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64화 (164/510)
  • 00164 마왕만이 아는 세계  =========================================================================

    신전은 절벽에 있었다.

    검푸른 파도가 절벽에 부닥쳐서 산산이 부서졌다. 파도들이 아무리 팔을 뻗어도 가닿을 수 없는 위쪽, 새하얀 대리석 기둥들이 나열했다. 기둥들은 형편없이 허물어져 있었다.

    지붕은 반쯤 무너졌다. 허리부터 잘려나간 기둥도 있었다. 그들이 시간을 견디지 못하여 잃어버린 여분의 공간을, 바람이 바다의 냄새를 실어 가볍게 떠받치고 있었다. 그렇게 신전은 몸의 절반을 햇빛에 노출했고, 나머지 절반은 푸른 그늘에 맡기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햇빛과 그늘에 잠기어서 신전 정중앙의 텅빈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빈 정중앙을 누군가의 목소리가 채우기를 기다리면서.

    “드디어, 때가 왔어요.”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에 응답하여――마왕 파이몬이 입술을 열었다. 바다의 햇빛과 바다의 그늘이 이 여인을 슬그머니 덮고 있었다.

    “인간계의 열국은 분열되었습니다. 마계의 마왕군은 사분오열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평원과 산맥, 계곡까지 배회하던 유령들이 죽었습니다. 인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인의 풍요를 위하여. 그와 같은 거짓된 명분들이 드디어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파이몬이 흘려보내는 말과 말 사이로 파도소리가 작게 들렸다. 지금도 아래에선 거센 파도가 끊임없이 절벽을 두들겼다.

    “지금. 천명(天命)은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그러나 파이몬의 목소리에는 파도를 한낱 평화로운 변주로 들리게끔 하는 힘이 있었다.

    “그 천명은 우리에게 거짓된 명분에게 참혹한 최후를 선사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천명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왕관과 모든 옥좌를 파괴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천명은.”

    파이몬이 한 마디 말을 더해갈 때마다 마치 신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한때 찬란했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오로지 평민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족쇄를 풀어주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단지 그것이 당연하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이며, 오로지 그것이 당연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쳐부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동지들이여. 그 외의 이유는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가 존재해서는 안 될 이유는 무수합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수천 가지의 이유와 수만 가지의 변명을 덧붙여서 정의를 끝없이 아래로 추락시킬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정의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파이몬이 유리잔을 앞으로 들었다.

    “그것이 옳기 때문에!”

    수십의 사람들이 뒤따라서 유리잔을 치켜들었다.

    “사람은 때때로 혐오스럽습니다. 군중은 때때로 악합니다. 고로, 우리는 사람을 위해서도 군중을 위해서도 행동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단지 귀족을 증오하기 때문에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연달아 입을 열었다.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 이상의 말은 무용하다는 듯, 유리잔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포도주가 투명한 유리를 따라 그녀의 입술 틈새로 흘러들었다. 그중 한 줄기의 포도주가 딴길로 새어 파이몬의 새하얀 턱선에 흘렀다.

    파이몬이 유리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혁명을 위하여!”

    곧이어 수십 개의 유리잔이 대리석 바닥에 던져졌다. 유리잔들은 수십수백의 찬란한 파편이 되어 산산이 깨졌다. 바다의 냄새, 생명이 썩어가는 냄새가 잠시 유리파편들을 감싸안아 부유하였다.

    *  *  *

    던전 건축은 라피스의 조언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녀가 말한 대로 건축업자들을 잔뜩 불러들여서 예산안을 제시해보라 그랬더니, 세상에나. 처음에 2,000만 골드를 호가하던 건축비가 놀랍게도 1,400만 골드까지 줄어들었다. 자그마치 600만 골드까지 줄어든 것이었다.

    처음에 이천 만 골드를 부른 <붉은 대리석 건축소>의 대표 난쟁이는 안절부절못해서 나랑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 마디 쏘아주지 않을 내가 아니었다.

    “이보게, 소장. 내 평생 이런저런 일을 다 겪어보았지만 사흘 만에 육백 만 골드를 벌어본 것은 또 처음일세. 이게 전부 소장 덕분이네만.”

    “……소, 소인의 건축소는 총합 1,350만 골드에 전하의 처소를 만들 수 있나이다!”

    난쟁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내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얼. 사람이란 본디 이기적이어야 하는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무척 훌륭한 사람이야, 난쟁이 소장. 멋진 인격자라네. 본인한테서 인격을 칭찬받는 사람은 세상에 얼마 없으니까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토, 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긴 뭘 더 통촉할 것이 있겠는고. 자네를 이해하네. 하하하.”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턱 하고 올렸다. 난쟁이는 이제 이마에서 땀줄기가 주르륵 흘러서 덥수룩한 수염까지 적실 지경이었다.

