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66화 (166/510)
  • 00166 마왕만이 아는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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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일행은 제국로(帝國路)를 따라 움직였다. 수천 년 전, 고대제국이 대륙의 절반을 호령하면서 곳곳에다 깔아놓은 돌길이 아직도 건전했다. 덕택에 우리는 짐마차를 끌고다니면서 쭉쭉 달려나갈 수가 있었다.

    나는 주변 풍광에 놀랐다. 프랑크 제국은 원래 세계의 프랑스에 대응했다. 프랑스, 하면 내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게 너른 벌판에 평화로운 경치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제국로를 지나치면서 보게 된 모습은 전혀 달랐다.

    숲.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숲――.

    앙상하게 매마른 겨울나무가 사방을 뒤덮었다. 수만 마리의 구렁이가 추위에 얼어붙어 그대로 꼬불꼬불 굳은 것 같았다. 벌목이 이루어진 평야는 정말 드문드문 보일 따름이었다. 야트막한 언덕길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지평선 너머까지 빼곡하게 숲이 이어져 있었다.

    여태까지 자연의 풍경을 보고 크게 감흥을 느낀 적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압도당했다. 자연이란 내버려두면 징그러우리 만치 번식하는 것이었다.

    내가 혀를 내둘렀다.

    “합스부르크와 풍경이 상당히 다르군.”

    “영주들의 권력이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용병대 대장 자크리가 대답했다.

    “벌목권과 개간권은 대체로 영주의 권리입니다. 영주가 얼마나 강한가, 촌민들이 얼마나 약한가, 그것에 따라서 숲의 규모도 달라집니다. 마을에 들르시면 재미난 광경을 보게 될 겁니다.”

    자크리의 목소리에 연한 비웃음이 묻어났다. 이 난쟁이는 자기를 별로 표현하지 않는 편이라서 때때로 이렇게 감정을 내보이는 것이 낯설었다.

    “주변에 나무들이 수두룩한데 정작 겨울에 땔감을 사지 못해서 얼어죽는 영지민이 항상 나옵니다. 차남과 삼남에게 물려줄 농토가 없어도 나무를 베어 개간할 수가 없습니다. 몰래 은전(隱田)을 만들어내면 팔다리가 잘리기 일쑤입니다.”

    “…….”

    자크리가 크흥, 하고 코를 먹었다.

    “겨울도 막바지입니다. 이젠 거의 초봄이지요. 올해도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었을 겁니다. 하지만 죽어나간 자 중에 영주 일가가 포함되진 않겠지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로군.”

    “예. 말씀 그대로입니다.”

    자크리의 말을 들은 이후로 사방을 뒤덮은 자연이 다르게 비추었다. 그것은 기형적이고 기괴했다. 나뭇가지가 꼭 인간의 팔이 거꾸로 꺾인 것처럼 보였다.

    “워이, 워이.”

    무리를 선도하는 자크리가 속력을 늦추었다. 제국로 저 앞편에 일단의 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자크리가 눈을 좁혀 그들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상단이군요. 호위대는 열 명 정도입니다.”

    “충돌이 일어날 것 같은가?”

    “저들이 단체로 미쳤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일부러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상단의 사람들은 우리가 멀리서 접근할 때부터 벌써 난리였다. 잔뜩 긴장해서 길가로 물러섰는데, 어떤 이들은 아예 숲속으로 뛰어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제레미가 말했다.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네요.”

    “당연하다. 이쪽은 쉰 명에 이르는 전사 집단이니.”

    자크리가 그것도 모르겠냐는 식으로 대꾸했다. 제레미가 방긋 웃었다.

    “그거 알아요? 당신, 되게 아름답게 재수없어요.”

    “치워라. 엘프한테 칭찬을 들어봤자 내 귀만 더러워진다.”

    “어쩜 말하는 모양새까지 이렇게 아름다우실까.”

    두 사람이 툭탁거리면서 말을 몰았다. 그 뒤로 나와 쉰 명의 군인이 뒤따랐다.

    자크리 말이 맞았다. 정예병이 이 정도씩이나 있으면 소규모 영지 따위는 단번에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저 상단 입장에서는 악몽이나 다름없겠지.

