팔 생각이오?”
“모쪼록 기사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두 사람은 거래를 타결했다. 본래 이 정도 물건과 돈이 오갈 때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기 마련이었으나, 저편은 무구 상인이었고 이편은 용병. 모두 무기에 대해서는 전문가였다. 금세 적절한 가격이 나왔다.
우리는 상단 행렬과 헤어지고 제국로를 따라 나아갔다. 다시금 앙상하게 메마른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짐마차를 이끌면서 느긋하게 이동했다.
자크리가 검은 말을 몰면서 얘기했다.
“저쪽으로선 행운을 잡은 셈입니다. 내전이 벌어지는 도중에 무기를 잔뜩 실은 짐마차가 보이면 거래고 뭐고 나중에 대금을 치른다면서 약탈하기 일쑤입니다.”
“자크리, 황태후에게 무구를 진상하여 눈도장을 찍을 생각인가?”
전쟁에는 언제나 무구가 부족하다. 그때 무기를 잔뜩 진상하면 발언권을 얻게 된다. 단지 전쟁에서 부려지는 입장에서 어느 정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 입장으로 형편이 좋아진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전략을 결정하는 수뇌부가 될 수야 없겠지. 자기 부대의 위치를 결정할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이다. 우익인가 좌익인가,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생존율이 확 달라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자크리의 판단은 올바르다.
“그렇습니다.”
“좋다. 그러나 상책은 아니야.”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자크리는 별로 감정이 상하지 않아보였다. 어젯밤에 회의를 끝낸 이후로 자크리의 태도가 더 공손해졌다. 어제는 마치 용병이 고용주를 대접하는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기사가 주군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나에겐 반가운 변화였다.
“황태후 진영에 무기를 넘기는 대신에 백성들한테 무기를 쥐어주게.”
“예?”
“민란을 유도하라는 말일세.”
자크리가 눈썹을 찡그리면서 고민에 빠졌다. 한참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전하. 민란은 지극히 위험합니다. 프랑크는 다른 나라와 다릅니다. 촌민의 자치권이 약하고, 기사가 많습니다. 민란이 진압되기에 아주 적합하지요. 게다가 프랑크의 공화파는 어디까지나 귀족공화정을 두둔하는 자들. 결코 민란을 옹호하지는 않습니다.”
자크리는 해방동맹의 지부장이었다. 프랑크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공화주의가 가능한지, 정말로 혁명이 가능한지 수없이 고민해왔겠지. 그는 혁명동맹의 수뇌부로서 이성적으로 판단했으리라.
아직 민란은 시기장조라고.
“민란의 규모가 보잘 것 없다면 금방 진압됩니다. 의미가 사라집니다. 즉 대대적인 민란을 유도해야 합니다만……이 경우, 자칫 잘못하다가는 왕당파에게 빌미를 제공해버릴 수가 있습니다.”
결국 공화주의의 목적은 백성들이 상전을 뒤엎는 것 아니냐. 왕당파는 그렇게 공격해올 것이다. 공화파는 흔들리게 된다. 그들도 어차피 귀족. 민중 봉기에는 대다수의 공화파 귀족들도 찬동하지 못한다.
“어쩌면 왕당파와 공화파가 내전을 멈추고 타협할지 모릅니다. 말짱 도로묵이 되어버립니다. 전하. 소인은 백성들에게 무구를 나눠주는 것에 대하여 반대합니다.”
“허나 브르타뉴 왕국이 끼어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미소를 지었다.
“예?”
“프랑크와 브르타뉴는 철천지원수. 브르타뉴에 대항하여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섰다.”
귀족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브르타뉴의 침공군에 대항한다. 귀족들이 이것을 막을 명분이 있을까.
“백성들에게는 의병(義兵)이라는 칭호가 주어지겠지.”
“……!”
자크리가 입을 자그맣게 벌렸다. 저절로 열린 것이었다. 자크리가 어느 때보다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그는 고민에 잠기면 표정을 와락 구기는 습관이 있었다.
“가능합니다……아니, 반드시 먹힙니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목소리에서 뜨거운 흥분이 울렁거렸다.
“황태후와 공화파 귀족이 의병을 대대적으로 지원할 겁니다!”
“아아. 자고로 민심을 등에 업은 정치세력만큼 무시무시한 것은 없으니까.”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농민들이 들고 일어선다. 공화파의 입지가 단숨에 상승한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 명분 싸움에서 추가 황태후에게 기울어버린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민란 봉기는 거세진다. 의병이 외적에 승리하는 경우가 잦아지겠지.