    그날 종일토록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자그마치 열 층짜리 지하 던전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디자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 통로는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들은 나의 요구사항을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일종의 미로처럼 던전을 건축할 것. 그리고 두터운 미로의 벽 너머에 마족 마을을 건설할 것. 수천 년 동안 건축업에 종사해온 고블린과 난쟁이한테도 이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토론이 계속되면서 자연스럽게 의견이 나뉘었다. 고블린 파와 난쟁이 파로.

    한 고블린이 입에 거품을 물면서 삿대질을 했다.

    “케르륵! 멍청한 딸땅보 놈들! 왜 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중앙통로의 층을 높게 만들어두지 않으면 덩치가 큰 마인들이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된단 말이다!”

    “흥, 녹색 두더쥐가 아니랄까봐 하나만 생각하고 다른 하나는 모르는군.”

    난쟁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찌나 콧바람이 거센지 하얀 수염이 부르르 떨었다.

    “천장을 높게 지어버리면 강도가 약해진다. 천 년도 견디지 못하고 마왕성이 무너질걸.”

    “그건 네놈 사무소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이지. 케륵, 오리칼코스로 층을 지지하게 하면 그만이야.”

    “허, 대갈통을 토마토즙으로 채운 족속답구만. 오리칼코스로 층을 지지해? 도대체 예산이 몇 배로 뛸지 상상도 못하겠군. 이천만 골드가 아니라 삼천만 골드가 있어도 부족하다.”

    “어차피 제련할 필요도 없어. 케르륵, 원석 통째로 함유시키면 돼! 네놈들은 항상 상상력이 부족하지. 여긴 마왕성이야. 마력이 넘쳐난다고! 다른 장소와는 강도 자체가 달라.”

    나는 하품을 참으면서 두 종족의 열띤 싸움을 지켜보았다.

    오리칼코스니 뭐니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아마도 건축 전문인에게는 무척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임에 틀림없었다. 자고로 전문인에게 중요한 문제만큼 일반인에게 가소로운 문제는 없었다.

    “라피스. 쟤네 뭐 저리 피 터지게 쌈박질 하냐?”

    내가 조용히 물었다. 라피스는 내 옆에 기립해 있었다. 그녀는 나의 비서이자 이번 프로젝트의 최고 책임자로 참석했다.

    라피스 역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부터 고블린과 드워프는 서로를 마뜩잖게 여깁니다. 두 종족이 마계에서 담당하는 전문영역이 상당히 많이 겹치기 때문이지요. 서큐버스와 님프가 서로를 싫어하는 것과 똑같지요.”

    “음? 님프가 마계에서 뭘 주로 담당하길래?”

    “물론 매춘업입니다.”

    아하, 그런가. 재밌는 일이었다. 종족에 따라 종사하는 직종이 대체로 구별되다니. 내가 흥미로워 하는 것을 느꼈는지 라피스가 부연해서 설명했다.

    “매춘부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지옥마다 기준이 약간 다릅니다만 대략 3등급, 2등급, 1등급으로 나뉩니다. 3등급은 고객에게 육체적 만족만을 줍니다. 반면에 1등급 매춘부는 고객을 따라서 무도회 등의 사교계에도 참석하지요. 잔치의 꽃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헤에.”

    “서큐버스족은 주로 3등급 2등급 매춘부입니다. 대다수의 1등급 매춘부는 님프족에서 배출하지요. 그렇기에 같은 매춘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모욕하고 경시합니다.”

    경멸과 시기는 어디에나 있었다.

    나는 시니컬한 기분이 들어서 말을 툭 하고 내뱉었다.

    “어리석네.”

    “예. 지극히 비합리적입니다.”

    “흐음. 남들을 경멸해야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부류가 있는 것이겠지.”

    우리 둘은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블린들과 난쟁이들이 이제는 거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떠들고 있었다. 거기에는 장인으로서의 자존심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끼어 있으리라.

    내가 라피스를 슬쩍 바라보고 웃었다.

    “그래서 일부러 고블린이랑 난쟁이를 불러들였구나, 라피스.”

    “예?”

    “쓸데없이 자존심이 얽히면 사람들은 비이성적이게 되지. 건축소끼리 단합해서 가격을 올리면 난 어쩔 수 없이 이천만 골드를 지출해야 할 거야. 고블린족만 부르거나 난쟁이족만 불렀다면 아마 비슷하게 흘러갔겠지.”