    과연 상단은 이쪽의 규모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상단 대표로 보이는 노인이 앞으로 나와서 우리를 영접했다.

    “헤르메스의 축복을.”

    노인은 가타부타 말을 하는 대신에 공손하게 돈주머니를 올려바쳤다. 이른바 통행세였다.

    “음.”

    자크리가 말에 올라탄 채로 주머니를 낚아챘다. 그는 주머니를 흔들었다. 짤랑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속에 금화가 몇 개나 들었는지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대여섯 번 주머니를 흔들더니 자크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에게도 헤르메스의 축복이 있기를.”

    “관용에 감사합니다.”

    늙은 상인이 허리를 한껏 낮추어 우리한테 인사했다.

    자크리가 말했다.

    “그대의 지혜가 그대를 구했을 뿐이오. 혹여 바라는 것이 있소?”

    “실례가 아니라면 기사님들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드 메디시스 황태후 폐하의 소집령에 응하는 길이오.”

    상인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루테티아 파리시오룸이 정녕 피로 물들 운명입니까.”

    “그대도 되도록이면 루테티아 파리시오룸으로 장사를 가진 마시오.”

    상인이 재차 한숨을 푹푹 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판단하여 파리에서 무구를 팔고자 했습니다만……. 하늘께서 제 뜻을 허락하시지 않는군요. 아니, 천금과 같은 충고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흐음.”

    자크리가 상단의 짐마차를 힐끗 바라보았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가 내게로 다가와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전하. 약간 이르지만 오늘은 여기서 야영해도 괜찮을련지요?”

    “괜찮은 수가 생각난 모양이로군.”

    “예. 썩 괜찮습니다.”

    자크리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물정에 밝기로는 나보다 용병대장으로 대륙을 전전한 자크리가 훨씬 더 밝았다.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자크리가 상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그대가 괜찮다면 이쪽에서 무구를 매입해줄 수 있소만.”

    늙은 상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입니까?”

    “아아. 어차피 우리는 황태후 폐하께 합류하오. 무구는 많을수록 좋지.”

    “…….”

    상인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고민에 빠진 기색이었다. 자크리가 몇 초 뜸을 들이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당장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되오.”

    “그 말씀은?”

    “어차피 슬슬 야영할 때가 되었소. 통행비도 받았으니 보초를 서주지. 하룻밤 동안 느긋하게 생각해보시오.”

    “……실로 관대하기에 이를 데 없는 처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크리의 결정에 따라 우리는 상단과 함께 노숙하게 되었다. 늙은 상인이 큰소리로 기사님들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겠다 말씀하셨다고 외쳤다. 그러자 숲에 숨어든 사람들이 슬그머니 기어나왔다.

    “못난 놈들! 네놈들을 어찌 대해주었는데! 배은망덕한 놈들!”

    늙은 상인이 작은 채찍을 꺼내어서 사람들의 등을 후려쳤다.

    “히익! 용서해주십시오, 나으리!”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용서를 빌었다. 군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상단의 일꾼들 일부가 도망친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품삯이 절반 이하로 깎였으리라.

    우리 일행은 그 광경을 모른 체하며 군막을 세웠다. 병사들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재를 조립했다. 대략 한 시간 만에 막사들이 전부 세워졌으니 정예병들이었다. 용병들의 얘기에 따르면 원래 본격적으로 군진을 만들려면 서너 시간은 걸린다고 하나, 대단한 속도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늦저녁.

    일행의 수뇌부가 모닥불에 모였다. 우리는 뜨겁게 데운 브랜디를 나눠 마시면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이곳 말고도 주변의 모닥불들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크리가 말했다.

    “왜 여기서 노숙하기로 결정했는지 해명할 기회를 구합니다.”

    “허락한다.”

    “황공합니다. 전하, 현재 프랑크 제국의 정세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계십니까?”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세하게 설명해라.”

    <던전 어택>의 설정집을 통하여 대충 이때쯤 각 나라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게임의 지식만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했다. 나는 제8차 월맹군을 십 년 이상 앞당겨서 일으켜버렸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 프랑크 제국은 두 쪽으로 나뉘었습니다. 황제와 황태후가 제각기 강력한 파벌을 이루어서 대립하고 있지요. 전하께서 우선 아셔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황태후에게 협력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있는가?”