틀림없이 귀족들도 의병의 무훈을 무시하지 못하는 지경에 도달한다. 하급 귀족과 평민의 발언권이 강력해진다. 수많은 전투로 인하여 정예가 된 의병들. 여기에 발언권까지 더해지면――.
“질문하지. 공화파 귀족들이 평민의 성장을 두고보리라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대부분은 평민을 탄압할 것입니다.”
“옳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다. 공화파 귀족이 자기네를 탄합하는 것을, 평민들이 가만히 두고보리라 생각하는가?”
“…….”
의병들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이보다 억울한 일이 없었다. 조국을 위하여 피땀 흘려 싸웠다.
지금까지 후원해주던 귀족들, 평등이니 자유니 멋들어진 단어를 남발하던 귀족들이 정작 전쟁이 끝나니까 등을 돌린다. 명백한 토사구팽이다. 분노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들에게 전투 경험이 없다면. 또한 손에 무기가 쥐어져 있지 않다면, 분노는 단지 분노로 끝나겠지. 하지만 이때쯤이면 상당수의 의병이 정예로 길러졌을 것일세. 게다가 그들에게는 날카로운 창칼이 있지.”
“대규모……혁명이…….”
그렇다.
혁명이 일어난다.
“프랑크의 황제는 권력에 사로잡혀서 외세까지 끌어들였네. 외국의 군대가 자국민을 유린하리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지. 여기서 이미 황제의 권위는 추락했네. 설령 황태후가 내전에서 승리할지라도, 태후는 황실의 정당한 주인이 아니야. 제국에는 명분이 사라진다.”
“…….”
“이제 우리가 백성들에게 명분을 제공할 필요가 생기네.”
그것을 위하여 어젯밤을 꼬박 바쳐 원고를 썼다.
까막눈인 절대다수의 민중을 제외하고, 혁명파에는 하급 귀족과 부유한 평민도 참여할 것이다. 그들이 내 책자를 읽고 이론적으로 단단하게 무장한다. 그리고 민중들에게 글이 아니라 말로 연설하겠지. 어째서 우리가 정의로운지.
“뭐, 아직은 먼 이야기일세. 아무리 빨라도 이삼 년은 지나야겠지. 우리는 그 미래를 위해서 제법 열심히 움직여야 하네.”
내가 웃으면서 뒤를 쳐다보았다. 자크리와 제레미가 이쪽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표정이 재미있었다.
“단순히 황태후에게 협력한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곤란해. 프랑크에 제국의 깃발이 쓰러지고 방방곳곳 혁명의 깃발을 일으키겠다고 다짐하게나. 자네들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여주지.”
* * *
우리 일행이 처음으로 마을에 당도했다.
베르시는 작은 준남작령이었다.
힘겨운 겨울을 겨우 버텨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제국로 주변에 시체가 꽤나 쌓여 있었다. 마을에서 운반해온 시체였다. 노인과 아이의 시체가 가장 많았다.
“마계의 지옥에선 별로 드문 광경도 아니에요.”
어쩌면 가족들이 일부러 살해한 것일지 모른다, 하고 제레미가 말했다. 어린아이와 노인은 당장 쓸모가 없는 인력에 불과했다. 전염병에 흉년이 겹친 지금 가장 먼저 군입이 처리되어야만 했다.
쉰 명에 이르는 집단이 말과 마차를 끌고오자 영지에 비상령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마을 입구에 이르자, 수십 명의 병사가 이쪽을 경계하면서 창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중 판금갑옷을 입은 기사가 한 명 있었다. 그가 준남작이겠지.
“멈추시오!”
준남작의 근처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오면서 외쳤다. 영주의 종사(從士)였다. 영주의 측근이자 유사시 영주를 대신하여 군대를 이끄는 부관이었다. 아마 준남작령에 포함된 어느 마을의 촌장이거나 지주일 것이다.
병사 수십 명이 모인 것을 보아하니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한 듯했다. 영주의 통치가 꽤나 견실하다고 봐야겠지. 병사들도 농기구 따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창과 활을 들고 있었다.
“이곳은 베르시 준남작께서 황제 폐하께 하사받아 다스리는 영지이외다! 정체를 밝히시오!”
“나는 녹색 수염의 자크 보놈, 양날도끼 용병단을 이끄는 용병대장이오.”
자크리가 말을 앞으로 몰아가며 품속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황태후 폐하의 소집령을 받들어 제국로를 통과하고 있소. 이곳 영지에서 하룻밤 체류하고자 하오. 부디 황태후 폐하의 의지를 무시하지 말기를 바라오.”
