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5 마왕만이 아는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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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에 파이몬의 <해방동맹>과 함께 움직인다.
이미 해방동맹에선 대규모 농민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대규모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해오는 것을 보니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가 되겠지. 해방동맹의 일원들은 지도부가 되어 농민반란을 이끌어갈 예정이었다.
여기서 나는 지도부와 함께 행동하면서 적절하게 지원사격을……그래. 무엇을 숨기겠는가. 적나라하게 말해서, 해방동맹에선 나한테 '선동질'을 요구했다.
아무리 흑사병에 흉년이 겹쳐 세상이 흉흉해졌다고 한들, 직접 창과 낫을 쥐어들고 귀족들과 한판 붙어불자고 생각하는 농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귀족에겐 기사가 있었다. 오러를 쓰는 기사는 농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광기가 필요하다. 연설은 광기를 심어주는 데 매우 탁월한 도구이다……확실히, 제8차 월맹군의 연설전에서 두각을 드러낸 나만큼 적절한 인재가 없으리라.
파이몬과 나의 목적이 일치했다고 봐야겠지. 저쪽에선 인간계의 왕국들이 무너지기를 바라고, 나는 아무튼 간에 인간계가 혼란에 빠지기를 원한다. 프랑크 제국에서 내 가신단이 될 인재들을 포섭하는 한편 가끔씩 연설로 민중을 선동해준다. 그게 내 일정이다.
나는 텔레포트 마법서로 프랑크 제국에 도착했다.
새하얀 빛이 휘감았다가 잠시 후에 사그라들었다.
눈을 뜨자, 너른 공터에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땅딸막한 난쟁이가 섞여 있었다. 난쟁이는 나를 보더니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녹색 턱수염의 자크 보놈이 위대하신 단탈리안 전하를 뵙습니다.”
난쟁이 자크 보놈은 이미 나와 한번 만난 적 있었다. 폐허의 성에서 하룻밤 머무르면서 파이몬에게 해방동맹을 소개받은 날, 자크 보놈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서로를 파악할 만큼 긴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지금이 사실상 첫만남이었다.
흔히들 첫인상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보인다고 한다. 정말로 그럴까?
대답부터 하자면, 맞다.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자크 보놈을 살펴보면 이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인사하지 않았다. 일단 고개를 까닥이고 걸음속도를 늦추면서 뜸을 들였다. 내 뒤를 따라서 추가로 텔레포트해오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것이었다. 신중한 성격이었다.
더불어서 옷이 낡았다. 자크 보놈의 뒤편에 선 사람들은 척봐도 용병이었다. 허리춤에 칼을 찼고 옷은 푸른색과 노란색, 보라색 따위로 화려하게 꾸몄다. 턱수염까지 길다랗게 기른 것이 있는 멋 없는 멋 전부 부리는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을 이끄는 대장인 자크 보놈은 평범하게 헤진 옷을 입었다라?
절대적으로 자신감이 있다는 얘기였다.
본래 자신감이 없는 지도자일수록 옷을 화려하게 입는다. 낡은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지도자의 특권이나 다름없다. 이 용병대에서 아마도 자크 보놈은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겠지.
그런 자가 나에게 지극히 공손하게 인사했다. 자신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부하들 앞에서. 즉, 외부인에 불과한 나를 무시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 본보기를 보여 부하들도 날 존중하게끔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종합하자면.
자크 보놈은 신중한 성격인데다 자신의 집단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쓸데없이 사치를 부리지도 않으며, 앞으로 오랫동안 여정을 함께할 사람인 나를 정중하게 맞이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개념찬 놈을 보았나!
내가 의도적으로 활짝 웃었다.
“오랜만일세, 자크 보놈 동지. 그동안 잘 지냈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들겼다.
“여전히 대단한 체격이네. 시간조차 자네의 몸을 감히 손상시키지 못하겠지. 앞으로 자네가 이끌어줄 여행이 얼마나 안전할지 벌써부터 안심이 되는군. 잘 부탁하네, 자크 보놈 대장!”