    “황태후는 공화주의에 호의를 품고 있습니다.”

    과연. 충분한 이유였다.

    “황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프랑크 태생이 아닙니다. 사르데냐 왕국의 공작가에서 시집을 왔습니다. 사르데냐 왕국은 겉으로 왕국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상 도시들의 자치권이 상당히 강력합니다. 황태후에게 공화주의는 낯선 사상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친근합니다.……그렇다고 해서, 우리 <해방동맹>의 일원은 결코 아닙니다만.”

    이해했다.

    이건 나도 <던전 어택>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황태후는 벌써 삼 대째 섭정을 했다. 황제들이 어린 나이에 병으로 줄줄이 죽어나가자, 임시로 황태후가 황권을 거머쥔 것이었다. 황태후는 꽤나 유능하여 나라를 잘 운영했으나…….

    “어린 황제가 어머니에게 불만을 품고 있지요.”

    문제는 모친과 아들의 사이가 매우 나쁘다는 데 있었다.

    “현 황제, 앙리 3세는 한창 젋습니다. 일찍 병사한 형제들과 달리 몸이 펄펄하지요. 올해로 열여덟 살입니다.”

    “자기가 권력을 쥐어서 직접 나라를 운영해보고 싶겠군.”

    “말씀 그대로.”

    프랑크 제국의 젊은 황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생에서 절정기를 찍고 있었다. 그러나 국정은 벌써 삼 대째 황태후 중심으로 돌아갔다. 황제 주변에는 충신도 권신도 적었다.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황태후는 종교와 사상에 관대합니다. 여성의 몸으로 나라를 이끌어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지요. 그 덕에 프랑크 제국은, 바로 옆에 바타비아 공화국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당파와 공화파가 꽤나 사이 좋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공존하고 있었다. 과거형이었다. 현재형이 아니었다.

    “황제는 어미를 닮지 않은 모양이로군.”

    “예.”

    자크리가 브랜디를 한 모금 삼키고 말했다.

    “앙리 3세는 프랑크 제국의 황제이기 이전에 잠시간 폴리투니아 왕국의 왕위를 맡았습니다. 아시다시피 폴리투니아 왕국은 귀족들의 권한이 대단히 거대하여서…….”

    “귀족 공화정에 가까운 국가이지. 알고 있네.”

    왕권이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국가이다. 그곳에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외국 출신의 왕 앙리 3세가 얼마나 지난하고 힘겨운 생활을 겪었을련지.

    귀족들은 왕에게 충성하기보다 자신의 권익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고, 왕명을 좀 내리려고 해도 항상 귀족 의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름만 왕이지 실상 얼굴 마담에 지나지 않는다. 야망이 넘치고 젊은 국왕에게 공화주의는 끔찍한 사상으로 보였겠지…….

    “전 황제, 즉 형제가 병사하자 앙리 3세는 폴리투니아에서 거의 도망치다시피 돌아왔습니다. 프랑크 제국의 황위를 이어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프랑크 제국에서도 공화주의가 공공연하게 성립하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황제의 피를 이어받았다. 명분이 충분했다. 실력이 검증되진 않았지만 젊었다. 혈기가 넘쳤다.

    그런데 국왕이 되어도 황제가 되어도 권력은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허수아비 황제였다. 이윽고 젊은 황제는 공화주의에 분노하며, 자신의 권리를 어머니한테서 되돌려받고자 일어섰다.

    “이미 내전은 일어나기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으음.”

    “황태후는 외국인인데다 일찍 남편을 잃었습니다. 헌데도 평생을 프랑크 제국에 헌신했습니다. 지금의 제국은 사실상 그녀가 지키고 만들어낸 것. 자신의 나라를 아들이 망치려는 것에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웃었다. 대단한 콩가루 집안이로군.

    “이에 황태후는 영지귀족들의 병력과 용병대를 소집. 지금도 각지에서 병력이 프랑크 제국의 수도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전하. 우리는 그중의 한 부대로서 제국 내전에 참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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