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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167화 (167/510)

00167 마왕만이 아는 세계  =========================================================================

“이해했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섭정과 황제, 어머니와 아들, 자국민과 외세, 왕당파와 공화파. 여러 입장이 뒤섞여서 혼돈을 자아냈다. 귀족들도 필시 어느 쪽에 붙어야 할까 주판을 열심히 두들기고 있겠지. 어쩌면 국소적인 영지전은 이미 일어났을지 모른다.

“그럼 궁금하신 점이 없다면 이제부터 우리 일행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제국로를 경유하여서…….”

“으음?”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임의 설정을 통해 알기로 프랑크 제국 내전에는 보다 복잡한 정황이 얽혀 있었다. 아직 중요한 지점이 설명되지 않았다. 자크리는 나의 표정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질문했다.

“전하. 혹시 소인의 설명에 미흡한 부분이 있었습니까?”

자크리가 물어왔다. 난쟁이는 정말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하.

나는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그랬다. 지금 시기에는 '아직' 비밀이었다. 십 년 후에야 공공연한 사실이 되겠지만 현재엔 진실을 아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심지어 각지에 비밀요원을 펼쳐놓은 파이몬의 해방동맹조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른다――.

내장의 깊은 곳에서 뜨거운 흥분이 서서히 밀려왔다.

나는 알고 있다. 프랑크 내전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이것이 대륙의 판도를 어떻게 뒤바꾸는지. 십 년 후에는 그저 역사서에 무미건조하게 적힐 사건의 개요. 그러나 지금은 천금보다 값진 정보였다.

“하하.”

미약하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크리와 제레미가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좋았다. 때마침 두 집단의 지휘권이 나한테 있어 다행이었다. 이쪽 마음대로 집단을 움직일 수 있다.

왜 명령체계도 일치시키지 않은 채 집단들을 나한테 보냈는지 솔직히 파이몬한테 엄청 따지고 싶었으나……사정이 달라졌다. 고맙다, 파이몬. 내게 뭘 기대했는지 상관없이 상상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지.

“자크리. 브르타뉴 왕국의 정세에 대해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가.”

“브르타뉴 왕국 말입니까? 여왕인 앙리에타가 월맹군에 패배하여 귀국했다는 것밖에는…….”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해방동맹은 프랑크 내전에 대하여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 당장 해방동맹의 브르타뉴 지부장에게 연락하도록. 왕국 변방에 군대가 움직이는지 확인해보라.”

“예? 전하, 소신으로서는 전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프랑크의 황제가 브르타뉴의 여왕에게 파병을 요청했을 것이다.”

자크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무슨 소리입니까!”

“이제 막 황제가 된 애송이와 수십 년째 나라를 운영한 황태후. 두 사람 중에 누가 유리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더군다나 황태후는 모국인 사르데냐 왕국의 지원을 받는데다, 바타비아 공화국과도 친밀하다. 이대로 내전이 일어나면 결국 황제는 황태후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겠지.”

내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사실을 황제라고 왜 모르겠는가.”

“설마, 외세의 군대를 빌려서 대항한다고……?”

그렇다.

외세에 손을 뻗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폐망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지만, 젊은 황제가 보기에는 약간의 국익이 빼앗기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권력을 쥐어잡는 편이 좋겠지.

하물며 브르타뉴 왕국은 대륙에서 가장 공화주의에 적대적인 국가. 저번 월맹군 전쟁에서도 앙리에타 여왕은 단지 공화주의가 퍼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국의 군대를 모조리 전멸시켰다……. 황태후에 충성하는 공화파 귀족 따위보다야 훨씬 더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할지 몰랐다.

자크리가 당황스러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아니, 전하께선 그걸 어찌 아십니까?”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마라. 중요한 것은 브르타뉴 지부에 확인을 해보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미소를 지었다.

“자크리, 자네는 해방동맹의 프랑크 지부장이다. 여차할 때 간부들과 연락하는 수단 정도야 갖고 있으리라 믿는다.”

“…….”

자크리가 일어서서 어디론가 향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밤의 숲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잠시 뒤에 자크리가 돌아왔다. 그는 표정이 부쩍 심각해져 있었다.

“여왕 앙리에타가 현재 수도를 비웠습니다. 귀족들과 함께 대규모 사냥을 떠났다고 합니다. 변방에 오우거가 출현했다고 하더군요. 왕족과 귀족이 군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사냥에 나서는 것은 그리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만…….”