종사가 이쪽으로 걸어나왔다. 종사는 자크리에게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준남작한테 전달했다. 베르시 준남작은 투구를 벗어 두루마리를 찬찬히 읽었다. 밝은 금발이 멋진 남자였다.
베르시 준남작이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그가 말했다.
“분명히 제도(帝都)에서는 용병단의 통행에 편의를 봐달라고 명령이 내려왔다.”
이제 서른 살을 갓 넘겼을까. 딱 중심이 잡혀서 목소리가 묵직했다. 귀족의 자세를 자연스럽게 익힌 티가 났다. 준남작에다가 영지귀족이라면 어중이떠중이 기사들과 일선을 달리하는 상위 귀족이었다.
“그중에는 양날도끼 용병단의 이름도 확실히 들어 있다. 하지만 자크 보놈, 용병대장이여. 본인은 중앙의 쓰잘데기 없는 정치 싸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필요 이상으로 중앙의 명령, 하물며 황제 폐하가 아닌 다른 이의 명령에 복종할 이유도 없다.”
“호오.”
내가 조용히 휘파람을 불었다. 말투가 사나운 양반이 아니고 뭔가.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든지 뒷배로 강력한 귀족을 두고 있으리라. 하긴, 생각해보면 제국로의 중간 거점을 차지한 작자였다. 실력이 없을 리 만무한가…….
자크리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쪽의 사정은 알 바가 아니오. 우리는 황태후 폐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그대는 우리를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할 따름이오. 물론 준남작 각하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황태후 폐하께서는 깊은 관심을 보이실 거요.”
아주 대놓고 협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시 준남작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마. 우리 영지에는 애석하게도 쉰 명이나 되는 군인을 먹이고 재워줄 여유가 없다. 그대들은 불청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정말로 솔직하구려.”
여기에는 자크리도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양반께서 나오셨다.
“그럼 어쩔 거요? 우리를 이대로 내쫓을 거외까? 중앙의 분노를 두려워하시오.”
“물론 두렵다. 허나 시치미 떼지 마라, 용병대장. 프랑크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다. 그대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중앙의 분노는 우리를 피해가지 않는다.”
요컨대 황제파가 되기도 싫고 황태후파가 되기도 싫다는 얘기였다.
“마을 앞에서 하룻밤 머무르는 것은 허락한다. 따뜻한 스프도 제공하겠다. 그러나 마을 안으로 들일 수는 없다. 이쪽의 사정을 이해했는가, 용병대장이여.”
“세상에 이해되지 못할 사정은 아무것도 없소, 준남작 각하.”
자크리가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부터는 거래였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제시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서로를 설득하느냐였다.
“벌써 며칠을 꼬박 노숙했소. 근육은 빳빳하게 굳었고 허리도 굽었소. 언제 전투에 돌입할지 모르는 몸을 하룻밤이라도 따스한 곳에 머물게 해주고 싶은 이쪽의 심정, 준남작 각하께서도 이해하시리라 믿소외만.”
“그쪽 형편을 이해하는 대가로 나에게 무엇이 주어지는가?”
“우리 용병단은 약간의 흑색 허브를 배달하고 있지.”
사실이었다. 흑사병은 아직도 대륙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염병이 군대에 돌면 끝장이었다. 만약을 위하여 흑색 허브를 마차에 충분히 실었다.
“흐음.”
베르시 준남작이 팔짱을 끼고 오른발을 굴렀다.
“매력적인 제안이군. 내 영지에는 흑색 허브가 필요하다. 흑색 허브를 어느 정도 제공해준다면 스프에다 닭고기를 몇 점 섞어줄 의향까지 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분노를 사서야 수지가 맞지 않는다. 좋은 방법이 없는가?”
“여기 계신 이분은 용병이 아니라 아르테미스 신전의 사제님이오.”
자크리가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몇 시간 전부터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제레미가 나를 위해 준비해둔 위조 신분이었다. 마왕인 내가 신전의 사제가 되는 것만큼이나 웃긴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웃긴 일을 좋아했다. 내가 영주를 향하여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어려운 시대에 가여운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순례하는 분이지.”
“즉, 우리는 그대들 용병단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순례단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라?”
“바로 그렇소.”
“으음…….”
베르시 준남작이 이쪽을 쓰윽 훑어보았다.
“훌륭하다.”
그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아르테미스의 사도여! 그리고 그를 보호하는 신성한 전사들이여! 베르시 영지는 그대들을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