자크 보놈이 정성스럽게 나를 존중해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바로 위계서열을 제대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나는 외부인에 불과하다. 마왕이긴 하나 <해방동맹> 입장에선 제일 막내이다.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이번 여정의 목적을 달성하는지도 모른다. 완전 어린애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단지 마왕이라는 이유만으로 날 대접해주려 하고 있다.
이때 내가 그의 상관처럼 행동하려 들면 끝장이다. 자크 보놈은 나를 진상이라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들여야 하고, 부하들은 그런 관계에 불만을 품어 날 적대하게 된다. 집단이 아작나는 건 생각보다 무척 쉽다.
내 행동이 의외였을까. 난쟁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는 곧장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난쟁이인데도 천박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약간 기쁜 감정만이 나에게로 전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꽤나 마음이 잘 맞을 것 같군 그래.
“황송합니다. 이번에 전하를 호위하며 두어 달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겨울이 다 지나지 않아 으슬으슬 춥습니다만, 최대한 편안한 여정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이! 뭐하고 있나.”
자크 보놈이 뒤에 옹기종기 모인 병사들에게 소리 질렀다.
용병들이 예! 하고 우렁차게 대답하면서 내 앞에 도열했다. 다들 가슴팍에 판금갑옷을 입고 있었다. 정예병인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프랑크 제국에서는 일류 용병대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 않을까.
“양날도끼 용병단!”
자크 보놈이 뒷짐을 쥐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나는 그만 깜짝 놀랄 뻔했다. 지금까지 조곤조곤 말하던 목소리가 별안간 커져서 언덕 전체를 울렸기 때문이다.
용병들이 일렬로 기립하여 도끼창을 처억, 하고 내밀었다. 대략 서른 명이었다. 도끼창이 늦겨울의 햇빛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였다.
“단탈리안 전하께, 경례!”
용병 서른 명이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했다. 장관이었다. 이 시대, 기사를 제외하고 이 정도까지 제대로 단합된 군대는 극히 드물었다. 나는 박수를 쳤다.
“훌륭하군! 본인은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이다. 앞으로 본인이 우리의 여행에 도움을 줄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감당할 생각이다. 앞으로 잘해보자.”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소인을 부를 때는 자크리라 불러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자크 보놈, 아니 자크리가 90도 각도로 허리를 꺾었다. 하하. 여러모로 이번 여행은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음?”
그런데 용병들 말고도 아직 사람들이 뒤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회색 로브를 뒤집어썼다. 이쪽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가만히 서 있었는데, 용병들과 다르게 저쪽에선 감정이 거의 전해져오지 않았다.
“저들은 누구인가? 일꾼들인가?”
“그것이.”
자크리가 처음으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라? 의외였다. 무슨 일일까.
내가 그의 해명을 들으려고 할 때였다. 회색 로브의 집단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 자는 내 앞에서 대뜸 무릎을 꿇었다.
“재차 존안을 뵈옵나이다. 단탈리안 전하.”
“재차?”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고보니,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기억 속에서 누구일까 뒤지고 있는데 상대방이 천천히 머리에 쓴 로브를 뒤집었다. 로브에 싸였던 하늘색 머리카락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아, 그대는…….”
“이번에도 의뢰주가 전하의 호위를 명령했어요.”
여인이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반쪽이 심한 화상으로 흉터져 있었다.
지난 번 마계에서 습격을 받았을 때 파이몬의 명을 받고 라피스와 나를 구해준 암살자, 그녀가 눈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한테 진정한 왕으로 모셔도 되겠냐고 물었다가 잔소리만 듣고 물러난 여자였다.
“그래. 오랜만이군. 헌데…….”
내가 슬쩍 자크리를 쳐다보았다.
용병대와 암살단. 두 집단이나 함께한다는 얘기는 사전에 듣지 못했다. 정확히 위계가 어떻게 되는가? 용병단이 위쪽인가, 암살단이 위쪽인가? 누가 누구의 명령을 듣는가? 그것에 따라서 나의 대응도 달라져야만 했다.
자크리가 인상을 찡그렸다.
“소인은 해방동맹 프랑크 제국 지부의 지부장입니다. 이 사람은 파이몬 전하께 개인적으로 고용된 집단입니다.”
“…….”