“종종 전쟁을 숨기고 싶을 때 변명으로 사용하지.”

자크리가 침을 삼켰다.

“……그렇습니다.”

“황태후는 본격전으로 내전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을 걸세. 어차피 자신이 유리하다는 것을 아군도 알고 적군도 알아.”

그저 군대를 왕창 소집하여 아들을 위협한다. 용병을 고용할 돈이 전무한 황제에 비하여 황태후에게는 막대한 자금력이 있다. 이미 쪽수에서 상대가 안 된다. 아들은 겁을 먹고 별 수 없이 어머니한테 복종한다. 아마 이 정도가 황태후의 시나리오 아니였을까.

“그러나 만약에 황제가 브르타뉴의 군대를 끌어들이면 어떻게 되는가.”

“황태후는……감히 외세가 간섭해오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아아.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것일세.”

자크리가 브랜디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전쟁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리라 내다보시는지요?”

“흐흐. 시궁창 밑바닥에도 시궁창이 있음을 증명하겠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저절로 올라갔다. 내장 깊은 곳에서 올라오던 흥분은 점차 심장을 데웠고, 이제는 식도까지 뜨거워지고 있었다.

“자크리,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보게나! 프랑크의 판도가 어떻게 돌아갈지 상상력을 총동원해보게.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는 황제야. 게다가 황태후는 외국인 출신일세. 황태후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은 매국노이다. 황제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하고 내가 말했다.

“정작 그 황제는 외세를 잔뜩 끌어왔어. 브르타뉴는 프랑크와 오래동안 숙적이었네. 진정한 매국노는 황제가 아니냐는 말이야. 귀족들은 어느 쪽에도 쉽사리 충성을 맹세할 수 없지!”

“…….”

“결국 귀족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 사람은 이쪽으로, 저 사람은 저쪽으로, 사분오열되어 각자가 각자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겠지. 합스부르크 제국이 패망한 지금, 또 하나의 제국이 혼란을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다!”

그것도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향하여.

예컨대 여기 왕당파 귀족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황제에게 충성한다. 하지만 황제에게 충성할 경우, 어쩔 수 없이 브르타뉴 왕국과 협력해야 한다. 브르타뉴라고 맨입으로 황제를 도와줄 리 만무하다. 제국의 권리 중 상당부분이 브르타뉴한테 넘어간다. 황제에게 충성하면 도리어 원수 브르타뉴의 이익에 봉사하게 된다…….

그렇다고 브르타뉴에 대적하기도 난감하다. 브르타뉴의 침략에 맞서싸운다는 것은 황태후와 협력한다는 것. 따라서 공화파 귀족들과 한솥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이럴 수도 없다. 저럴 수도 없다. 개판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나는 웃었다.

“결국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어미와 아들의 정도 없다. 국가적 원수도 상관없다. 내전으로 얼마나 많은 백성이 피를 흘려도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직 권력.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인간의 피 묻은 비명이 사해에 낭자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당당한가. 이 얼마나 솔직한가!

강자의 품격이 뼈속까지 느껴진다. 그들은 말하고 있다. 나는 강하다고.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을 기꺼이 희생시킬 '자격'이 있다고. 나는 이토록 자신의 강력함을 의심하지 않는 자들을 볼 때마다 매번 경이롭다.

그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꼭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다!

그들이 더 이상 강자가 아니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만 해도 흥분된다……자신들이 약자라고 정해놓은 사람들에게 반격을 당했을 때, 약자들에게 모욕당하고 능욕당했을 때, 그들이 예전처럼 당당하고 고귀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 너무나도 궁금하다.

아아. 벌써부터 즐겁다!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월맹군 전쟁에 브르타뉴는 수천 명밖에 동원하지 않았다. 반면에 프랑크는 벌써 수만 명을 투입했다. 국력에 있어서 브르타뉴가 프랑크에 밀린다 한들, 우연찮게도 지금은 백중지세.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겠지.”

그리고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프랑크의 수많은 백성들은 약탈당한다.

제국군, 왕국군, 용병, 탈영병, 도적. 국적과 소속을 불문한다. 병사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또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전국의 마을들을 유린한다. 흑사병에서 살아남고 흉년까지 아슬아슬하게 버텨낸 민중들에게, 다시 한번 전쟁의 참화가 덮쳐온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으리라.

공화주의라는 이름의 전염병을 퍼트리기에 실로 적절하다.