    그러나 라피스는 일부러 적대적인 두 종족을 불러들였다. 우리 고블린은 저놈들보다 뛰어나게 건축할 수 있다! 우리 난쟁이는 저놈들보다 효율적으로 건축할 수 있다!……각 사무소에서 이익뿐만이 아니라 자존심까지 걸고 경쟁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종족의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집단의 자존심이 끼어들면 어째서인지 사람들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이기려 든단 말이지. 훌륭한 수법이야, 라피스. 나중에 추가로 급여를 지급하지.”

    “……신기하군요.”

    라피스의 청금석처럼 푸른 눈동자가 날 빤히 바라보았다.

    “응?”

    “단탈리안 님께선 상업에 관해서는 완벽하게 무지하십니다. 제가 알기로 군략에 대해서도 결코 뛰어나시지 않습니다. 헌데 상업이든 군략이든, 그곳에 모략이 끼어들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통찰력을 발휘하십니다.”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나를 칭찬하는 것 같았다.

    “역시 단탈리안 님께는 실무진이 필요합니다. 유능한 전문가들이 단탈리안 님의 휘하에 모여들었을 때, 그들은 단탈리안 님의 지휘를 받아 공포스러운 오페라를 연주하겠지요.”

    “아. 안 그래도 이번 업무만 마무리되면 바깥에 좀 다녀오려고.”

    던전 건축은 하루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일단 시작해둘 필요가 있다. 그 후에 나는 인재를 찾기 위하여 대륙을 쏘다닐 예정이다. 대충 네 명 정도를 영입하고 싶다. 잘 되면 말이지.

    뭐, 마침 파이몬에게 부탁받은 일도 있다. 겸사겸사란 거다.

    고블린과 난쟁이 간에 폭발한 토론은 장장 여섯 시간에 걸쳐서 겨우 마무리되었다.

    중간에 종족들끼리 개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말리기도 귀찮아서 라피스와 함께 포도주를 주고받으며 흥미롭게 싸움판을 구경했다. 나는 고블린이 이길 거라는 데 5골드, 라피스는 난쟁이가 이길 거라는 데 5골드를 걸었다. 참고로 난쟁이가 이겨버렸다. 라피스와는 절대로 돈내기를 해선 안 되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전하. 저희는 1,700만 골드에 전하의 처소를 진상해보이겠나이다.”

    “소인은 1,200만 골드에 세상의 어느 곳보다 멋진 마왕성을 짓겠습니다.”

    예산안은 크게 두 축으로 갈렸다.

    첫 번째. 돈을 크게 쓰더라도 통로를 널찍널찍하게 짓는다. 대다수의 고블린이 첫 번째 예산안을 지지했다. 대형 몬스터가 이동하기에 용이하거니와, 천장이 높아야지 던전 안의 생활환경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 최대한 돈을 아낀다. 난쟁이들이 두 번째 예산안을 지지했다. 대형 몬스터가 거주할 지하층만 넓게 만들고 나머지는 천장이 낮게 건축한다.

    두 가지의 제안을 눈앞에 두고.

    “본인의 마왕성은 10층으로 지어진다. 본인은 각 층마다 다른 사무소에게 일을 맡기겠노라.”

    나는 두 종족을 모두 끌어안았다.

    이것 역시 라피스가 조언한 바에 따른 것이다. 한 업체에 일을 몰아주면 경쟁이 사라진다. 이곳에 모인 건축소들은 어차피 마계에서 일류를 내달리는 곳뿐. 부실설계의 위험 따위는 없다. 문제는 저들이 얼마나 열과 성의를 다받쳐서 일하느냐였다.

    라피스를 총책임자로 맡긴다. 건축자재 구입과 건축인력 동원은 쿤쿠스카 상회에서 중개한다. 이 모든 과정을 라피스――그리고 그녀 뒤에는 마계의 전설적 상인인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서 있다――감독하는 이상 행여나 딴 짓거리를 벌이기란 어려울 거다.

    “혀,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고블린과 난쟁이는 똥씹은 표정이었지만 복종했다. 중간에 삥땅을 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들로서도 납득할 만한 결과였다. 던전 건축은 그 자체로 큰 이득을 약속할 정도로 막대한 사업이었으니까.

    이렇게 던전 건축의 초석을 마련했다. 나는 임시적으로 영지 업무는 파르시에게, 마왕성 업무는 라피스와 라우라에게 맡긴 다음, 훌쩍 떠났다.

    목표지는 프랑크 제국. 파이몬의 <해방동맹>이 날 기다리는 곳이었고.

    ――동시에, 던전 어택의 주인공인 용사가 사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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