무심코 으엑, 하고 소리를 내버릴 뻔했다. 한 마디로 명령체계가 잡히지 않았다는 소리이지 않은가. 절대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여차할 때 누가 지휘권을 잡아서 이 많은 인원을 통솔하라고?
나는 시선으로 자크리를 책망했다. 이런 건 내가 도착하기 이전에 현장의 책임자가 미리미리 알아서 처리할 문제였다. 노련한 용병대장인 자크리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경시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뭐가 문제냐?
내 눈짓의 의미를 알아듣고 자크 보놈이 죄송스러워했다.
“이번 여정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해방동맹. 고로 소인은 지휘권을 양해받고자 하였으나…….”
“의뢰주는 저희에게 단탈리안 전하의 명을 받으라고 말했어요.”
여인이 끼어들어 말했다.
“의뢰를 받아들인 이상, 저희의 명령권은 당연히 단탈리안 전하께서 가지셔야 합니다. 애당초 땅딸보의 명령을 들을 생각도 없구요.”
“……이쪽도 여리여리한 계집의 명령을 들을 생각이 없다.”
자크리가 여인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뭐라고 할까. 당장 쌍욕을 바가지로 쏟아붓고 싶은데 여기에 내가 있어서 간신히 인내한다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자크리 이 양반,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사실은 꽤나 난폭한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여인이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양날도끼인지 썩은 도끼인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기껏해야 인간계에서나 놀아보았겠지요. 저희는 말 그대로 지옥에서 올라온 암살단이에요. 여리여리한 계집년의 단검에 목이 긁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요?”
“글쎄. 네 녀석의 대가리에 도끼날이 박히면 그나마 멍청한 뇌가 조금쯤은 돌아갈지도 모르겠군.”
이윽고 양 집단의 수장이 절찬리에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잘 보니까, 자크리는 난쟁이족이었고 여인은 엘프족이었다. 난쟁이와 엘프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원수지간이라는 사실은 유명했다.
명령권을 두고 다투는 데다가 종족의 은원까지 섞였다.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한숨이 튀어나왔다.
“하아.”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도 불만이 남겠지. 자그마한 불만이 결국은 집단의 분열을 일으킨다. 이번 여정이 편할 것이라는 나의 예감은 이미 하늘 너머로 날아가버린 지 오래였다.
“어쩔 수 없군. 자크리.”
“예, 전하.”
자크리가 당장 말싸움을 멈추고 이쪽에 예를 취했다. 사실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본인은 그대의 경험과 실적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생각이었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만한 여유가 안 되는군.”
“송구하옵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양날도끼 용병단의 명령권은 본인이 가지겠다.”
자크리가 무릎을 꿇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그렇다. 제각기 따로 노는 집단들을 하나로 묶는 방법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인물에게 지휘권을 전부 양보해버리는 것뿐이다.
아마도 자크리는 이런 결과를 예상했겠지. 그래서 초장부터 나한테 매우 공손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끄응, 그것도 모르고 나는 모처럼 개념인을 만났다고 신났군.
내가 암살자 여인을 돌아보았다.
“이름은?”
“제레미라고 불러주세요, 단탈리안 전하. 소인이 이끄는 암살단의 이름은 붉은 흉터 암살단입니다.”
여인이 싱긋 웃었다. 여전히 얼굴 표정과 다르게 감정은 희미하기 그지없었다.
“좋다. 제레미, 이 시간부로 붉은 흉터 암살단의 명령권은 본인이 가진다.”
“존명. 주인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늘색 머리카락에 얼굴 반쪽이 화상 자국인 여인, 제레미가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제레미 뒤편에 서 있던 암살자들도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내 휘하에 서른 명의 용병과 스무 명의 암살자, 대략 쉰 명의 전투원이 들어왔다.
요컨대 용병단의 업무랑 암살단의 업무, 양쪽에 전부 익숙해질 필요가 생겼다……이게 뭔가? 분명히 나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에 불과했을 터이다. 깨닫고 보니 외부인은커녕 집단의 톱이 되었다. 빌어먹을.
“하아.”
도대체가 나는 무슨 일을 해도 쉽게 풀리는 경우가 없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세상이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