정확하게 공화주의가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어차피 이 시대의 민중이다. 멍청하다.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하기에 도리어 좋다. 나는 그들의 귀가 원하는 단어만 골라내어 들려주면 그만이다.

자유! 평등! 억압에 반항하라. 원래 그대의 것인 권리를 되찾아라.

치장에 불과하다. 백성들은 귀족을 미워한다. 귀족의 위엄을 존경하는 한편 증오한다. 자신이 힘들게 일구어낸 농토를 빼앗고 전쟁에 동원시킨다. 그 증오심에 불을 지핀다. 하지만 증오심에는 약간의 치장이 필요하다…….

마치 자신이 귀족을 증오하기 때문에 봉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의를 위해 봉기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자유! 평등! 억압에 반항하라, 원래 그대의 것인 권리를 되찾아라. 이 수식어들은 충분히 증오심을 치장하고도 남는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보인다.

“자크리. 파이몬에게 어떤 명령을 받았는가.”

“……그것이, 황태후에게 합류하여, 최대한 공화파에 힘을 실어주라고.”

하하. 무르다. 파이몬, 한없이 무르다.

그게 무슨 명령이냐. 너무 추상적이지 않은가. 공화파에 힘을 실어주라니? 정확히 무슨 뜻인가. 왕당파를 최대한 죽여버리라는 뜻인가, 아니면 공화파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연설하라는 뜻인가.

역시 너에게는 모략이 어울리지 않는다. 모략은 약자의 도구이다. 정정당당하게 싸울 힘이 없는 자를 위하여 신께서 친히 모략을 창조하셨다 이 말이다. 이천 년 가까기 살아온 파이몬에겐 약자의 조급함도, 약자의 불안함도 생소하겠지. 그녀는 천성적으로 모략가가 될 수 없는 운명이다.

“지금부터 명령을 구체화시킨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허약한 종족인 인간으로 태어나서 마왕이 되었다. 모략이란 나 같은 겁쟁이한테나 어울리는 것이다.

“이것은 서열 제71위의 마왕, 이면(異面)의 단탈리안으로서 내리는 명령일지니. 양날도끼의 자크리. 붉은 흉터의 제레미. 그대들, 고귀한 마인으로서 마왕의 명령을 들으라.”

한 사람의 난쟁이와 한 사람의 엘프가 벌떡 일어서서 내 앞에 부복했다.

“우리의 목적은 프랑크 제국에 내전을 촉발시키는 것이며, 더 나아가 내전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먼저 자크리.”

“예! 명령을!”

“프랑크 제국에도 마왕성들이 분포해 있다. 그곳의 마왕들과 협력한다. 마왕들로 하여금 왕당파 귀족의 영지를 침략하게 한다.”

우리는 영지 내부에서 여타 마왕의 군세에 호응한다. 귀족들은 패배하게 만든다. 반면, 우리 용병대는 승리하게 조작한다. 귀족에 대한 민심은 떨어지고 공화파 소속의 용병대인 우리의 명성은 높아진다.

“마왕들을 설득하는 것은 내가 맡는다. 그 다음, 제레미.”

“존명.”

“공화파의 소귀족들을 위주로 암살한다.”

제레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도 암살의 임무를 맡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전하의 명령이라면 얼마든지 따르겠습니다.”

백작이나 자작과 같은 거물을 암살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스무 명의 정예 암살단이다. 준남작 정도는 어떻게든 된다. 내전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 특정 파벌의 귀족들이 연달아 살해되는 것이다. 당연히 의심은 왕당파한테, 더 나아가 황제한테 쏠린다.

권력을 위하여 외세를 동원했을뿐더러 자국의 귀족까지 암살한 황제. 평판이 말도 안 되게 떨어지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척 기대된다.

그날밤.

나는 모닥불 근처에 앉아 쉴 새 없이 연필을 놀렸다.

꽤 두툼한 원고들이 하룻밤 만에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내가 연설전에 써먹었던 논리와 수사학이 들어가 있었다. 이걸 쿤쿠스카 상회한테 맡겨서 대량으로 찍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이 지나가는 마을마다 뿌려버린다.

‘합스부르크 제국. 그 다음에는 프랑크 제국인가.’

나는 아무래도 제국이란 것과 전생에 악연을 쌓은 모양이었다. 무얼, 아마도 내가 일방적으로 당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전생에 당한 것을 단순히 되갚아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제국의 귀족들로서는 마음이 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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